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해 삼방동의 몽실이손칼국수. 푸짐하고 쫄깃한 면발에 청양고추를 듬뿍 넣은 정통의 경상도식 칼국수다.
공기는 물기를 잔뜩 머금고, 한낮인데도 어둑어둑한 것이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흐린 날. 그러니까 낮술 아니면 칼국수나 수제비가 생각나는 그런 날. 김해시 삼방동 인제대 근처에 있는 '몽실이손칼국수'를 찾았다. 일단 사진촬영과 취재는 뒤로 물리고 칼국수 한 그릇을 시켰다. 아니 정확하게는 산채비빔밥 하나와 칼국수 하나를 시켰다.
 
두리번 두리번 가게 분위기를 둘러 보는 동안 옆 테이블에 다른 손님이 자리를 잡는다. 주인 아주머님이 오시더니 주문을 받는다. "아들아~ 뭐 주꼬?". 아들아… 그 한마디에 갑자기 뭉클해진다. 얼마만에 들어보는 소린가! 언어는 때로 의식을 규정한다. 식당 주인이 어머니에서 이모님으로 이모님에서 아줌마로 변하는 것은, 관계의 타자화를 의미한다. 어머니일 때는 먹을 것을 나누는 사이가 되지만, 아줌마로 변하는 순간 양자는 공급자와 소비자로 뚜렷이 구분된다.
 
▲ 산채비빔밥.
옆 테이블의 두 청년은 산채비빕밥을 시켰다. "일반이가?" 이 뜬금 없는 질문을 던지는 주인 아주머님의 눈빛이 순간 번득였다. 좀 전까지는 그렇게 인자할 수 없던 표정이 그 순간 만큼은 먹잇감을 노려보는 매의 눈빛이었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딱! 보면 아시는 갑지예?" "하모, 99프로는 맞춘다 아이가." 10년 동안 쌓인 내공이 어련하실까 싶다. 몽실이손칼국수에서는 인제대 재학생에 한해 4천500원인 산채비빕밥은 천원을, 4천원인 손칼국수·수제비·비빔국수 등은 500원을 할인해 준다. 밥값 좀 아껴 볼 요량으로 학생 흉내를 내고 싶으시겠지만 언감생심이다. 아주머님의 매서운 눈썰미를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객은 그저 객의 처지를 기껍게 받아들이실 것을 권한다.
 
▲ 청양고추 썬 것, 여름무 김치, 땡초김밥.
잠시 후 음식이 나왔다. 경상도식 칼국수집이나 국수집에서는 으레 다진 청양고추를 따로 내기 마련이다. 이 청양고추의 상태를 보면 그 집의 매출이나, 음식을 대하는 주인장의 마음가짐이 대충 가늠이 된다. 고추의 푸른색이 선명하고 촉촉하니 장사가 제법 되는 집이고, 잘고 고르게 다져진데다 이물질이 섞여 있지 않으니 주방 살림이 여간 깔끔한 게 아닌 듯 싶다. 이어서 붉은물이 곱게 들어 입맛을 당기는 무김치 맛을 본다. 여름 무는 살이 무르고 물이 많아 맛이 없다고들 하는데, 의외로 아삭하고 새콤하면서도 감칠맛이 돈다. 찬바람이 불면 그 맛이 더욱 깊어질 것이다. 이정도만 해도 칼국수 반찬으로는 더할나위 없어 보인다.
 
산채비빔밥 하나에 칼국수 하나를 시켰건만, 밥상 위에는 칼국수 두 그릇과 양푼이에 담긴 비빕밥 한 그릇이 놓였다. 몽실이칼국수에서는 산채비빔밥을 시키면 다른 국물 대신 칼국수 한 그릇을 준다. 일타 쌍피다. 헌데 그 양이 만만찮다. 비빔밥에 딸려 나온 칼국수는 다른 집의 '보통' 수준이고, 별도로 주문한 칼국수는 '곱배기' 수준이다. 무슨 양이 이리도 많으냐 여쭸더니, "학생들은 더 마이 주는데"라고 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밥 더달라며 아우성이란다. 하여간 젊음이 부러울 따름이다.
 
칼국수는 면의 양이 만만찮음에도 불구하도 국물을 넉넉히 잡았다. 국물이 맑은 것을 보니 면을 따로 삶아 육수에 토렴한 건진칼국수 스타일이다. 파·쑥갓·부추도 한 웅큼씩 올렸다. 멸치 대신 디포리로 낸 육수는 약간 심심한듯 하면서 개운하다. 비린내나 잡맛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투박할줄 알았는데 의외로 완성도가 높다. 이어서 면 몇 가닥을 입으로 가져간다. 면은 입술로 질감으로 느끼고 이빨로 탄력을 느끼는 것이 순서다. 표면은 매끈하고 보드랍다. 이빨에 적당한 저항감이 느껴지는 것이 탄력 또한 나무랄 데 없다. 반죽과 숙성이 잘된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이다. 평가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어설픈 미식가 흉내는 집어치우고 맹렬히 먹기만 하면 된다. 청양고추를 넉넉히 얹고 후루룩 후루룩 소리를 내며 정신 없이 먹었다.
 
남편은 면을 뽑고 아내는 육수를 뽑는다. 남편의 일과 아내의 일이 '스뎅사발'에서 만났다. 그러니 이 칼국수는 부부합작인 셈이다. 30년을 넘게 살아 온 부부가 10년을 넘게 호흡을 맞췄으니 그 맛이 각별할 수밖에 없다. 이 칼국수에 '부창부수(夫唱婦隨)'라는 별칭을 붙여 주는 것이 어떨까 싶다.
 
