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안·북문 안·북내동이라 불리던 원도심
논밭 메워 길을 내고 건물 쌓아 ‘상전벽해’
교학사 등 각종 서점은 사라진 지 오래

역사 기억 땅 속에 묻고 변화는 이어져
미래엔 아주 다른 새 김해말 만날 수도
30년 후의 기억에 ‘굿 럭’ 행운을 빈다


정작 본인보다 주변사람이 더 안타까운 일이 있다. 기억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어머니를 뵈러 가니 많이 좋아졌다. 멀리서 나를 보더니 싱긋 웃기까지 한다. 배탈로 탈수가 심해서 입원을 했는데 건강이 회복되니 입원 초기와는 달리 기왕의 흐린 기억도 좋아진 것이다. 물론 좋아졌다고는 해도 고령이니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면서 전체적으로는 하루하루 뒷걸음으로 물러나는 중이다. 옆 병상의 할머니가 서로 호구조사를 끝낸 뒤라 다 알면서도 이제 낯이 익었다며 장난말을 걸어온다. 몇 살 어머니보다 많은데도 정정하다.
 
"보소 누가 왔능교?"
"둘째 아들"
"옆에는 누구고?"
"둘째 며느리"
"아들이 또 있소?"
"큰아들"
"어딨능교?"
"서울"
"아들이 둘이요? 또 없나? 셋 아닝교?"
알면서 하는 할머니의 장난말에 어머니는 둘이라며 정직하게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인다.
"셋째는 없어요?"
"둘"
여기까지는 좋다. 아주 좋다.
"딸은 없고?"
갑자기 어머니의 눈빛이 흔들린다. 늘 이렇게 갑자기 나빠지곤 한다.
"딸 없어요? 딸"
"조금 전에 둘째 딸"
어머니는 피하듯 급하게 집으로 오는 요양사를 들먹인다.
"둘째 딸이면 큰 딸은?"

엉뚱하다. 흔들리던 시선이 이제 문 밖에 있다. 그리고 두리번두리번 고개를 돌려 창문을 찾고 수액을 달아 놓은 손등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무언가 혼란스럽다는 뜻이기도 하다. 안쓰러워 아내가 얼른 "어머니 00에미 이름이 뭐예요?"하고 거든다. 그제야 막내인 여동생의 이름이 어머니의 입에서 나온다. 성과 이름이 모두 정확하다. 젊었을 때부터 기억력 하나는 비상했던 어머니다. 주변에서 모두 '잘했어요 박수'를 친다.
 
웃음 속에서 그러나 나는 마음이 무겁다. 동생이 다녀간 지 며칠 되지도 않았다. 다 떠나서, 사실 그건 동생의 이름이 아니다. 주민등록상 이름은 맞지만 집에서 부르던 이름은 아니다. 강원도에 나가 살 때 태어난 아이를 호적에 올려달라고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어서 보냈는데 생림면사무소 직원이 편지를 잃어버리고 마음대로 올려버린 이름이다. 나중에 따지니 오히려 여식아 이름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며 면박을 주었다는데, 면서기 끗발이 대단했던 시절 이야기다. 하긴 예전에 탄광에 15일간이나 매몰 되었다 살아 나와 유명해진 광부는 김창선인데 공무원이 성씨를 잘못 적어놓고 안 고쳐줘 양창선으로 살았다. 세월이 힘들면 어느 시대나 공무원이 최고의 직업이 된다. 그때도 그랬다. 아무튼 집에서는 따로 부르고 한 번도 쓰지 않던 이름이다. 그 공식적이고도 서류상의 이름이 그리고 때로는 놀림감이었던 동생의 이름이 어머니 입에서 갑자기 튀어 나온 것이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분성로335번길. 사진=윤지운

기억을 잃어버리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는 모르지만 가까운 사람에게는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 하루에도 수 십 번 일어나는 그런 일이다.
 
꿈을 꾸었다. 어머니 손을 잡고 장날이었는지 혹은 누구의 발인이 있었는지 흰옷 입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왕릉 앞을 지나 수선화가 핀 해반천의 징검다리를 건넜다. 검은 이끼가 낀 돌 징검다리 옆으로 물결이 노란 수선화 빛을 품고 반짝 거렸다. 해반천을 건너면 멀리까지 보이는 게 다 논이다. 아직은 연초록으로 겨우 물이든 논길을 걸어 외동의 외할머니 산소에 갔다. 희미하지만 내게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는 첫 기억이고 동시에 김해의 모습이 떠오르는 첫 기억이기도 하다. 그날을 어머닌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이런 저런 이야길 하니 "네가 언제 거기에 갔었니?" 할 뿐이다. 물론 외할머니 산소는 오래전에 이장을 했고 지금은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기억을 잃어버리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도시도 그렇다.
 
