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산성(盆山城·국가사적 제 66호)은 김해의 진산(鎭山)인 분산의 정상부를 마치 둥근 테를 두른 것처럼 빙 둘러서 축조한 '테뫼식' 산성이다. 분산이라는 이름은 산 정상 인근에 분지가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이곳에는 지금 가야역사테마파크 공사가 진행 중으로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김수로' 세트장도 여기에 있다. 김해 지역민들에게는 '만장대(萬丈臺)'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한 분산은 해발이 약 330m로 높이가 100장(丈)에 달한다. 만장대가 아니라 백장대인 셈이다.
분산성은 고려 말 박위 부사가 대마도 정벌을 위해 옛 산성을 수축하였다고 하는데, 이로 보아 그 이전부터 산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인근에 위치한 가야테마파크 주차장으로 예정된 부지를 발굴한 결과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청동기시대 마을유적이 확인되었는데, 이 일대가 오래전부터 방어에 적합한 지형이었음을 알려준다.
성벽의 둘레는 약 940m로 짧은 편이며, 높이는 외부 기준으로 약 5~11m, 폭은 약 8.5~14m 정도이다. 성의 규모에 비해 성벽의 폭이 이렇게 넓은 것은 시대를 달리하는 최소 2개의 성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인데 성 내부에는 이와 관련한 기록이 새겨진 비석 4개가 남아 있다.
흥선대원군 만세불망비와 박위 축성사적비, 부사 통정대부 정현석 영세불망비 등의 비석이 그것인데 현재는 충의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비석의 내용은 고려말 박위 부사가 축성한 공적과 조선말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김해부사 정현석이 다시 개축한 공덕을 영원히 잊지 말자는 뜻을 담고 있다.
산성에는 4곳의 문이 있는데, 서문과 남문은 외부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암문(暗門)형식이며, 동문과 북문은 아직 발굴이 안 돼 정확한 구조를 알 수 없다. 성내부에는 우물 4곳과 연못 2곳이 있어 사람이 거주하기에 적합하며, 사찰 1곳(은해사·지금의 해은사)이 있어 승병(僧兵)을 두었다고 한다. 또 내부에는 봉수대를 비롯하여 진아(지휘소), 군기고, 탄교(숯 보관창고), 염교(소금 보관창고), 대약고(화약 보관창고) 등의 건물이 있었지만 현재는 1997년 복원된 봉수대만 남아 있다.
그런데, 이 봉수대는 옛 지도와는 달리 연기가 나오는 봉대가 5조가 아닌 1조로 잘못 복원되었고 또 원래 위치도 이곳이 아니다. 분산 봉수대는 녹산의 성화야봉수를 받아 고 노무현대통령 생가가 있는 진영 봉화산의 자암산봉수로 전했다고 하는데, 현재의 봉수대 위치는 진영 봉화산에서 관측이 불가능하다. 원래의 위치와 구조를 확인하기 위해서 조속한 발굴조사가 필요할 것이다.
김해읍성은 세종 16년(1434)에 약 1천950m의 둘레를 가진 석성(石城)으로 축조된 이래 수백 년 간 김해를 지켜온 소중한 방어시설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다. 1910년 일제의 읍성 철폐령에 의해 철거되기 시작한 이후 지금은 복원된 북문 일대의 성벽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지상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가옥과 도로가 들어선 지하에는 읍성 성벽의 기초가 그대로 남아 있는데, 1820년 제작된 고지도(김해부내지도)와 현재의 지적도를 비교해 보면 읍성의 위치와 형태를 대략이나마 알 수 있다.
고지도를 보면 김해읍성은 동서남북의 4대문을 가진 구조로 각각의 문에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甕城)이 있으며, 성벽을 따라 빙 둘러 판 해자(垓字)에 물길이 흐른다. 그리고 그 바깥에는 토성(土城)이 한 겹 더 둘러 있어 김해 읍성은 총 3겹의 방어막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 내부에는 여러 관아와 객사(客舍) 등이 그려져 있는데, 객사는 지방을 여행하는 관리나 사신의 숙소답게 연못과 누각 등이 만들어져 경관이 뛰어나다.
그러나 영남의 3대 누각으로 꼽히던 객사 내 연자루는 해체되어 서울의 요정에 팔려갔다고 하며, 나머지 유적들도 모두 뜯기고 매몰되어 흔적을 찾기 힘든 형편이다. 해자는 복개되어 도로로 개설되었고 성벽의 초석은 가옥 기초로 사용되고 있다. 그나마 도시화가 덜 되고 성벽의 보존 상태가 양호했던 북문이 복원되었고 사충단이 이전 복원된 것이 전부일 정도니 읍성의 전체 복원은 요원한 실정이다.
닭과 달걀은 어느 쪽이 먼저일까? 읍성의 복원에는 막대한 예산이 들기 때문에 문화재 지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문화재로 지정되려면 사유재산 보호를 위해, 또 학술적인 자료 확보를 위해 토지매입과 발굴 등이 선행되어야 한다. 가족과 고을을 지키기 위해 현대화된 도구나 기술도 없이 돌을 캐고 깨고 옮겨 다듬어 하나하나 정성들여 쌓은 성벽은 대포와 미사일이 날아다니는 현대에는 전혀 필요 없는 존재일 따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