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원봉사자 최수연 씨가 경남생명의전화 사무실에서 상담 전화를 받고 있다.

1년 365일 하루 24시간 전화 상담 활동
자원봉사자 40~50명 교대로 자리 지켜

부부 갈등, 타인 기피증 등 사연도 다양
목소리 귀 기울이며 공감·위로하려 노력
자살 의사 밝히면 직접 찾아가 대화도

수로왕릉 앞에선 어르신과의 대화 마련
할머니, 할아버지 힘든 인생 서로 이야기


"말 못 할 고민이 있습니까? 저희가 들어 드리겠습니다."
 
김해오일장이 열린 지난 7일 오전 9시 수로왕릉 광장에 초록색 천막을 든 사람들이 등장했다. 30여 분간의 씨름 끝에 천막이 그 모습을 갖췄다. 천막은 한 사람씩 앉을 수 있도록 4개의 칸으로 나뉘었다. 이윽고 노란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각각의 자리를 채웠다.
 
이들은 '경남생명의전화'의 식구들이었다. 한국생명의전화에 따르면 2015년 전국의 자살자 수는 1만 3513명, 경남 지역 자살자 수는 877명, 김해 지역은 132명에 달한다. 10만 명당 25~26명꼴로 자살을 하는 것이다.

생명의전화는 위기, 고독, 갈등, 자살 등 삶의 어려움에 빠진 이들에게 상담을 통해 도움을 주고 있다. 자살예방을 위해 365일 24시간 전화 상담을 하는 것이 주 업무지만 3년 전부터는 수로왕릉 앞에 직접 나와 어르신들을 만나고 있다. 처음에는 상담 받는 걸 낯설어하던 어르신들도 매번 웃는 얼굴로 수로왕릉 앞에 나오는 자원봉사자들의 모습을 보고는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고 있다.
 
"오늘은 몇 분이나 오실까요? 오후쯤 돼야 장에 사람이 많아져서 이곳을 찾는 분들도 있을 거예요." 자원봉사자들은 천막 밖을 살펴보며 어르신들의 발길을 기다렸다. 때마침 잔파를 담은 손수레를 끌고 70대 할머니가 천막을 찾았다.
 
"장 보러 왔다가 저번에 만났던 아가씨 없나 해서 와봤어요. 그 아가씨는 오늘 없나 보네. 여기 나올 때마다 자주 봤는데…." 아쉽게도 할머니가 찾는 상담자는 없었지만 상담자 배영애(65) 씨가 할머니를 반갑게 맞았다. 천막에는 자주 왔지만 상담은 해본 적 없다는 할머니의 말에 배 씨는 면접지를 꺼냈다. 여기에는 내담자의 가족관계, 경제상황, 신체상황 등 개인정보를 기록하게 돼 있다. 상담자들은 이 종이를 어르신들에게 직접 제공하지 않고 하나하나 자연스럽게 질문을 하며 작성해나갔다.
 
할머니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자신의 이름으로 나오는 노인연금 32만 원으로 손자까지 키우고 있었다. 노인우울척도를 알아보는 질문지 15개 중 10개에서 우울함을 나타냈다.
 
"어머니. 그 돈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에휴~ 못 살아. 답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지. 애들은 맛있는 걸 사달라는데 사줄 수가 있나. 자식들은 생활비를 주다 안 주다 하니깐 그 심정은 말로 못 하지."
 
"어머니가 가장 역할을 하시는 겁니까?"
 
"영감탱이는 담배만 피우고 도움이 안 돼…."
 
처음에는 주저하던 할머니는 자신의 말을 성심성의껏 들어주는 상담자의 모습에 마음이 열렸는지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굽이굽이 풀어냈다. 혼자서 농사를 지었던 이야기, 뼈를 다쳐서 병원에 갔던 이야기, 자식이 아팠던 이야기…. 오랜 시간이 지난 일이지만 이야기 속에는 할머니의 한이 서려 있었다. 한번 시작된 이야기는 30분이 넘게 이어졌다. 상담자는 "아이고~ 힘드셨겠어요", "고생 많이 하셨네요"라며 추임새를 넣으며 이야기를 들었다.
 
