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만 개 직업이 경쟁하는 현대사회
모두에게 필요한 건 ‘고도의 도덕성’

지키면 편해도 어기면 가차없는 응징
다문화국가 미국의 생존 원칙은 ‘법’

하루키 소설 “해야 할 일 하는 게 신사”
잘 익은 밤송이만큼 알차게 살아도 만족



올림픽이 한창입니다.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올림픽 무대에 선다는 것은 빛나는 생애의 한 지점을 통과하고 있다는 것이며,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된 일이지요. 저는 축구를 좋아합니다만 구청장기 조기축구대회만 나가도 긴장 되고, 특히 승부차기를 할 때는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4년 아니 청춘을 바쳐서 올림픽 무대에 오른 젊은 선수의 심장은 얼마나 쿵쾅거릴 것이며 이를 쳐다보는 가족들은 얼마나 마음을 졸일까요. 1986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처음 나간 아시아 최고의 공격수 최순호 선수는 처음 아르헨티나와의 게임이 시작됐을 때 약 5분 동안 우리 선수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정도로 긴장 했다고 토로했지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에서 양정모 선수가 대한민국 첫 금메달을 땄을 때 온 나라가 들썩거렸던 기억을 생각하면 이번 리우 올림픽 사격에서 베트남에 첫 금메달을 안겨 준 호앙 쑤안 빈 선수가 국민영웅으로 떠오른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스포츠는 국력'이란 말이 있습니다. 정말 맞는 말입니다. 과학적 훈련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0.1초를 다투는 치열한 승부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일입니다. 국력이 미약한 나라가 많은 돈을 들여 과학적 장비와 소요인원을 가동하기는 어려운 일이지요. 지난 런던올림픽에서 우리나라는 종합 5위의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스포츠는 국력'이란 기준에 의하면 대한민국은 세계 국력 5위라는 뜻으로 여길 수 있지만, 아마 국력보다 더 뛰어나고 더 많은 땀을 흘린 선수의 개인 역량도 한몫 하였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금메달을 딴 선수에게 지급하는 연금한도는 월 100만 원에 불과합니다. 금메달 여러 개를 따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포상금이 있지만 좀 박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함민복 시인의 '긍정적인 밥'이란 시에 이런 싯구가 있습니다.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싶으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저는 이렇게 읽히더군요. '금메달 하나에 월 100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가슴에 태극기를 달았는데 싶으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올림픽은 개인의 영광일까요, 국가의 영광일까요. 국가 순위를 매기는 걸 보면 분명 국가의 영광도 있는 것인데 특히 프로가 없는 비인기 종목 선수들을 보면 마음이 짠해지기도 합니다.
 
경제불황과 취직절벽으로 공무원에 지원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졌습니다. 공무원이 인기종목이 된 셈이죠. 젊은이들이 창의적인 직업을 꿈꾸지 않으면 나라 장래가 어둡다는 이유로 우려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만 88올림픽이 끝난 이후 제가 대학을 졸업하던 즈음엔 공무원은 선호하는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당시는 대학을 졸업하기만 하면 취직자리는 널려 있었지요. 세계 10위 경제대국이 된 지금 이런 상황을 보면 국가경제 규모와 개인경제 상황이 꼭 맞물리는 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보릿고개 시절엔 밥이 해결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밥이 해결되니 또 다른 경쟁이 있고 그 경쟁을 넘어서도 또 위기가 찾아오는걸 보면 '인생은 그래서 고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됩니다.
 
