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큰 바다여서 그 이름조차 태평양인 짙고 푸른 바다에 밤이 찾아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별이 떴다. 별이 얼마나 많았으면 밤하늘이 온통 금빛 모래사장처럼 보였을까. 그 별빛이 얼마나 밝았으면 태양이 없어도 상관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까. 남궁훈(32)씨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면서 본 밤하늘을 잊지 못한다. 그는 바다에서 세상에는 저 별만큼 많은 사람들이 있고, 나는 이 우주에서 모래알처럼 작은 존재이지만 열심히 살면 언젠가는 저렇게 빛날 수 있겠지라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십년도 넘었지만, 그때의 기억은 지금까지 가장 큰 추억으로 남아 있다. 어렵고 힘이 들 때마다 그 기억은 앞으로 나갈 수 있는 힘이 되어주고, 버틸 수 있는 밑바탕이 되어 주었다.

▲ 신입사원으로 들어가 가장 낮은 곳에서 일을 배우고 동료들에게 인정받는 과정을 반복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남궁훈 씨. 김병찬 기자 kbc@

태어나긴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남궁 씨는 아장 아장 걸을 때부터 김해에서 살았다. 3남2녀의 형제를 어머니 혼자서 키워냈다. 그래서 막내로 태어난 그는 "막내라서 귀여움 많이 받고 자랐겠군요"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고 한다. 식사 때마다 밥이 모자라면 형과 누나가 가장 힘이 약한 막내의 밥을 호시탐탐 노렸단다. 장사 나가는 어머니가 어린 막내를 두고 나갈 수 없어 리어카에 싣고 다니며 김밥이며 과일을 챙겨주었다.
 
빵·신문배달, 떡장사 …중학교 때부터 제 힘으로 살았어요
학비 때문에 국립해사고 들어가 태평양 밤하늘 별빛 보며 넓은 세상과 작은 나를 발견했죠

남궁 씨가 김해 안에서도 초등학교를 5곳이나 옮겨다녀야 했을 정도로 5형제를 키우는 어머니는 힘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5형제의 성장 분위기는 자기 할 일은 각자 알아서, 자기 인생도 각자 알아서 헤쳐 나가는 분위기였다. 형제 모두가 고등학교부터 제 힘으로 다녔다. 남궁 씨도 마찬가지였다. 중학교때부터 빵배달, 신문배달, 떡장사 등 아르바이트를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는대로 사회에 나가 빨리 돈을 벌어 어머니를 편하게 모시고 싶었던 그의 눈에 한 고등학교가 들어왔다. 부산 영도에 있는 국립해사고등학교. 기숙사가 있고, 학비가 들지 않는다는 최적의 조건을 보고 그 학교를 선택했다. 단 선원생활을 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었다.
 
그가 태평양을 본 것은 컨테이너 선사인 고려해운에 입사했던 덕분이다. "그때 제가 탔던 배 이름을 지금도 기억해요. '써니 로렌'이었어요. 선장님이 너무 멋있게 보여 나도 선장이 되고 싶다는 꿈도 가졌죠. 처음으로 나도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할 걸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배를 타고 아시아 각국을 돌면서 이 넓은 세상 속에서 내가 정말 작은 존재이구나, 앞으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하는 많은 생각을 했던 시기였다.
 

입대를 위해 배에서 내렸고, 제대 후에는 김해의 법랑회사에 취직을 했다. 이 회사에도 기숙사가 있었다는 게 회사를 결정하는 큰 요인이었다. 어방동에 있는 한국법랑공업㈜이다. 그는 이 곳에서 평생의 스승 두 분과, 지금의 자신을 만든 '도장'을 만났다. "제 스승님 두 분은 제 평생의 은인입니다. 기술도 가르쳐주셨지만,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지요. 일을 하는 과정 중 하찮은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일이 중요하다는 것. 작은 것 하나라도 소홀히 하면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책임감을 심어주신 분들입니다." 스승님 이름을 물었다. 그는 혹시 그 분들께 결례가 되지 않을까, 자신이 경솔한 것은 아닌가 몇 번을 망설이다가 털어놓았다. 엄태엄 이사, 서평덕 부장이 남궁 씨가 마음으로 모시고 있는 스승 두 분이다. "너보다 더 좋은 기술을 가진 사람을 시기하지 말고 보고 배워 그 기술을 네 것으로 만들어라, 그 기술을 응용해서 더 좋은 기술을 만들어내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일을 배우니 정말 재미있어지더군요." 스승님들 덕분에 막내로 입사했던 그는 기술을 인정받았다.
 