우리나라의 많은 도시들이 빠르게 기억을 잃어가는 중이다. 김해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김해는 더욱 그렇다. 부도심과 원도심 가릴 게 없다. 내외동 장유 등의 부도심은 논과 밭을 메워 길을 내고 건물을 쌓아 올려 상전벽해가 되었다. 그리고 동상시장 일대의 원도심은 역사의 기억을 땅 속에 품은 채 우리나라 전체에서 손을 꼽을 정도로 빠르게 아시아화가 진행 중이다. 변화의 모습은 다르지만 기억을 잃어가기는 김해의 곳곳이 마찬가지다.
 
회현동, 동상동, 서상동은 과거 북안, 북문 안, 북내동으로 불리던 곳이다. 북밖 혹은 그 너머 주변에서 보면 북안은 합성 다니고 특히나 동광 다니던 얼굴이 하얀 여자애들이 살던 읍내였다. 군청이 있고 경찰서가 있고 소방서가 있던 곳이었다. 관공서가 옮겨가고 극장이 문을 닫고 서점도 하나 둘 사라져 갔다. 기억하기론 문예당 교학사 능력서점 오복당 동아서점이 모두 북안에 있었다. 그중 가장 먼저 문을 닫은 문예당은 나의 고모부 집이기도 하다. 그리고 교학사에는 오랜 친구의 터울 진 누이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박 고개를 넘어 '생림집'으로 가던 동신버스 차부도 없어졌다. 차부 주변엔 이런저런 군것질 거릴 파는 가게들이 많았다. 이제 북안 사람들은 빠르게 기억을 잃어가는 중이다. 물론 도시와 사람을 같이 비교할 수는 없다. 도시는 항상 변하는 것이고, 그것은 오히려 도시가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증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래 함께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논리적인 설명만으로 다 받아들일 수 없는 다른 느낌이 있다. 마치 함께 공유해온 기억을 잃어버린 가족처럼 말이다.
 
프랑스어에 'savon'이라는 단어가 있고 그 '사봉'이 비누라는 걸 알았을 때 놀랐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 '생림집'에서는 비누를 늘 '사분'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친구들에게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몰랐다. 나중에서야 특별한 게 아니고 언어란 원래 그런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리고 그런 단어들이 우리말에 수도 없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만, 그 때까지 한동안 사분과 사봉은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야 우리 고향에서는 프랑스어를 써' 하는.
 
동상시장 일대의 아시아화가 계속 이어진다면 몇 년 안에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다. 아마 또 다른 '사분' 역시 더 많이 생겨 날 것이다. 북안에는 언어학적으로 이미 피진(pidgin·서로 의사소통되지 않는 언어를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형성된 언어)이 생겨 있고, 한 세대인 30년 쯤 후라면 일종의 크리올(creol·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들 사이의 접촉에서 생긴 공통어가 다음 세대에 모국어가 되는 것)도 생길 것이다. 그때는 '사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지금과는 아주 다른 김해말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30년 후를 예측하는 미래학은 믿지 말라고 했다. 30년이란 시간이 곧 닥쳐올 미래 같아 보이지만 사실상은 무슨 말을 했는지 잊어버리기 충분한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사자가 생존해 책임질 확률도 높지 않아 거짓말하기 딱 좋은 시간이라는 것이다. 물론 우스갯말이다. 그래도 내일 기억하는 과거는 늘 오늘이니 이렇게 물어보면 어떨까 싶다. 30년 후 기억 속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라고. 물론 애써 답을 찾을 필요는 없다. 대신 이럴 때 쓸 수 있는 영어식 인사법 하나를 알고 있다. 따라하진 않겠지만 큰 소리로 따라하면 더욱 좋은 인사법이다. 굿 럭. 행운을 빈다. 30년 후의 북안이여. 30년 후의 기억이여. 굿 럭. 행운을 빈다. <끝>

 

 

>>윤봉한/시인. 김해 윤봉한치과의원 원장.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붉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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