굴곡진 세월을 풀어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앙금이 조금은 씻긴 것일까. 우울한 기색으로 왔던 할머니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그는 상담 이후 증정하는 작은 휴지를 손에 들고 "고맙다"며 웃는 얼굴로 천막을 나섰다.
 

▲ 한 할머니가 수로왕릉 앞에 설치된 '경남생명의전화 이동상담소’를 찾아 대화를 나누고 있다.

상담자마다 스타일도 제각각이었다. 박은현(43) 씨는 음식 이야기로 사람들의 마음을 열었다. 그는 상담소를 찾은 할머니에게 "요즘 갈치가 맛있던데 장터에서 장 보셔서 오늘 저녁에 맛있는 갈치조림 해 드세요"라고 권했다. 할머니는 "그래. 오늘 저녁은 맛있는 갈치조림을 해야겠다"며 신나게 상담소를 나섰다. 박 씨는 "할머니들이 상담을 많이 오시는데 여자들은 달짝지근하고 매콤한 걸 좋아하니깐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한다. 매일 똑같은 일상 속에서 조금이라도 즐거움을 찾게 해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평화로웠던 상담소에 큰 소리가 났다. "죽고 싶은데 여기 오면 되는 거가!"라며 한 70대 할아버지가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화가 난 듯 큰 목소리로 불만을 드러냈다. 상담자는 당황하지 않고 "아이고~ 어서 오세요~ 같이 죽읍시다!"라고 웃으며 그를 맞았다. 할아버지는 우울증으로 2개월째 약을 복용하고 있는 상태였다. "난 아무도 없고 혼자야. 밖에 나오면 괜찮은데 나와서 할 것도 없고 집에 가면 너무너무 힘들어." 거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외로움과 슬픔이 담겨 있었다.
 
이런 내담자를 많이 받아본 듯 상담자 송경남(50) 씨는 침착했다. 그는 "약은 2~3개월 이상 먹어야 효과가 있어요. 꼬박꼬박 드셔야 해요"라고 조언했다. 이어 칭찬을 시작했다. "아버님. 그런데 진짜 70대가 맞으세요? 정말 동안이세요." 화가 잔뜩 났던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슬쩍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어디 가면 '젊어 보인다'는 그런 얘기를 많이 하더라고…."
 
이후 송 씨가 할아버지에게 노인복지관, 경로당, 노인대학 등 해결책을 제시해 보았다. 그러나 할아버지도 시도를 안 해본 것이 아니었다. 그는 "나는 70대라 거기 가면 '얼라' 취급을 받아. 그래서 가기도 싫어"라며 완강히 거부했다. 부정적인 답변에도 송 씨는 "아버님은 성격 자체가 좋으세요. 우울증 꼭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아요"라며 끝까지 그를 응원했다. 할아버지는 앞으로 생명의전화에서 하는 전화 상담을 받아보기로 했다.
 
전화 상담자가 되면 생명의전화 조직 내 노인의전화팀이 한 달에 약 2번씩 안부전화를 하게 된다. "건강은 어떠세요?", "운동은 하세요?", "식사는 하셨어요?" 특별할 것 없는 안부전화에 어르신들은 감동하고 다음 전화를 기다린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자식도 안 하는 전화를 받아본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한 할머니는 몇 차례의 전화 끝에 "사실 내가 할아버지를 죽이고, 나도 죽으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전화를 계속 하다 보니 다시 살아갈 힘이 생겼다"며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오후 1시. 삼계동 생명의전화 사무실에서는 최수연(61) 씨가 오전 상담자에 이어 전화상담을 시작했다. 생명의전화는 휴일 없이 24시간 전화상담을 받기 때문에 40~50명의 자원봉사자가 밤이나 낮이나 평일이나 휴일이나 돌아가면서 전화기를 지켜야 한다. 오늘 그가 맡은 시간은 1시~6시까지 총 다섯 시간이다.
 
