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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 몸 녹이고 마음 데워주는 '새벽시장 수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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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재 2010.12.17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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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상현 객원기자(landy@naver.com)

   
 
중부지방에는 대설주의보가 내리고 부산·경남은 올들어 가장 추운 날씨를 보이던 날, 김해시 부원동에 있는 '김해새벽시장'을 찾았다. 새벽시장은 20여년 전 시외버스터미널 주변에 난전이 하나둘 모여들면서 시작됐다. 이후 시외버스터미널이 인근 외동으로 이전하자 사유지인 터미널 부지를 임차해 지금의 규모로 확장됐다. 새벽 4시부터 장이 서기 시작해 오전 11시쯤이면 파장해서 '새벽시장'으로 불린다. 생산자가 직접 판매하는 곳이 많고, 약간의 자릿세와 청소비만 지불하기 때문에 물건값이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이른 새벽에는 식당 업주들이, 아침이면 인근 주민들이 주된 고객이다.
 
새벽시장을 찾는답시고 나름 껴입었으나 아랫도리까지는 미처 신경을 못썼다. 바짓단에서부터 올라오는 냉기에 온 몸이 오그라든다. 그만 발길을 돌릴까 고민을 하던 찰나. 저 멀리서 뽀얀 김이 모락모락 솟아 오른다. 쇠가 자석에 끌리듯 몸이 저절로 향한다. 한 평 남짓한 길바닥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수제비를 팔고 있다. 베니어판으로 만든 좌판엔 행인 네 명이 쪼그리고 앉아 수제비를 먹고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속담이 이 보다 어울리는 순간이 또 있을까. 좌판 한 편에 자리를 잡고 수제비 한 그릇을 시켰다. 동행한 사진기자가 연신 셔터를 눌러대니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아주머님이 기어코 한 마디 내 뱉는다. "사진은 머할라꼬 그래 찍어쌌노? 오데 내 줄끼가?".
 
   
▲ 시장 좌판 한켠에 웅크리고 앉아 끓이고 담아주는 수제비이지만 김해새벽시장 '수제비아줌마'는 구수한 입담만큼이나 음식 인심도 후하다.
수제비를 만드는 사람도 쪼그려 앉았고 수제비를 먹는 사람도 쪼그려 앉았다. 그러니 자연스레 눈 높이가 맞춰진다. 묘한 친숙함과 연대감이 생긴다. 고객과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일부러 무릎을 꿇고 주문을 받는 '퍼피독(Puppy Dog)' 서비스가 시장 좌판에선 이미 오래된 관행인 셈이다.
 
아주머니의 주방은 완벽했다. 팔이 닫는 범위 내에 두 개의 냄비와 하나의 양동이가 있다. 가장 멀리 있는 냄비에는 멸치·다시마·무 등을 넣은 육수주머니가 들어있다. 왼편 양동이에는 미리 뽑아 온 초벌 육수가 가득하다. 양동이의 육수를 냄비에 데우는데 그냥 데우는 게 아니라 한번 더 우려내는 효과가 있다. 가장 가까운 냄비에서는 수제비가 완성된다. 육수가 끓으면 빠른 손놀림으로 밀가루 반죽을 뜯어 넣고, 수제비가 뜨면 파 한 줌을 넣는다. 그렇게 순식간에 5~6인분의 수제비가 만들어진다. 시간이 생명인 새벽시장 상인과 고객들에겐 안성맞춤이다. 조리시간이 단축되니 맛이 달아날 틈이 없다. 얼핏 허술해 뵈지만 굉장히 합리적이고 합목적적인 3단계 시스템이다. 눈앞에서 음식이 만들어지니 퍼포먼스로도 그만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뤄지는 부조리보다는 이 편이 훨씬 청결하다.
 
수제비 한 그릇이 무릎 앞에 놓였다. 밀가루가 녹아 나와 탁한 국물에 제법 넉넉하니 수제비가 담겼다. 고명으로 김 가루까지 올렸다. 좌판에 놓인 청양고추는 선택사양이다. 날도 추우니 좀 화끈하게 먹자 싶어 다진 청양고추를 넉넉하게 넣었다. 이런 음식을 두고 맛을 논하는 불경스런 짓 따위는 하지말자 다짐하며 수제비를 먹었다. 헌데 웬걸! 수제비 맛이 기가 막힌다. 도무지 믿기지 않아 나도 모르게 실실거렸다. 만들자 마자 바로 건네 받으니 뽀얗게 올라오는 김이 우선 식욕을 돋군다. 적당히 진한 육수는 개운하면서도 맛이 깊다. 새벽 취재 때문에 전날 밤 술자리를 마다했던 사실이 억울할 정도다. 반죽과 숙성이 잘된 수제비는 보드라우면서도 적당한 탄력이 있다. 씹는 재미가 제법이다. 젓국 냄새가 은근히 풍기는 깍두기도 맛을 거든다. 추위에 쪼그라든 오장육부에 뜨거운 국물이 들어가고 빈 속에 곡기가 채워지니 몸 전체에 온기가 돈다. 바짓단 사이로 스미던 냉기는 잊은지 오래다. 맞바람에 게눈 감추듯 한 그릇을 뚝딱 비우니 아주머님 또 한 마디 거든다. "쫌 더 주까?".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가만 보니 손님들이 죄다 단골이다. 기자라고 신분을 밝혔더니 너도나도 사연을 꺼내 놓는다. 대전 사는 언니가 이집 수제비를 먹고 갔는데 틈만나면 수제비 생각이 난다고 전하는 아주머니, 지난밤 30년된 양주 두 병을 마셔 속이 쓰리다는 또 다른 아주머니, 배추값 파동의 여파가 아직까지 이어진다며 볼멘소리를 하는 아저씨까지…. 하지만 결론은 수제비 칭찬으로 끝을 맺는다. 좌판 옆에서 마른멸치와 건어물을 파는 상인은 "우리 이모 장사 잘데구로 잘 쫌 소개해 주이소"라며 청탁까지 넣는다. 그러고 보니 멸치가게 옆이 수제비식당이다. 집적효과를 기대할만한 훌륭한 입지다.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관심이 겸연쩍었는지 수제비를 만들던 아주머니도 한 마디 한다. "수제비만 찍지말고 멸치도 쫌 찍어라. 갱기도 안좋은데 젊은 사람이 아 둘이 키운다꼬 욕본다." 장삿밥은 나눠 먹지 않는다는데, 서로를 위하는 두 사람의 마음 씀씀이가 각별하다.
 
