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테 피나코테크. 고전적 르네상스 건축양식의 건물로서 19세기에 지어졌다가 2차대전 때 폭격으로 무너진 후 초기 모습 그대로 복원됐다.
아침 일찍. 잘츠부르크 시내 호텔을 떠나며 직원에게 길을 물었다. 뮌헨 가는데, 독일에서 고속도로로 올릴 계획이라니 웃으며 "비넷이 없군요" 한다. 그리곤 익숙한 솜씨로 지방도로를 이용해 독일 국경을 넘는 길을 지도에 표시해준다. 비넷은 고속도로 통행 스티커다. 원하는 기간의 스티커를 미리 사서 차 앞 유리창에 붙이고 다니게 되어 있다. 잠깐의 통행을 위해 최소단위인 1주일짜릴 살 이유가 없었다. 돌아가도 잘츠부르크에서 뮌헨까지 채 2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물론 오스트리아와는 달리 독일의 고속도로는 모두 무료다.
 
1945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있던 유대계 이탈리아인 프리모 레비는 소련군에 의해 해방을 맞는다. 우여곡절 끝에 귀향 열차를 타고 돌아돌아 고향 토리노까지 가는 데 35일간의 여정을 보낸다. 그가 쓴 '휴전'은 그 길고 지루한 여정을 꼼꼼하게 눈물과 때론 인간의 존엄에 대한 경의의 표식인 유머로 기록한 책이다. 650명 중 단 3명만 살아 남아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기차는 오스트리아에서 바로 남쪽 이탈리아로 내려가지 않고 또다시 서북으로 방향을 틀어 가해자의 땅 독일. 뮌헨 역에 도착한다.
 
▲ 뒤러의 대표작 중 하나인 '4명의 사도'. 1526년 작.
"지배민족의 한가운데에 나는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적었고, 많은 이들이 우리처럼 누더기를 입고 있었다. 그들 각자가 우리에게 당연히 질문을 할 것이라고,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얼굴에서 읽을 것이라고, 겸손하게 우리의 이야기를 경청할 것이라고 나는 기대했다. 그러나 아무도 우리의 눈을 쳐다보지 않았고 아무도 대면해서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다."
 
"역 주변 잔해로 가득한 뮌헨 거리를 배회하며 지불불능의 채무자 무리들 사이를 헤매고 다녔다."
 
프리모 레비의 그때 그 시절과는 달리 뮌헨 거리는 유럽 그 어느 도시보다 밝고 활기차다. 오늘의 뮌헨은 맥주를 좋아하는 이에겐 옥토버페스트가 있는 거대한 맥주의 도시이고 자동차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베엠베 박물관과 벤츠 센터가 있는 천국이다. 그리고 1972년 올림픽을 피로 물들인 검은 9월단의 도시이고 일찌감치 조숙해진 누님들에겐 고독의 천재 전혜린의 담배연기 가득한 슈바빙의 도시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주 잊어버리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뮌헨은 칸딘스키가 청기사 그룹을 결성한 서양미술사의 성지이고, 독일 최고의 미술관이 즐비한 미술의 도시이기도 하다.
 
뮌헨 시내로 들어가 알테 피나코테크를 찾았다. 근처의 거리는 한가하다. 3시간 주차비만큼의 동전을 주차기계에 넣었다. 알테 피나코테크는 독일 최고의 고전미술품 소장 미술관이다. 넓은 잔디 정원을 사이에 두고 근대 이후의 미술품을 전시 중인 노이에 피나코테크와 마주보고 있다. 알테는 올드와 동의어. 건물도 노이에 피나코테크가 현대식인데 비해 알테 피나코테크는 고전적인 르네상스 건축양식이다. 물론 19세기에 세워진 알테 피나코테크 건물은 2차대전의 폭격에 무너져 현재 건축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된 것이다.
 
어느 미술관이나 자신들이 자랑하고픈 소장품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자랑의 본능을 슬쩍 드러내는 곳이 안내책자의 표지나 입장권 티켓이다. 알테 피나코테크의 안내 책자 표지는 알브레히트 뒤러가 그린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이다.
 
▲ 뒤러의 '4명의 사도'가 전시된 알테 피나코테크 미술관 내부 모습.
15, 16세기. 알브레히트 뒤러가 활동하던 시기엔 화가들이 자화상을 그릴 일이 없었다. 주문을 받고 그림을 그려주는 직인이 살 사람도 없는 자신의 얼굴을 쓸데없이 그릴 이유가 없었다. 특히 르네상스에 의해 예술가로서의 자기 자각이 이루어진 이탈리아 미술가들에 비해 알프스 이북의 북유럽 화가들은 스스로 여전히 양복장이 재단사나 제화공과 같은 직인으로 자신의 신분을 인식하고 있었다. 반면에 알브레히트 뒤러는 달랐다. 미술가이기 이전에 배우는 걸 좋아하고 마르틴 루터를 추종했던 매우 진보적인 인문주의자였던 그는 미술가를 인문주의와 과학의 성취를 동시에 아우르는 고도의 지식인으로 인식했다. 아무튼. 그러한 뒤러를 보여주는 그림이 바로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이다.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을 보고 있다. 딱 완전 예수상이다. 이런 예수 그림은 비잔틴에서 유래되었다. 손수건에 예수의 얼굴이 찍힌 것처럼, 정면을 바라보는 얼굴을 정확한 좌우대칭으로 그려놓고 신성을 이유로 손으로 그리지 않았다는 뜻의 이름을 붙인다. 아무튼 뒤러는 자신의 모습 왼쪽에는 오늘날의 상표처럼 보이는 A와 D가 들어간 자신의 모노그램을 새기고 오른쪽에는 라틴어로 이렇게 부기해 놓았다. '뉘른베르크 출신의 나, 알브레히트 뒤러가 불변의 색채로 28세의 나를 그렸다' 아무튼,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요즘말로 자뻑이 작렬하는 강렬한 자화상이다.
 