▲ 몽실이손칼국수 바깥 주인 이귀동 씨가 밀가루 반죽을 썰고 있다. 아내가 뽑아내는 육수와 함께 어울리면 그야말로 부창부수의 칼국수가 탄생한다.
산채비빔밥에 산채는 없다. 상추·콩나물·당근·김·계란프라이가 전부다. 그러니 양푼이비빔밥이다. 하지만 어떠랴. 고등어구이를 고갈비라고 하는 형편이니 푸성귀 좀 든 것으로 산채비빔밥이라고 한들 뭐 그리 흠이 되겠는가. 평범하지만 푸근한 맛이다. 집에서 남은 밥과 반찬을 끌어모아 고추장·참기름 올려 슥슥 비벼 먹는 바로 그 맛이다. 몇 번을 먹어도 물리지 않을 것 같은 음식이다.
 
칼국수와 비빔밥 만으로도 벅찬데 맛이나 보라며 '땡초김밥' 한 줄을 내온다. 어묵볶음, 청양고추, 오이가 들었을 뿐인데 이 또한 별미다. 대학가에 있는 인정 많은 식당을 찾아 나선 길이었으나 의외의 성과를 올렸다. "아들아~ 뭐 주꼬?"라는 말에서 대충 짐작을 했지만, 음식의 맛은 그런 감성을 뛰어 넘는 수준이다. 특히 칼국수는 경상도식 칼국수의 전형이라 할만큼 잘 만들어졌다.
 
▲ 사진 찍기를 거부하던 부부가 손자들과 함께 찍자고 하니 금방 포즈를 취했다.
식사가 끝난 후 아내 이정숙(54)씨와 마주 앉았다. 서슬서글한 인상에 웃음기가 떠날 줄 모르는 표정은 영락 없는 여장부 스타일이다. 호구지책으로 시작한 식당이 어느새 십년 세월이 흘렀다. 또래의 아들이 있어 전부 내 새끼려니 싶어, 재료나 양에 특히 신경을 썼다. 쌀은 경남 산청에서 받아 쓰고 각종 채소는 직접 도매시장을 찾아 깐깐하게 골랐다. 육수를 우릴 때 사용하는 디포리 주머니까지 광목을 떠다 손바느질로 만들어 쓴다. 일주일에 두번 무김치 담그는 날은 새벽 5시에 일어나 장을 보고 재료를 준비해야 하니, 그게 제일 힘들다고 한다.
 
학생들 상대로 퍼주는 장사를 하다보니 남는 게 별로 없어 보인다. 하지만 밥 같은 밥을 잊지 못해 취직했다고 찾고, 결혼한다고 찾고, 심지어는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까지 인사를 오는 '자식'들을 보면서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게다가 20대 초반이었던 외아들은 어느덧 결혼을 해 2남1녀를 둔 가장이 되었다. 제 자식 번듯하게 키우고, 밥이 인연이 되어 수많은 자식이 새로 생기고, 손자·손녀까지 얻었으니 이만하면 충분히 남는 장사가 아닐까 싶다.
 
몽실이손칼국수의 지난 세월을 더듬어 가는 동안에도 남편 이귀동(60)씨는 묵묵히 반죽을 썰고 있다. 한 마디 거들법도 한데 눈길조차 건네지 않으신다. 매일 새벽 5시면 가게에 나와 홀로 반죽을 치대고 8시면 아침식사를 하는 생활을 10년째 반복하고 있으시단다. 살짝 굽은 등과 튀어나온 어깻죽지를 보니 그 세월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 말씀 여쭈려는데 슬며시 차를 몰고 나가신다. 사진도 못찍었는데 싶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잠시 후 손자 둘을 데리고 돌아오셨다.
 
막내 손녀를 키우느라 바쁜 며느리를 위해 유치원 다니는 손자들을 데려오는 것은 할아버지의 몫이었다. 손자들을 보며 연신 웃음이 떠나지 않는 아내 이정숙씨에게 물었다. "손자들도 칼국수 좋아 합니까?" "하이고 야~들이 칼국수 을매나 좋아하는데." 이것으로 끝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자들에게 먹이는 음식이니, 그 음식에 이러쿵 저러쿵 사족을 단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할머니가 우려낸 육수에 할아버지가 뽑은 면을 만 칼국수를 먹으며 자라는 손자들이 몇이나 될까? 갑자기 이댁 손자들이 부러워졌다.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면 은퇴를 고려할 나이인 두분께 언제까지 장사를 하실 생각인지 여쭈었다. "(손자들을 가리키며) 야~들 클 때 까지는 벌어야 안되것나. 즈그 아부지 혼자서 서이를 우째 키우노." 그 말씀에 마음이 놓였다. 세상 그 어떤 동기가 핏줄에 대한 책임감보다 클까 싶다. 앞으로 최소 10년은 끄떡 없을 것이다. 몽실이손칼국수에 수많은 추억을 가진 인제대 출신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기사를 쓰는 보람을 느낀다.
 
부부가 같이 사진 한장 찍으시자고 권했더니 한사코 거절하신다. 그럼 손자들하고 같이 찍자고 했더니 "어데가 좋겠노?"라며 당장 자리를 잡는다. 덕분에 아주 흐뭇한 사진 한장을 얻었다. 취재를 끝내고 돌아서는데 부인 이정숙씨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며칠 있다가 콩국수 묵으러 온나. 우리집 콩국수도 억수로 맛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메뉴:산채비빔밥(4천5백원), 손칼국수·손짜장·수제비(4천원), 땡초김밥(2천원), 국산콩국수(5천5백원)
▶위치:인제대학교 맞은면 오래뜰먹자골목 안
▶연락처:055-337-8849





박상현 객원기자
사진촬영 = 박정훈 객원사진기자 pungly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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