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진 시인·동아대 명예교수.

바야흐로 수확의 계절입니다. 올 한 해도 갖은 고초를 달게 녹여온 농부들의 땀방울에 자연의 정성이 화답을 하는 계절입니다. 그런데 요즘 농촌에서 정작 세인의 주목을 받는 이들은 농부가 아니라 세칭 '자연인'들이 아닌가 합니다.
 
산업사회에 시민들 저마다의 마음에 열망으로 자리하고 있는 자연인. 그를 향한 열망에 편승하기라도 하는 듯 땡볕에 그을은 촌부의 얼굴, 논바닥처럼 갈라진 촌부들의 손등은 감추어지고 TV마다 새로운 자연인들을 발굴해 세인들이 우러러 보게 하는 것입니다.
 
대체 자연인이란 누구일까요? 그 원조라 하면 우리 문화 곳곳에서 전해져오는 도사, 신선, 산신령 등에 준하는 현실적 존재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기에 언필칭 자연인들 중에는 수염을 길게 기르거나 머리를 묶어서 '도사 코스프레'를 하는 이가 많은 것 아니겠습니까?
 
30여 년 동안 강마을, 산마을에 살아오면서 적잖은 '속물 자연인'들을 만났습니다. 나물 채취용 앞치마에 커다란 배낭까지 메고 바위 틈 절벽 틈을 샅샅이 뒤지면서도 남들에겐 풀이름 하나 가르쳐주지 않는 이가 있습니다. 떡하니 산중에 무허가 집을 지어 놓고는 "나 다 비웠네.","나 도사일세" 행세하며 시비를 걸거나 떠드는 이, 남의 땅을 불법 점유하고 작물 훔치기를 예사로 여기는 이도 있습니다. 다수의 세칭 자연인들이 자연을 치유의 장으로 이용하거나 생존을 위한 도구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니 자연인을 소개하는 방송들에 대해 나름의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천민자본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해 자연을 아무리 훔쳐내도 벌을 받지 않고, 자연을 바보의 곳간 정도로 취급하는 게 아닌지 안타깝습니다. 요새는 화면 한 쪽에 '주인의 허락을 받고 채취합니다'라는 자막을 깔기도 하지만, 그런다고 자연을 훼손하고 탐욕을 부채질하는 과오를 털어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자연인이란 요리조리 법망을 피하고 사리사욕을 취하는 이가 아니라, 자연의 순리를 따르고 지킴으로써 안분자족(安分自足)의 삶을 얻는 이, 권세와 명리를 떠나 스스로 나누며 사는 지혜를 지닌 도사여야 합니다. 자연인이란 국민적 이상형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온갖 약초를 잘 구별하고 채취해서 수십~수백 개의 단지에 담아 손님을 기다리는 이들이 자연인은 아닐 것입니다. 도심에 살건 물가에 살건 자연의 질서를 좇는, 묵묵히 이웃과 더불어 이어가는 일을 행복으로 여기는 이들입니다. 그 경지는 자연을 심신 치유의 장으로 이용하는 데 있지 않고 더욱이 자연을 빙자하여 돈벌이를 하거나 고립된 생활을 하는 이용 가치에 있지 않습니다.
 
자연인의 표상으로 지목하는 이는 단연 미국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입니다. 그가 세계인에게 자연인의 상징이 되고 있는 것은 자연 속에 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야초와 약초 이름을 꿰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차별주의적 권력의 탐욕과 모순에 저항하면서 자연의 양심을 실천하기 위해 몸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월든의 숲 속 작은 오두막에서 2년 여 살았던 것도 노예제도와 멕시코 전쟁에 대한 항의의 표현이었습니다. 인두세 납부 거부로 투옥당하기도 했고, 노예 해방 운동에도 헌신했습니다. 소로우의 정신은 마하트마 간디의 비무장 독립 운동과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인권 운동의 원천이 되었다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조 시인 김삿갓도 개인적 욕구불만을 유랑으로 자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도가의 위선과 사회적 모순에 항거하면서 자연이 현실이 되기를 갈구한 원조격 자연인이었다 할 것입니다.
 
연명을 넘어서 재물의 저장을 목적으로 자연을 훼손하는 이를 자연인이라 일컫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착시현상입니다. 한번 더 자연을 왜곡하거나 파괴하는 행위에 준한다 하겠습니다.
 
엄혹한 시대에 우리가 그리워하는 자연인이란 정의와 공평의 정신이며, 포용과 선린의 자연정신입니다. 귀촌합네 하며 시골로 들어가 고대광실을 지어놓고 자연인을 자처하기도 하는 이들은 촌부들의 텃세(?)를 곧잘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건 텃세가 아니라 비자연인의 오만과 무지에 대한 농부 자연인의 따끔한 경고일 수도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촌부들의 마음은 이미 자연인에 더 가까이 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수확의 계절을 맞아 우리 각자의 마음에 자연인을 향한 그리움이 한층 간절하고 풍성하게 영글기를 바랍니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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