포장을 해 가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수제비 한 그릇이 2천 원인데 3천 원 어치 포장을 하면 두 사람이 먹어도 될 정도로 넉넉한 양을 담아 준다. 좀 있으니 배달까지도 직접 한다. 조리·접객·배달 까지의 1인3역이 물 흐르듯 거침없다. 새벽 4시부터 시작해 오전 10시 30분 쯤이면 영업을 종료한다. 그러고 나면 늦은 밤까지 반죽과 육수, 기타 부재료 준비로 하루를 꼬박 보낸다. 그렇게 10년 세월을 한결같이 살아 왔다. "이모, 성함이 우째 됩니꺼?"라고 여쭸더니 손사레를 치며 "그런거 엄따. 그냥 수제비라 캐라 수제비!". 한사코 거절하기에 바람대로 '수제비이모'라 부르기로 합의했다.
 
   
 
먹고 가는 사람, 사서 가는 사람, 배달 시키는 사람까지 수제비 집이 제법 분주하다. "이모 십년 동안 돈 쫌 벌었겠네예?" "돈은 무슨, 이래 쪼그리 앉아가꼬 하루 몇 만원 번다. 몇 만원!". 몇 만원, 누구에겐 하루 저녁 술 값도 안되는 돈이 누구에겐 새벽 이슬을 맞으며 하루 종일 일한 노동의 댓가다. '수제비이모'가 몇 만원보다는 조금 더 벌었으며 좋겠다. 아니다. 새벽시장 상인 모두가, 이 땅의 서민들 모두가 그 보다는 조금 더 버는 세상이길 바란다.
 
좌판을 일어서니 몸을 오그라들게 했던 추위가 온데간데 없다. 수제비 때문인지 아침햇살 때문인지 구분이 모호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온전히 수제비 공으로 여기고 두 사람분 수제비 값 4천원을 기분 좋게 지불하고 돌아섰다.




수제비의 유래와 역사

중국 송나라 시대 이전부터 전해져

진화론의 관점에서 따지면 국수는 사람, 수제비는 원숭이쯤될 것이다. 인류에게 곡식의 낱알에서 껍질과 알맹이를 분리해 가루를 내는 제분기술이 본격 도입된 것은 기원전 2000년 쯤이다. 이후 지금처럼 늘이거나, 자르거나, 압착해서 면을 뽑는 기술이 정착된 것은 중국 송나라(960~1279)때 부터다. 면 요리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수제비의 탄생은 그 사이 어디쯤일 것으로 추측할 따름이다.
 
한·중·일 모두 비슷한 과정을 거쳐 왔기에 3국 모두 수제비와 비슷한 음식이 있었으며 현재도 그 원형이 잘 남아있다. 따라서 누가 원조냐를 굳이 따지는 것은 부질 없는 짓이다. 일본의 한 소바(메밀국수)집의 경우 손으로 뽑은 면과 그 원형인 수제비를 함께 팔기도 한다.
 
수제비의 어원을 '수접이'로 보는 설이 있다. 손 '수(手)'에 접을 '접(摺)'자를 쓰고 접미사 '이'가 붙어 '수접이'로 되었다가 '수제비'로 바뀌었으며, 조선 중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주장이다. 수제비라는 뜻의 한자로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각종 문헌에는 '불탁(不托)'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중국의 가사협이 439년에서 525년 사이에 저술한 <제민요술>에서 밀가루로 만든 덩어리를 '병(餠)'이라하고 병으로 만든 국물요리를 '탕병(湯餠)'이라 했다. 불탁은 탕병의 한 종류였다. 하지만 한반도에서는 밀이 귀했기 때문에 밀대신 쌀로 만든 떡을 병(餠)이라 하고 가래떡으로 만든 떡국을 탕병(湯餠)이라 불렀다. 그리고 이와 구분하기 위해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것에는 탕병의 한 종류인 불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추수가 끝나 곡식이 풍부할 때는 밀가루 대신 쌀가루로 수제비를 만들어 먹기도 했는데, 이를 '운두병(雲頭餠)'이라 불렀다.
 
이처럼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밀가루는 귀한 대접을 받았고 따라서 수제비 또한 흔한 음식이 아니었다. 수제비의 신분이 급전직하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다. 식량 부족으로 미국의 구호물자에 의지하던 시절, 구호물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밀가루였다. 이때부터 대충 간만 맞춘 장국에 밀가루 반죽을 뜯어 넣은 수제비는 굶주림을 달래는 값싼 음식이 된다. 소박한 수제비 한 그릇에 수천년의 역사와 아픈 기억까지 스며있으니 결코 만만히 볼 음식이 아닌 셈이다.



   
 



박상현 객원기자
사진촬영 = 박정훈 객원사진기자 pungly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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