제대후 법랑 회사 입사하면서 삶을 깨우쳐주신 스승님들 만났고
도장일 배우며 최고의 꿈 가졌죠

그리고 다시 선박 도장 회사에 입사해 일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다시 걸레질을 하고 밑바닥부터 일을 배웠다. 막내 신입 입장에서 배우고, 인정받을 즈음 가전전자도장업 일을 하던 친구가 손을 내밀었다. 처음부터 또 시작했다. 친구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기술을 인정받은 뒤 지금의 회사 윌로펌프에 입사했다. 남궁 씨는 여러 회사를 다니며 막내로 들어가 걸레질 하면서 일을 배우고, 동료들이 최고라고 인정해 줄 때까지 열심히 일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힘든 과정을 극복하는 것이 반 걸음 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알기에 기꺼이 받아들였다. "법랑, 선박 도장, 가전도장 등 그동안 익힌 도장 기술이 지금의 회사에서 하나의 지점에 와 드디어 접목이 되는 것 같아요." 그는 진심으로 자신의 일을 좋아하고 있었다.
"소재를 보호하고, 외관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것.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도장입니다." 그는 도장을 이렇게 설명한다. "도장은 체력 소모가 많은 작업이에요. 신경도 많이 써야 하고요. 온도, 습도, 도료 배합까지 한 과정만 어긋나도 제대로 된 제품이 나오지 않아요." 종일 일하고 나면 긴장을 좀 풀어줄 필요가 있단다. 퇴근 후 즐겨 찾는 그의 마음의 휴식처가 부원동 문화카페갤러리 '부뚜막고양이'다.
 

▲ 5분 만에 한번씩 웃는 그는 지나온 힘든 일 모두가 현재의 자신을 만든 소중한 경험이라고 말한다.
올해 초 인터넷 카페 검색을 하다가 부뚜막고양이를 알게 되었고, 이 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다양한 일을 하고 있는 그들을 만나 새로운 이야기도 많이 듣고, 새로운 세계도 많이 접한다. 남궁 씨가 혹시 일하는 것만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는 말자. 그는 그림도 좋아하고, 운동도 좋아한다. 그는 디멘션보드라고 불리고 있는 익스트림스포츠 스트리트 보드에 매료됐다. 스케이트보드와 스노우보드를 합친 형태인 스트리트보드에 푹 빠진 그는 전국대회에 나가 처음 4위를 했다. 그후로도 열심히 연습해서 대회에 나갈 때마다 3위, 2위로 순위가 올랐고 마침내 1위를 했다. 1위를 한 뒤로 크게 다치기도 했지만. 일이든 운동이든 땀 흘리면서 배우고, 그 과정에서 뭔가 느끼는 것을 좋아한다. "쉽게 포기가 안 돼요. 뭐든. 한번 관심을 가지면 잘 하고 싶고, 잘할 때까지 노력하면서 배우는 거지요. 그렇게 열심히 살면 나처럼 부족한 것 많은 사람도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언젠가는 어깨 쫙 펴고 세상을 달려보고 싶어요."
 
어렵게 자랐지만 그게 날 키워 매일 열심히 살기 위해 인터넷 닉네임도 '하루'예요

남궁 씨는 이야기하는 내내 자주 웃었다. 정말 5분에 한번 정도는 웃었다. 그래서 가난했던 시절 이야기도, 일 배우느라 힘들었던 시절 이야기도 재미있게 들었다. 사실, 이번 '줌인김해'에 남궁훈 씨를 소개해주었으면 한다는 전화를 기자는 여러 번 받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열심히 일하는 청년' '어렵게 자랐지만 그늘이 없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 '만나면 유쾌해지는 동생'이라며 자랑했다. 그러나 정작 그는 몇 번이나 내세울 게 없다며,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도 많다며 뒤로 물러섰다. 바로 그것이, 내세울 것 없지만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그 모습이 우리 모두를 다시 한 번 힘내게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더니 비로소 "그런가요"라며 또 한번 웃는다.
 
매일매일 열심히 살아가는 마음을 담아 지은 그의 인터넷 닉네임도 '하루'다.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자신 스스로가 고맙다는 그는 지금 이순간도 동료들이 만든 제품이 세상에서 가장 빛날 수 있도록 도장하고 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넓고 깊은 바다가 흐르고 밤하늘의 별들이 박혀 있다.
 


TIP> 도장(塗裝)
 
물체의 표면에 도장 재료를 칠하여 피막을 형성시키는 것을 말한다. 도장은 물체의 충해, 부식, 마멸을 방지하고 내구성을 높이며 색채나 광택효과에 의해 물체의 표면을 아름답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전기의 절연과 방열, 살균, 방음, 빛의 반사, 방화(防火) 등의 목적도 있다. 2천500년 전에 이집트에서는 건성유(乾性油)가 만드는 고체막을 전색제(展色劑: 도막형성의 주요소)로 하는 도료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20세기에 이르러 근대공업의 급진적인 발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료공업은 경험에 의한 숙련기술에 의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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