여하튼 공무원은 고도의 도덕성이 요구되는 직업입니다. 직업의 분화가 미미했던 과거에는 더욱 그러했지요. 농촌에 살았던 어릴 적 제 눈에는 직업이라 해야 교사와 면사무소 서기, 지서 순경, 우편배달부, 농부, 공장직원, 읍내 상인, 이런 사람들이 전부였지요. 그런데 지금은 수만 개의 직업이 생겼습니다. 모든 것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현대사회에서 어느 직업이라도 고도의 도덕성이 요구되지 않는 직업이 있을까요. 공무원만 고도의 도덕성이 요구된다는 문언을 사용하다보면 부지불식간에 다른 직업에는 고도의 도덕성이 필요하지 않다는 식으로 왜곡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건물과 다리가 무너지고 불량식품과 불량제품으로 사람이 병들거나 다쳤을 수도 있다면 견강부회인가요. 비단 물질을 다루는 직업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지요. 미국에 연수 갔을 때 가이드는 말했지요. 미국은 법을 지키면 너무나 편한 나라지만 그렇지 않으면 가차 없는 응징이 돌아오는 나라라고요. 뉴욕경찰청(NYPD)을 방문했을 때 손님에게 물 한 잔도 내놓지 않는 자세와 일체 사족이 없는 그들의 당당한-보기에 따라 다소 거만할 수도 있는-태도를 보면서 그들의 공권력은 무엇일까를 생각했습니다. 약 150개 민족이 모인 거대한 나라가 유지되려면 인정과 사족이 있어서는 결코 굴러갈 수 없다는 사실, 미국인이 도덕적으로 뛰어나거나 문화적으로 훌륭해서가 아니라 나라의 생존을 위해 그들이 선택하고 동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공권력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이 공권력의 나약함을 지적해왔습니다. 뒤로는 인정과 사족에 물들면서 구체적 액션 없는 슬로건주의자는 아니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시카고에서 담배 한 개비를 저에게 청했던 공손한 노숙자가 생각납니다. 노숙자에게도 고도의 도덕성(?)은 필요합니다. 위협적이지 않게 접근해야 하고 한꺼번에 많은 양을 청하지 말아야 하며 상대방의 상황을 잘 살펴야 합니다. 일찍이 장자는 훌륭한 도적에게는 5가지의 도가 있다고 했습니다. 물색을 잘 해서 재물이 있는 곳을 알아야 하고, 훔치러 갈 때는 앞장서야 하며, 훔친 후에는 패거리를 먼저 내보내고, 가장 나중에 나와야 하고, 훔쳐도 되는지 안 되는지 상황판단을 잘 해야 하며, 훔친 물건은 공평하게 나눈다고 했지요. 자기도 모르게 뭔가 남 탓과 사회 탓을 하고 싶을 때 공손한 노숙자와 장자가 말한 훌륭한 도적의 도를 떠올려 보는 것도 역설적으로 자기 책무를 다하는 사회인으로서의 좋은 수양방법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를 보면 도쿄대학 법학부에 다니는 학생 나가사와는 "나의 행동규범은 하나다. 신사여야 한다는 것이다. 신사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게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이다"라고 신사를 정의합니다. 이런 신사 숙녀가 우리 사회에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자라는 아이들도 본을 받아 곧게 자라겠지요.
 
올림픽과 더불어 휴가도 한창입니다. 방송에 휴가란 말이 너무 많이 나와 마치 우리가 휴가를 위해 일하고 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나이를 말할 때 외국 어느 곳에서는 가령 50세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고 '50년 죽었습니다!'라고 표현한다죠. 나머지 삶을 더 잘 살기 위해 스스로 각성하는 표현방법이겠죠. 그러고 보니 저도 참 많은 날들이 이미 죽어있네요. 여러분은 여한이 없으신가요. 아니면 나머지 날들을 휴가로 다 쓴다 해도 억울한 점이 있으신가요. 학생 나가사와의 행동규범은 신사로 사는 것이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거추장스럽겠어요. 하고 싶은 대로 사느냐, 해야 할 일을 하느냐, 누구든 고민이 되겠지요. 올림픽에서 패한 선수들이 이구동성으로 미안하다, 죄송하다 말하는 걸 보면서 그 '죄송함'의 실체에 대해 헤아려 봅니다. 죄송한 것이 아니어도 죄송한 것이고 죄송한 것이어서 더 죄송한 것이겠지요. 국가를 대표한다는 엄중한 사명과 한계에 부딪힌 개인능력에 대한 자괴감이 뒤엉켜 흐르는 그 맑은 눈물을 보면서 국가를 대표하지는 못해도 이제부터 나 개인이라도 잘 대표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모든 날들이 죽고 단 하루만 살아있는 그날까지 가을 익은 밤송이처럼 알차게 굴러다니며 다람쥐의 밥이 되거나 겨울 군밤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의 제사상에 오르는 정갈함이 되기도 한다면 그럭저럭 이 세상이라는 올림픽에 참가한 올림픽 정신은 지킨 게 아니겠습니까.

 

 

>>소진기/ 경찰대 졸업. 총경. 수필가. <수필세계>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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