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콤바인이 한쪽에서 벼를 베어내는 사이 농민 이대용 씨가 태풍 차바 때문에 땅에 누운 벼를 직접 낫으로 베고 있다.

화목동 너른 김해평야 가을걷이 한창
사람 하던 일 기계가 대신 ‘편리한 시대’
함께 나락 베며 새참 먹던 인정 사라져

건조·도정·포장 마친 뒤 농협 수매장으로
2013년 5만4천원 쌀값 3년 새 1만원 하락
모·비료·약 값 떼고 나면 남는 돈 있을지

“농사 짓는 재미 쏠쏠하던 옛날 그리워
무관심한 정부… 농민 어떻게 할 수 있나”


"50년 넘게 농사를 해 왔지만, 물가와 비교하면 올해 농사가 최악입니다. 다들 대풍이라고 하는데, 김해의 경우 수확량도 줄고 쌀값도 떨어졌으니 한숨만 나오지요."
 
김해 들판에 황금물결이 출렁인다. 가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자 벼 잎은 기분 좋게 춤을 춘다. 가느다란 줄기마다 알알이 여문 벼 이삭이 묵직하다. 바라만 보아도 흐뭇해지고 입꼬리가 올라가는 풍경이다. 그런데 정작 농민들의 표정에는 근심이 가득하다. 김해의 논두렁에서는 '수확의 기쁨'을 찾아보기 어렵다.
 

▲ 알알이 들어찬 벼 이삭.

10월은 벼 수확기다. 김해 시내를 조금 벗어나 시골 지역으로 가면 누렇게 익은 벼를 대형 콤바인으로 수확하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다. 지난 21일 오전 9시 화목동의 한 논에서도 벼 수확이 시작됐다.
 
원래 새벽에 내리는 이슬에 논이 젖기 때문에 오후쯤 돼야 벼를 수확할 수 있다. 농민들은 이를 '이슬을 깬다'라고 한다. 이날은 운이 좋게도 새벽이슬이 없어 '이슬을 깰' 필요 없이 작업을 일찍 시작했다. 대형 콤바인을 갖고 있는 오차진(58) 씨가 능숙하게 콤바인을 몰고 논에 등장했다. 한국농업경연인연합회 김해 지역 회장인 오 씨가 수확할 곳은 50년 넘게 농사만 지어 온 이대용(73) 씨의 논이다. 요즘은 오 씨처럼 각 마을에 한 명씩 콤바인을 갖고 있는 농부가 수고비를 받고 동네의 벼를 모두 수확한다고 한다.
 
콤바인이 논에 들어가자 순식간에 벼가 베어졌다. 콤바인의 앞은 낫처럼 벼 줄기 아래쪽을 벤다. 베어진 벼가 타고 올라 오면 기계가 볏집과 이삭을 분리한다. 콤바인이 지나간 자리에는 벼 밑동만 남았다. 이 씨는 낫을 들고 콤바인이 지나간 자리 뒤를 따라갔다.
 

▲ 콤바인이 수확한 나락을 대형 포대에 쏟고 있다.

이 씨의 논에는 이달 초 불어 닥친 태풍 '차바' 때문에 드러누운 벼가 꽤 있었다. 벼가 많이 눕거나, 여러 방향으로 누우면 콤바인으로 수확하는 게 어렵다. 그는 허리를 숙여 바닥에 누운 벼를 베어내기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누운 벼는 흙이 묻고 제대로 여물지 않아 반은 버리는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누운 벼에 속상할 만도 하지만 이 씨는 "농사는 하늘의 뜻에 달린 일이다. 하늘이 하는 일이 서운해도 어쩔 수 있나"라고 말했다.
 

▲ 햇볕에 건조하기 위해 길가에 내놓은 나락.

이 씨 논의 수확 장면을 지켜보던 다른 농민은 "바람이 많이 불더라도 어떤 논은 괜찮고 다른 논은 풀썩 주저앉는다. 농사를 잘 짓고 못 짓고 차이가 아니다. '바람길'이 있는데, 바람이 어디로 길을 내느냐에 따라 그 해 농사가 오락가락한다"고 말했다.
 
