이삿짐센터 직원이 자꾸 슬금슬금 우리 눈치를 보았다. 모두 네 분이 왔는데 고된 노동을 만회하려고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농담도 없이 묵묵히 짐만 날랐다. 아침 일찍 와서 저녁 무렵에 끝났으니 꽤 오래 같이 있었던 셈인데 그런 분위기는 시종일관 계속되었다. 그들이 들여놓고 간 짐을 챙기며 혼자 곰곰 생각해 보니 그건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한 젊은 직원이 아내에게 출판사를 하시느냐고 묻더라는 것인데 그건 아마 이삿짐의 절반에 육박하는 책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직원은 책이 이렇게 많고, 특히 박스를 풀지 않은 것도 여러 개인 걸 보면 이 사람들은 출판사를 하고 있는 게 분명하고, 구멍가게도 하나 없는 벽촌으로 왔으니 분명 사업이 거들 난 게 분명하다는 추리를 했던 모양이다. 그 덕분에 우리의 이사는 큰 추가 비용이 들지 않았다. 시외 구간이어서 그렇기도 하고, 낡은 잔 짐들이 많아 우리는 별도의 추가비용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새 아파트에 들어가는 짐이 가장 좋을 것이다. 우리 같은 고객은 기피 순위 몇 번째에 꼽힐 것이다. 그래도 그 중 한 분의 여자 직원이 가면서 짤막한 덕담을 해 주었다. "공기 좋고 넓고, 이 집이 더 좋네요." 그런 의례적인 격려가 아니더라도 살아 보면 촌이 좋은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부산에서 반백 년을 살았다. 출생지인 경남 창녕군 남지읍에서 2년 정도, 서른 초반 직장 때문에 서울에서 2년 정도 산 것을 빼고는 부산을 떠나 본 적이 없다. 범일동 산동네와 매축지에서 유년을 보냈고 부암 연지 양정 수영을 거쳤다. 내 살과 뼈, 생각의 잣대가 여기서 만들어졌다. 부산이 불러주는대로 나는 받아 적었고 부산의 골목 언저리에서 시를 캐냈다. 그런 부산을 떠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서운함과 두려움. 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남보다 두세 배는 더 걸린다. 그런 내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듯 수영집은 어둑하고 좁아 보여 임자가 선뜻 나서지 않았다. 1년 가까운 시간, 집만 둘러보고 갈 뿐 흥정을 붙이는 사람이 없었다.
 
용케 우리 집을 사겠다는 분이 나타나 급하게 날을 잡았다. 이사 하루 전날, 수영의 집배원아저씨를 만나 인사를 드렸다. 십 년 가까이 우리에게 오는 우편물을 챙겨 주셨다. 부재 중에 오는 등기우편도 대신 사인해 집안에 넣어줄 정도로 믿고 맡기는 사이가 되었는데 서운했다. 사적공원 푸조나무와 곰솔과 와목과 팔도시장을 한 바퀴 돌았다. 나에게 커다란 격려가 되어 주었던 참으로 고마운 이웃들이었다. 우리가 살았던 집도 마찬가지. 낡고 침침했지만 거기서 나는 청춘의 끝을 보냈다. 아이들을 키워 다 내보냈다. 우리가 시멘트를 걷어내고 심은 나무 그늘로 좁은 마당은 울창해졌다. 하지만 수영집과의 인연이 끝나려고 그랬던지 그동안 잘 자라던 난이 시들고, 집 앞의 아파트 재건축 때문에 동네는 소란스러워지고 있다. 이게 완공되고 주변 환경이 달라지면 집값은 오를 것이다. 그러나 10여 년 전 양정 집을 팔았던 때처럼 개발이익에 대한 미련은 없다. 가야 할 때가 되었으면 가야 한다.
 
새로 들어갈 김해시 생림면 도요리 집을 대대적으로 수리한 1주일 넘는 기간 동안에도 나는 책 만드는 일에 묶여 있었다. 다행히 이삿짐 챙기는 일은 조금 힘을 보태었지만 아이들의 빈자리를 내가 다 메워 주지는 못했다. 도시형의 아내를 이 적막한 변방에 주민등록을 옮기게 해 미안했다. 어수선한 짐 구덩이 속에서 자정 무렵 불을 끄고 막 잠자리에 드려는데 이윤택 선생께서 수박을 사들고 오셨다. 온화한 도요의 성품을 따르며 여기서 살다가 여기서 죽자고 합의하며 둘이 웃었다. 장마철이라 걱정했는데 하루 종일 비는 한 방울도 오지 않았다. 들판 개구리들이 우리의 이주를 반기는 환영 교향곡을 우렁차게 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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