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곡요 조규진 씨가 가야토기 문양을 접목시킨 찻잔을 들어 보이고 있다. 강보금 기자

1986년 청곡요 설립해 다기 제작
국장 시절 축제 기획·발전 기여
국내·외 곳곳에서 다양한 도예전


조규진(61) 씨가 건넨 명함에는 작업실인 '청곡요(靑谷窯)'와 함께 '운암도예연구소(雲岩陶藝硏究所)'가 한자로 적혀 있었다. '운암'은 그의 호다. 진례면 송정리에 작업실을 갖고 있는 그는 도자기를 만드는 데 머물지 않고 그 진가를 알리기 위한 작업을 활발히 해 온 김해의 '도자기 전도사'다.
 
그래서 일본, 중국 등을 자주 오가기 때문에 명함에는 한글 대신 한자만 적혀 있다. 그는 "일본의 경우 아담하고 정갈한 음식 차림새를 위한 도자기 활용이 활발하다. 차를 마시는 다도가 발달해 다양한 다기들이 생산되고 있다. 이런 일본 도자기의 원류는 과거 김해 등 경상도 지역에서 건너간 우리나라 도공들"이라고 강조했다.
 
조 씨는 진례에 도자기 장인들이 다시 모이게 된 게 우연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나라에 도자기를 대던 관요는 자취를 감췄지만, 김해 도공들은 생활에 필수적인 옹기를 만들며 그 명맥을 이어왔다. 1980년대 초까지 진례면주민센터 인근에는 독, 항아리 등 옹기를 굽는 가마가 다섯 곳 있었다. 거기서 20여 명이 독 굽는 일로 생계를 이었다. 이들 중에 이희갑, 배종태 선생 등이 '요'를 만들어 도자기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배종태 선생은 분청에 집중했고, 이희갑 선생은 백자에 몰두했다. 조 씨는 이희갑 선생에게서 배웠다.
 
조 씨의 고향은 경남 합천이다. 어릴 적 요업공장이 많았던 덕분에 자연스레 도자기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는 우윳빛으로 완성돼 나온 도자기를 보고 참 멋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창원국가산단에 막 생긴 도자기연구소에 들어가 도자기 만드는 법을 배웠다. 이후 부산 등지의 도기 회사에서 일하다 군에서 제대한 뒤 김해로 왔다. 그는 자신의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이희갑 선생 밑에 견습생으로 들어가 기술을 전수받았다.
 
조 씨는 1986년 '청곡요'를 설립한 뒤 다기를 제작해 왔다. 관상용 도자기보다 사람들이 평소 차를 마시며 이용할 수 있는 다기가 도자기의 실용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부인과 함께 단출하게 작업하고 있지만, 한창 때에는 한 달에 500세트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의 다기는 김해특산품인 장군차와 함께 김해시에서 답례품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소형 다기세트는 첫 출산한 신혼부부를 위해 김해시보건소에서 축하선물로 주기도 했다.
 
조 씨는 그렇다고 작품 활동에서 손을 놓은 건 아니었다. 서울 인사동 등 전국 각지에서 도예전을 열었고, 2010년에는 일본 무나가타 시 초청을 받아 도예 시연을 하기도 했다. 그는 진례가 분청도자기의 본산으로 알려지는 데 마중물 역할을 했다. 지금은 고성으로 간 이위준 씨가 김해도예협회 회장이던 1996년 도자기특산단지 사무국장을 맡아 '김해도자기축제'를 기획했다. 이후 김해도예협회 사무국장을 맡아 도자기축제에 '분청'이란 단어가 들어가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조 씨는 "진례에 도예가들이 많이 늘었다. 도자기축제가 이들의 도자기 판로 역할을 하는 건 긍정적이다. 하지만 여기에 만 집중하는 바람에 과거처럼 공들인 작품이 적어지는 건 아쉽다. 작가는 마음 속에 자기만의 길을 세우고 뚜벅뚜벅 걷는 자세로 활동해야 한다. 행사에 사람들이 많이 온다고 흐트러지기보다 질적으로 도전하는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해뉴스 /심재훈 기자 cyclo@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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