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람치고 모나미 볼펜을 써 보지 않은 이가 있을까. 국내 자체 기술로 1963년 태어난 모나미 볼펜은 지금까지 약 35억 개가 팔렸다. 모나미 볼펜은 올해 4월부터 6월까지 뉴욕에서 개최된 '코리아 디자인 헤리티지전(展)'에서도 1960~80년대를 대표하는 디자인 유산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48살 된 모나미 볼펜이 지난 6월 말경 새로운 디자인으로 다시 태어나 소비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모나미 볼펜을 비롯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늘 가까이 두고 사용하는 물건들이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말해 주는 재미있는 책이 나왔다. 건국대학교 디자인학부 오창섭 교수 외 디자인 관련 일을 하는 14명의 저자들이 공동으로 쓴 '생활의 디자인'이다.
 
디자인이라고 하면 대기업의 제품이나 광고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우리가 사용하는 수많은 물건에 적용되는 말이다. 이름난 디자이너가 만든 것도 있지만,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채로 오랜 시간 우리와 함께 살아온 물건 모두가 디자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우리가 어떤 물건과 더불어 살아왔는지 말해주고 있다.
 
책을 처음 장식하는 주인공은 중국집 배달에 꼭 필요한 철가방. 처음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배달용 가방이 있었으나, 언제부턴가 철가방으로 바뀌었다. 책에서는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값싸고 흔한 물건임에도 뛰어난 디자인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데다 개발자나 디자이너가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도 않다는 점에서 철가방은 단순히 하나의 제품이라기보다 문화인류학적 소산이라고 할 만하다"고 설명한다.
 
목욕탕에서 쓰이는 이태리 타월은 우연한 기회에 만들어졌다. 부산에서 직물공장을 하며 타월을 생산하던 김필곤 씨는 이태리에서 타월 원단을 수입했다. 그런데 이 원단이 까칠까칠해서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외화만 낭비하고 버려야 하는 게 아닌가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아이디어는 아침에 대중목욕탕에서 떠올랐다. 까칠까칠한 천으로 때를 밀면 시원하겠구나 하고. 김 씨는 원단을 잘라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폭발적인 반응이 돌아왔고, 1962년 이태리 타월이 상품으로 나와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들의 청결습관까지 바꾸어 놓았다.
 
중년 이상 세대에게 추억을 안겨 주고 있으며 여전히 길거리 음식으로 인기가 식지 않는 붕어빵은 1930년대에 태어났다. 19세기 말 일본에서는 비싸고 귀한 음식 '도미'를 빵모양으로 만든 서민음식 '다이야키'가 있었다. '다이야키'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붕어모양으로 바뀌었다. 50~60년대 우리의 허기를 채워주었던 붕어빵은 사라지는가 싶더니, 복고 열풍을 타고 다시 부활했다.
 
삼겹살 하면 떠오르는 솥뚜껑 불판은 ㈜시골촌의 이환중 씨가 대량생산하여 고기구이용 불판으로 공식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씨는 솥뚜껑 불판을 1993년 상품화하여 전국적으로 80만 개를 공급했다. 전통 가마솥에 대한 한국인의 정서가 이 불판이 정착하는 데 큰 일조를 하지 않았을까.
 
똘망똘망한 아기 펭귄도 등장한다. 전 세계 유아들과 어린이들을 사로잡아 버린 대한민국 캐릭터 '뽀로로'. 2003년 11월 EBS에서 처음 방영된 뽀로로는 '뽀통령'이라는 말을 듣고 있을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요즘 아이들 생활은 온통 뽀로로에 둘러싸여 있다. 그냥 보기만 하는 게 아니다. 병원놀이도, 셈 공부도, 한글 첫걸음도, 모두 뽀로로하고만 하려 한다. 1926년에 태어나 다정하고 폭신하고 동글동글한 모습으로 수 십 년 간 이 세상 어린이들을 매혹시켜온 '곰돌이 푸'를 조만간 능가할 기세다. 한국의 디자인은 여기까지 왔다.
 
이 책에는 재미있는 디자인 이야기들이 많다. 소주병, 빨간 돼지저금통, 쌀통 등 193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우리 국민에게 익숙한 디자인들이다. 총 36개의 디자인을 설명하는 책갈피가 넘어갈 때마다 한 시절의 희노애락이 함께 넘어가는 것 같다. 이 디자인 속에 우리가 살아온 흔적이 있다.
▶오창섭 외 지음/현실문화/246p/1만2천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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