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의 딸로 태어나 경작 본능 꿈틀
마당 앞 목련·산수유 나무 등 심어
식기류로 대체한 화분 보며 실소

듬성한 명자나무 잎 보니 마음에 걸려
먹성 좋은 미국선녀벌레 퇴치에 땀 줄줄
솟아나는 풀 한포기도 잘 자라야 안심


아침부터 에어컨을 켜고 실내에 머물러 있다가 점심 무렵에는 답답해서 창문을 열었다. 햇볕이 얼마나 쨍쨍한지 시멘트 마당이 금방이라도 쩍쩍 갈라질 것 같다. 그래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여름 내내 서 있는 나무들은 푸르고 싱싱한 것이 신기하다. 저녁마다 물을 주는 내 집 나무는 물론이고 한해 내내 부러 물 주는 일 없는 앞집의 나무들도 땡볕을 잘 견디고 있다.
 
물을 주는 나무나 안 주는 나무나 마찬가지라면 나는 뭣하러 날마다 물을 주고 있었던 걸까. 괜한 극성이었나 하는 마음으로 실하게 매달려 있는 앞집 대추와 감을 바라보자니까 그러게나 말이다 하고 작은 일에 안달복달하는 내 성미를 흉이라도 보듯이 고양이 세 마리가 쳐다보고 있다.
 
들며날며 음식 찌꺼기 탐하는 것을 보다 못해 먹이를 조금씩 주어 버릇했더니 제 집이기라도 한 듯 아예 주저앉았다. 도시에서야 길고양이한테 밥을 주는 게 옳다 그르다 말들이 많더라만, 시골에서야 산 생명에게 먹을 거 준다고 트집잡힐 일 없다. 자꾸 밥을 주니 인간에게 기대어 사냥 본능을 잃는 것 같아 더러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남편과 의견이 다를 뿐. 일곱 살 손녀가 다니러 와서 아침 저녁 마구 퍼주고 간 뒤로는 고양이들도 아주 단단히 작정을 한 듯, 아무리 눈총을 주어도 움쩍도 않는다.
 
고양이 하는 짓이야 그렇다 치고, 아까운 것은 그늘이다. 처음 이 집에 이사를 왔을 때는 사방 이웃인 도요마을 중앙통에 자리잡은 이 집이 마냥 좋았다. 그러나 사방이 너무 트이다 보니 마당을 살짝 가려줄 나무를 심어야겠다 싶었다. 너무 환히 트여 있으니 오가는 이웃들과 담너머로 무시로 얼굴을 마주쳐야 해서 아주 살짝만 가리고 살았으면 해서였다. 그래 키가 큰 목련나무와 산수유나무, 감나무 같은 것들을 심었다. 담 높이에도 못 미치던 목련나무와 산수유나무의 키가 이제 담을 훌쩍 넘어 올해는 제법 그늘다운 그늘이 되었다. 그런데 그 귀한 그늘을 고양이들이 먼저 차지하고 앉은 것이다.

▲ 일러스트=이지산

마당으로 나가 고양이들을 내쫓고는 그늘 아래 선다. 내가 이 그늘을 만들려고 얼마나 공을 들인 줄 아냐? 에어컨을 켜고 방안에 갇혀 있으려고 시골에 온 게 아니란 말이다. 마당을 둘러본다. 올해는 모종이 한창 나오던 때 뭘 좀 쓰느라고 바빠 채소를 심지 못했다. 그래도 구석구석에서 머위, 들깨, 취나물, 토마토, 참비름 같은 것들이 저절로 자라 심심하면 거두어 먹을 게 있다.
 
수련 옆에는 지난해 가을에 우연히 몇 개 들어와서는 쏠쏠하게 늘어난 다육이가 제법 구색을 갖추고 있어 들여다볼 것들도 썩 늘었다. 햇볕 잘 받고 쑥쑥 자라는 다육이들에게 눈길이 가다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화분 대신 손이 잘 안 가는 그릇에 구멍을 뚫은 대체 화분들은 다관이며 숙우, 찻잔이나 물컵에서부터 오목접시며 국그릇, 밥그릇까지 다 있다. 거기다 아들이 요르단에서 가져온 머드팩 용기며, 양철 깡통까지 끼어들어 꼭 부엌살림 세트 같다.
 
빈 땅, 빈 그릇을 그냥 보아주지 못하는 나는 맹렬한 경작 본능을 지녔다. 농사꾼의 딸이니 당연한 본성이다. 때문에 내가 고이 간수하는 것들은 집안에 보다 마당에 더 많다고 흉을 보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식물에게 가는 정은 거둘 수 없다. 한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 식물을 보고 있으면 그것들이 날마다 거기 있어 반갑고 고맙기 그지없다.
 
그래 나무들을 보며 바람 잘 날 없는 집안의 길흉을 나름 점쳐 볼 때도 있다. 초파일 무렵 피었던 수련을 보고서는 대단한 축복이라도 받은 듯 마음이 좋아 사방에 복을 나눠주었다. 사방 늘어지는 가지를 어쩌지 못하던 오미자가 전봇대를 타고 맹렬하게 자라기 시작하자 올 한해 내게 혹 복이 넝쿨로 쏟아져 들어오지 않을까 마음이 설레기도 했다.
 
