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광객들이 선선한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벼의 노래를 들으며 자전거를 타고 있다.

 

▲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생전에 손녀들을 태우고 자전거를 타고 있다.

노 전 대통령, 손녀의 추억 깃든 논길
김해시 8000만 원 들여 지난 5월 개장

친환경농업단지~화포천 7㎞ 두바퀴 여행
노란 바람개비 따라 편안한 봉하의 풍경

운수 좋은 날이면 황새, 철새도 만나고
추억·스트레스 다 잊어 그저 ‘빈 마음’



김해 진영 본산준공업지구의 콘크리트 건물 사이를 빠져 나오자, 봉하마을 친환경농업단지의 너른 논이 시원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95만 7000(29만 평)의 부지를 차지한 익은 벼들은, 여름의 흔적을 완전히 쓸어낸 가을바람에 금빛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향, 봉하마을에 온 참이었다.
 
임기를 마친 노 전 대통령은 진영읍 봉하마을로 내려온 뒤 여러 가지 흔적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손녀를 자전거에 태우고 논길 사이를 달리는 모습을 담은 '자전거 산책'이라는 제목의 사진은 국민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겼다. 긴 옷에 밀짚모자를 쓴 노 전 대통령과 손녀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스치고 있었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봉하마을을 찾은 사람들을 마중 나가기도 했다.
 
봉하마을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봉하마을관광안내소 옆 돌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노란색 컨테이너가 보였다. 김해지역자활센터에서 운영하는 자전거사업소로서, 봉하마을 방문객들에게 자전거를 빌려주는 곳이었다. 이곳은 김해시가 노 전 대통령의 '자전거 산책' 사진에 착안해 사업비 8000만 원을 들여 지난 5월 개장한 '대통령의 자전거길'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자전거사업소에서는 혼자 타는 자전거는 물론 두 명이 함께 페달을 밟아 달리는 2인용 자전거, 어린아이를 태울 수 있는 트레일러 등 여러 종류의 자전거를 제공하고 있었다. 자전거사업소에서는 노란 조끼를 입은 어르신들이 자전거를 닦고, 조이고, 기름칠 하느라 분주했다.
 
혼자 타는 자전거를 한 대 빌렸다. 자전거사업단의 심혜정 과장이 따가운 가을 햇볕을 가려줄 밀짚모자를 건네주면서 "'대통령의 자전거길' 코스는 논길을 따라 가는 흙길과 봉하로를 따라 가는 아스팔트 길이 있다"고 설명했다.
 
'대통령의 자전거길'은 봉하마을 공영주차장과 친환경쌀방앗간 사이의 좁은 길에서 시작한다. 친환경농업단지를 가로질러 화포천습지생태공원까지 이어진다. 처음에는 화포천습지생태공원 앞까지 3.7㎞ 거리였지만, 지난 9월 영강사가 앞 도로를 개방해 준 덕분에 화포천습지생태공원 내 자전거길까지 총 7.03㎞로 늘어났다. 화포천습지까지 갔다 돌아오는 데 는 약 1시간 정도가 걸린다. 지난 5개월 동안 자전거를 타고 이 길을 달린 사람은 약 2000명이다.
 

▲ 자전거사업소에 세워진 각종 자전거.
▲ 봉하마을 황금들판 사이로 이어진 '대통령의 자전거길' 전경.

가벼운 마음으로 페달을 밟았다. 멀리서 정적을 깨뜨리며 진영역을 향해 달리는 기차소리가 들렸다. 화포천습지생태공원 쪽으로 방향을 꺾은 뒤 기찻길을 옆에 두고 흙길을 달렸다. 급한 경사가 없어서 페달을 힘들게 밟을 필요가 없었다.
 
들판 너머로 봉화산 부엉이 바위가 정면으로 보이는 지점에서 길은 갈림길로 나뉘었다. 오른쪽으로 가면 진영역과 효동마을, 왼쪽으로 가면 봉하마을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이 나오게 되어 있었다. 화포천습지생태공원으로 가려면 왼쪽으로 가야 했다. 길을 헤맬 가능성은 없었다. 바람을 따라 빙글빙글 돌고 있는 노란색 바람개비만 따라가면 되기 때문이었다. 자전거 길을 안내하는 바람개비는 길가에 2m 간격으로 설치돼 있었다.
 
벼가 가을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싸라락 싸라락 소리를 들으며 한참을 달리다 보니 갈대로 지붕을 이은 집이 보였다. 누가 살다 떠난 빈집인가? 하지만 이곳은 예사로운 곳이 아니었다. 경남문화재자료 제421호인 '장방리 갈대집'이었다. 갈대로 지붕을 올린 집을 초막집이라 부른다. 그래서 이전에는 이 일대를 초막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낙동강 주변이어서 갈대가 흔해 볏짚 대신 갈대를 사용해서 초막집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길섶에는 갈대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장방리 갈대집은 모두 3개 동으로 구성돼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영강사의 주지스님 요사채로 사용되고 있었다.
 
영강사의 옆길로 접어드니 울퉁불퉁 자갈길이 나타났다. 화포천습지생태공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이 길은 직선이었다. 길을 따라가다 보니 푸른 습지의 한가로운 풍경과 갈대가 몸을 부비는 소리 덕분에 일상의 스트레스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운이 매우 좋은 날이라면 황새나 습지에 터를 잡은 철새들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카메라 가방을 등에 메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사진을 찍는 사진가들의 모습이 곳곳에서 보였다. 자전거에 트레일러를 달고 길을 달리는 가족도 있었다. 트레일러 안에서는 한 아이가 새근새근 낮잠을 자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서는 누런 억새꽃이 완연한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했다.
 
지금 봉하마을에는 노 전 대통령이 없다. "대통령님, 나와 주세요"라고 외쳐도 그의 얼굴을 볼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자전거를 타고 다녔던 논길은 봉하마을을 찾는 사람들에게 짙은 추억을 남기고 있다.
 
사실 굳이 추억이 아니라도 좋을 것이다. '김해의 자전거길'에서는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자연의 한 풍경이 돼 볼 수 있을 듯 싶었다.

김해뉴스 /강보금 기자 amond@gimhaenews.co.kr


▶'대통령의 자전거길' /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 외동터미널·봉황역·금강병원에서 14번 버스 타고 가다 신용삼거리에서 내려 10번 버스로 갈아타고 봉하정류장 하차. 진영역·진영제일고·진영시외주차장서 10번 버스 타고 가다 봉하정류장 하차.
1 자전거 대여 : 1인용 1~3시간 3000~7000원, 2인용 1~3시간 5000~1만 원, 트레일러 5000원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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