콤바인이 몇 바퀴 돈 뒤 농로 쪽으로 몸을 돌렸다. 기계에 가득 찬 벼 이삭을 내리기 위해서였다. 오 씨의 부인 조미령(52) 씨가 미리 지게차에 걸어둔 대형포대로 누런 나락이 '쏴아-'하며 쏟아졌다. 나락을 담는 동안 오 씨와 이 씨 등은 잠시 가게에서 사 온 맥주와 소주를 들이켜며 목을 축였다. 조촐한 새참인 셈이었다. 오 씨는 "예전에는 다 같이 수확을 하면서 새참도 함께 먹었다. 지금은 거의 다 기계로 일을 하다 보니 새참을 먹는 집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순식간에 1t짜리 포대자루의 반을 나락으로 채운 콤바인은 다시 논으로 들어가 벼를 베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벼가 누운 곳이 많아 이 씨의 손길이 바빠졌다. 그는 "예전에는 소를 끌고 낫을 들고 벼를 벴다. 지금보다 훨씬 힘들었지만, 그 때는 쌀의 가치가 높아 수확을 하는 데 재미가 있었다. 이렇게 농사를 지어 자식들을 다 키웠다. 지금은 나이가 든데다 농사를 지어도 남는 게 별로 없으니 그만 두는 사람이 많다"고 아쉬워했다.
 
600평 남짓한 논의 수확은 두 시간이 채 되지 않아 끝났다. 기계로 수확을 하면 대개 30분 정도 걸리는데 누운 벼가 많아 오래 걸린 것이라고 했다. 이 씨는 직접 낫으로 베어놓은 벼를 탈곡하고 선별하기 위해 콤바인에 벼 다발을 끼워 넣었다. 벼를 옮기고 기계에 넣는 과정에서 농로 위로 벼 이삭들이 떨어졌다. 이 씨는 나락 한 알이라도 버릴까 봐 콘크리트 농로 위에 떨어진 이삭을 손으로 싹싹 모아 포대에 담았다.
 

▲ 나락을 건조기로 옮기는 모습.

포대가 가득 차자 조 씨가 지게차를 몰아 작업장으로 옮겨갔다. 그는 미곡 건조기 앞에 나락을 쏟아 부었다. 건조기는 나락의 수분을 적정하게 맞춰 알을 여물게 하고, 나락 껍질과 알이 잘 분리되도록 한다. 건조를 시키면서 쭉정이를 걸러내는 선별 작업도 하게 된다. 햇빛에 말리면 2~3일, 기계로 말리면 12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건조된 나락을 도정하면 비로소 쌀이 완성된다. 포대에 담은 쌀은 주로 농협 벼 수매장으로 옮겨 경매를 통해 가격을 정한다. 이렇게 하면 농민들은 쌀값을 받게 된다.
 
아직 올해 수매가는 결정되지 않았다. 농협의 우선 지급금이 40㎏짜리 포대당 3만 원에 불과하기 때문에 최종 수매가 역시 3만 8000원 선에 머물 것으로 예상된다. 김해시농협에 따르면 쌀 40㎏짜리 포대당 수매가는 2013년 5만 4000원, 2014년 5만 1000원, 2015년 4만 4000원으로 계속 떨어지고 있다. 2013년 이후 쌀값이 30%나 하락한 셈이다. 정부가 매입하는 공공비축미 수매가도 2013년 6만 730원, 2014년 5만 7740원, 2015년 5만 2270원으로 15%가량 하락했다.
 
오전 작업을 끝내고 출출해진 배를 국밥으로 채우는 동안 해마다 떨어지는 쌀 수매가가 밥상의 대화 주제로 올랐다. 이 씨는 "쌀 수매가가 20년 전이랑 비슷한 것 같다. 물가는 오르는데 쌀값은 떨어진다. 모 값, 비료 값, 약 값 등을 떼면 남는 돈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오 씨는 "사실 김해에서 생산한 쌀은 김해시민들이 소비하기에도 조금 부족한 양이다. 여러 나라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이후 국내에 쌀이 남아돈다. 수입쌀 때문에 어마어마한 양의 국산쌀을 보관하고 있으니 쌀값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북한이 아니더라도 어려운 나라를 도와주는 데 쓰는 게 나을 것 같다. 쌀 보관료, 각종 하역비를 내며 쌀을 묵혀두는 것보다 바다에 버리는 게 낫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한참 동안 수매가를 놓고 갑론을박을 벌였지만 결론은 없었다. "농사일 하느라 정치에는 신경도 안 쓰지만, 정부는 농민들에게 너무 관심이 없습니다. 농민이 어쩌겠습니까. 정해준 수매가대로 팔 수밖에…." 답이 없는 이야기에 한숨은 더욱 깊어졌다. 벼를 모두 베어내고 텅 빈 김해들판의 썰렁한 논들은 갈수록 힘들어지는 농민들의 허탈한 마음 같아 보였다.

김해뉴스 /조나리 기자 nari@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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