뒤러가 서양미술사에 남긴 또 다른 업적은 판화다. 그는 유채보다는 판화 작업에 보다 더 흥미를 가지고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주문 제작을 해야 하는 유채와 달리 화가 자신의 자유로운 생각들을 표현할 수 있는 판화는 흥미로운 장르였다. 사실 판화가 가진 매력은 현대에 와서 더 빛을 발하고 있다. 복제가 가능해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거래가 가능하다는 점 말고도 판화만이 가진 특별한 속성들이 현대인의 생활과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가 남긴 목판화와 동판화는 당대 최고의 수준이었으며 100여년이 지난 후 렘브란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겨우 그에 버금가는 동판화가 나왔다는 평을 얻는다. 아무튼. 유럽미술사에 판화가 뒤러가 남긴 흔적은 뚜렷하다. 유럽의 크고 작은 미술관을 돌아다니다 보면 그의 판화 작품을 거듭 만난다. 북유럽 최초의 판화가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 뉘른베르크에 있는 발브레히트 뒤러의 집.
알테 피타코테크가 자랑하는 또 다른 뒤러의 작품은 '4명의 사도'이다. 두 장의 패널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왼쪽에는 요한과 베드로, 그리고 오른쪽에는 마르코와 바오로가 그려져 있다. 로마 바티칸의 수장인 열쇠를 든 베드로가 전면이 아닌 뒤쪽에 배치 되어 있고 루터가 번역한 성서가 등장하는 등 '4명의 사도'는 당시 유럽을 휩쓴 루터파의 신교 운동에 근거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자연의 탐구와 지적 호기심이 남달랐던 뒤러가 바닷가로 떠밀려온 고래를 스케치하러 갔다가 모기가 많은 습지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하기 2년 전에 그린 그림이다.
 
나쁜 정치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
 
뒤러의 고향 뉘른베르크는 히틀러가 좋아했던 도시로 유명세를 치렀다. 뒤러의 강렬한 이미지 때문인지 나치는 뒤러에게 엉뚱한 옷을 입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뽑아내려 했다. 상징조작. 씁쓸하지만 뒤러가 독일 사람들에게 그 만큼 사랑받아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미술관을 나와 뮌헨에 왔으니 맥주 한 잔 하러 간다. 뮌헨 거리에서 자신의 끔찍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들어줄 독일 사람을 기대했던 프리모 레비는 빈 마음으로 고향 토리노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직장생활을 하는 한편 '이것이 인간인가' '휴전' '주기율표'등을 잇달아 발표하며 이탈리아의 유명 작가가 된다. 그러던 중 1987년 문득 자신의 집 창문을 통해 몸을 던져 자살해 버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도 이유를 몰랐다. 물론. 누구나 짐작은 했다.


*알테 피나코테크 (Alte Pinakothek)

14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독일과 유럽 회화를 중심으로 세계 각국의 미술작품 약 7000여점을 수집 전시하고 있다. 특히 30여점에 이르는 루벤스의 컬렉션은 유명하다. 루트비히 1세에 의해 1826-1836년에 걸쳐 건축된 르네상스양식의 건물은 각각의 전시실이 나라별, 시대별, 유파별로 분류되어있다.
·주소 Barer strasse 27
·전화 89 2380 5215
·개관시간 10.00 -18.00(화요일은 20:00까지) 월요일 휴관
·입장료 7유로 일요일 1유로
·http://www.pinakothek.de/alte-pinakothek/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rer 1471-1528)
독일의 화가, 판화가. 독일 르네상스 미술의 완성자로 평가 받는다. 헝가리에서 이주해온 금세공사의 아들로 뉘른베르크에서 출생. 스무 살 무렵 콜마르, 바젤, 이탈리아 등을 여행한 후 귀국하여 공방을 차리고 본격적인 판화작업을 시작했다. A.D.라는 글자를 겹쳐 쓰는 독특한 모노그램을 사인으로 사용했으며 그후 1505년 또 한번의 이탈리아 여행으로 인체비례표현과 원근법 등 새로운 미술 기법을 북유럽에 전파하였다. 판화 작품으로는 '기사·죽음 ·악마' '서재의 성히에로니무스' '멜랑콜리아 1' 등이 대표적이며 '자화상' '4명의 사도'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윤봉한 김해 윤봉한치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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