내 집에 들어온 것은 나무 한 그루와 마찬가지로 풀 한 포기도 잘 자라야 기분이 좋다. 나무야 당연히 그렇지만 여기저기 끝없이 솟아나는 풀 한 포기도 말라 죽는 것보다는 무럭무럭 자라다가 내 손에 뽑히는 걸 보는 게 즐겁다. 생명이란 것은 무릇 잘 자라야 좋은 법이다. 그런 마음으로 마당을 살피니, 큰 화분으로 옮겨 심은 황칠나무 잎이 더 자라지 않고 누릇누릇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무더기로 피던 더덕꽃을 올해 보지 못한 것은 무성한 잎을 잘라버린 탓이다. 내년에는 그러지 말아야겠다.
 
목련나무 그늘에 서서 연탄화덕에 심어둔 세이지를 들여다보며 그런 다짐을 하다가 무심히 그 너머 명자나무를 살피는데, 어라 명자나무 잎들 여기저기가 듬성듬성하다. 듬성듬성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 먹혀버린 것도 있다. 사촌이라는 모과는 시고 떫은 맛에 향기가 강하지만 명자열매는 과육이 부드럽고 향기도 부드러워 해마다 가지를 잘라주며 아껴온 것이다. 이른 봄 꽃 지고 나서 대여섯 개의 열매가 자라더니 다 떨어지고 어린애 주먹 만한 것 하나가 탐스럽게 익고 있는데, 누가 잎을 갉아먹는가 말이다.
 
제일 먼저 의심이 가는 것이 두어 주일 전에 치자나무의 잎을 절반이나 갉아먹은 호랑나비 애벌레다. 이 녀석은 어찌나 먹성이 좋은지 치자나무를 먹느라고 며칠 동안 사방에 렌즈콩만한 똥을 싸질러 놓았었다. 저러다 치자나무 죽이겠다고 애을 태우면서도 애벌레가 자라서 나비가 될 것을 생각하며 쫓아내지 못했는데 이젠 또 명자나무란 말이냐.
 
쯧쯧 혀를 차면서 들여다보니 잎사귀 가득 손톱 만한 벌레가 달라붙어 있다. 회색의 벌레들은 내가 들여다보든지 말든지 잎을 갉아먹느라 분주하다. 손으로 툭툭 치니 벌레들이 또 후드득 날아오른다. 날개까지 달린 놈들이다. 명자나무 심은 지 다섯 해가 지났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다. 문제는 잎이 아니라 딱 하나 매달려서 자라고 있는 열매다. 올해는 어쨌거나 저걸 꿀에 절여서 차로 마셔야 하는데 말이다.  투덜거리면서 명자나무 잎들을 헤집어 보니 갉아먹고 있는 벌레들 외에도 잎의 뒷면에는 알을 낳고 고치까지 지었는지 거미줄 같은 것이 잔뜩 엉겨 있다. 여기저기 들춰 보니 명자나무 만이 아니라 라일락과 산수유나무에도 그것들이 떼를 지어 달라붙어 있다. 너희들은 도대체 뭐냐. 홧김에 가지를 툭툭 두드리니 벌레들이 푸르르 날아오른다. 잎을 먹는 것들은 대체로 꼬물꼬물 기어다니는 것들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아, 그러고 보니 며칠 전 텔레비전에서 본 바로 그 미국선녀벌레다. 예쁜 이름과 달리 잎이며 가지, 열매까지 닥치는대로 먹는 먹성 좋은 벌레라서 한 번 꼬이면 나무를 다 먹어버린다던데. 정체를 알고 나니 마음이 급해진다. 전지가위로 명자나무와 라일락의 가지를 사정없이 자른다. 열매가 달린 가지만 남기고 잘라 버려 볼품없이 조그만 나무가 되어 버렸다. 내년 봄 좋은 명자꽃 보기는 글렀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여름 한낮, 한바탕 전지가위를 휘두르고 나니 소나기라도 맞은 듯 몸이 다 젖었다. 수도꼭지를 있는대로 열어 수압을 높이고 나무마다 물을 퍼붓자 선녀벌레들이 푸르르 날아 도망을 간다. 나는 숨이 차고 머리가 아프다. 명자나무 지키려다가 내가 더위를 먹을 것 같다.
 
이 글을 마무리한 아침에도 나는 마당에 나가 서서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명자나무 잎은 더이상 상하지 않은 상태다. 미국선녀벌레는 몇 마리가 남아서 라일락 잎을 먹고 있다. 라일락은 열매가 없는 나무니까 좀 먹게 내버려두기로 한다.
 

 

 

>>조명숙/김해 생림에서 태어남. 김해여고 졸업.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 소설집 <조금씩 도둑><댄싱맘> 등 다수. mbc창작동화대상, 향파문학상 등 수상.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