"따르르릉." 벨이 울리자 최 씨는 밝은 목소리로 "네 생명의전화입니다~ 어떤 문제로 전화하셨나요?"라고 전화를 받았다. 생명의전화에는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발신자 번호가 뜨지 않게 돼 있다. 상담 내용 역시 상담자만 듣는다. 상담실 옆에서 상담자의 답변으로만 상담 내용을 예상해 볼 수 있었다.
 
첫 번째 전화는 남편과의 불화로 자살을 하고 싶다는 40대 주부의 하소연이었다. 주부의 남편은 매일 집에 와서 TV만 볼 뿐, 부부간의 대화를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주부는 스스로의 성격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았다. 최수연 씨는 주부의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해주고 위로해주려고 노력했다. "속 상하셨겠어요~", "네~ 힘드시겠어요"라며 주부의 이야기에 맞장구쳤다. 자신의 경험담을 담아 조언을 하기도 했다. 최 씨는 "저도 남편이 집에 와서 무뚝뚝하게 있으면 마음에 안 들 때가 많아요. 그때도 그냥 눈 한번 딱 감고 다정하게 '수고하셨다'고 칭찬을 하면 금세 기분이 좋아지더라구요. 한 번 시도해 보세요"라고 말했다.
 
30분이 넘는 긴 통화 끝에 수화기를 내려놓자 1분도 채 안 되어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이번에는 20대 남성이었다. 그는 타인을 만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것이 고민이었다. 그런 성격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식사를 거르기도 하고, 일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생길 정도였다. 최 씨는 "타인을 만날 때도 그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약속을 미리 잡는 것은 어떨까요?"라며 다정하게 해결책을 제시했다. 또 "그렇다고 너무 방에만 있으면 안 돼요. 그 생각에 너무 몰두하지 말고 커피나 차를 마시면서 생각을 전환해 보세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성스러운 상담에도 전화를 건 남성은 상담이 자신의 마음에 꼭 들지 않았는지 부정적인 대답 끝에 전화를 끊었다.
 
두 번의 전화에 한 시간이 넘게 지났다.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의 상담이기에 듣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최 씨는 "17년째 상담 봉사를 하고 있어요. 처음에 50시간이 넘는 교육을 받았지만 막상 상담자와 통화하니 너무 힘들더라구요. 처음 1년은 포기했다가 다시 시작하게 됐어요. 고맙다고 하는 경우가 별로 없지만 그래도 그 분들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것에 보람을 느껴요"라고 말했다.
 
자살 직전 급박한 상황에서 전화를 거는 사람도 있다. 10월 초에도 "지금 자살을 하겠다"는 전화를 받아 생명의전화 사무실이 발칵 뒤집혔다. 다행히 생명의전화 하선주 소장이 자살을 시도하려는 사람을 진정시키고 다음 날 찾아가 상담을 벌였다. 하 소장은 "자살은 충동적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당시에는 죽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은 들지 않는다. 충동이 지나가면 다시 괜찮아지기 때문에 그 위기상황이 지나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하 소장은 자살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한 번만 더 생각해보라고 부탁했다. "아는 사람 중에 자살을 하기 위해 건물 위에서 뛰어내렸다가 태극기 봉에 걸려 살아난 사람이 있어요. 그 분은 그 때 자기 인생에 기회가 찾아왔다 생각했다고 해요. 자살을 시도하려는 분들도 자기 자신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다시 용기를 내보는 건 어떨까요?"

김해뉴스 /조나리 기자 nari@gimhaenews.co.kr


▶경남생명의전화 상담전화 055-321-9191, 노인의전화 055-328-9191, 후원 및 문의 055-321-9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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