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진 시인·동아대 명예교수.

가을이 무르익고 있습니다. 방위산업 비리에 불량무기가 속출하고, 뇌물 판사, 스폰서 검사, 그 속에 정권 차원의 권력게이트가 도사리는가 하더니 명문대 특혜 입학·학점비리가 겹쳤습니다. 낯 두꺼운 책략들이 제 죄를 숨기기에 급급한 동안 전과 7범 과대망상증 환자가 총기로 경찰을 사살하고는 "이건 혁명이다" 당당하게 큰소리치는 역설의 가을. 아파트 값과 가계부채가 함께 폭등하고, 최악의 경기에 최고의 실업률이 짓누르는 가을, 그래도 가을은 알록달록 익어갑니다.
 
세상이 험악해도 가을 산야는 곱게 단장하고 새봄을 예비하듯 그나마 우리 사회에 희망의 불씨를 지피는 건 세칭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의 시행이 아닌가 합니다. 미풍양속을 해칠 수 있다거나, 법 적용대상을 4급 이하 공무원이나 교직원과 언론인 등 하위직은 적용을 늦추자느니, 일견 남 걱정 하는 듯한 논란도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아직도 편법, 불법의 타성에 젖은 계산들이 아닌가 합니다. 대다수 국민들은 끄떡 않고 인맥, 금맥에 의한 부정부패가 말끔히 사라질 날만을 고대하고 있는데, 요만치라도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딴지가 아닌가 하는 겁니다.
 
최초 제안자의 말마따나 이 법은 '접대와 청탁문화를 없애고 공무원들에게 청탁 거절의 근거를 주는 데에 취지'가 있습니다. 관계 당국은 칼날 같은 시행기준을 다듬어 일로 공정 사회를 향한 성장통을 극복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기준은 오직 '양심'과 '정의'. 부정한 사회에서는 탐욕이 양심을 병들게 하고, 편법이 정의를 눈멀게 합니다. 독재와 독선이 발붙이고 편당과 인맥을 조장합니다. 돈이든, 선물이든, 무엇이 부정한지, 무엇이 비양심인지는 삼척동자도 다 알아먹을 일 아니겠습니까? 김영란법은 김영란법을 넘어, 이 땅에 정의의 역사를 세울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 국민적 이해라 할 것입니다.
 
일제하에서 교사생활을 하다 일신의 평안을 박차고 민족독립운동을 선택했던 해공(海公) 신익희. 그가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할 때의 일입니다. 겨울 어느 날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신익희에게 옆에 있던 동지가 웃으며 말했답니다.
 
"신 동지, 아무리 없는 형편이지만 양말이 그 정도가 돼서야 되겠소? 양말 바닥이 다 날아가고 없지 않소?"
 
신익희도 양말 바닥이 다 해진 줄이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양말이 아니라 발 이불이요, 발 이불."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웃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국땅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들 중에 넉넉한 이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혹독한 추위에도 바닥이 다 닳은 양말이라도 신어야 했던 건 비단 신익희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법통을 잇고 있는 일제하 임시정부의 지사들, 그들에게는 이웃과 함께 사는 양심, 정의의 편에 있다는 자존감이 있었기에 물질적인 빈곤쯤이야 소극(笑劇)으로 흘려보낼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할 것입니다.
 
김영란법 조문은 가능한 한 고쳐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 정신을 엄정하게 실천하는 한편 모든 권력의 인사(人事)와 회계 과정도 투명하고 엄정하게 밝혀지는 제도도 마련되어서 시민적 연대감과 자존감을 꽃피우는 봄날의 준비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근대사에는 비양심의 권세가 정의와 양심을 무너뜨리고 개인의 자존심과 공동체적 신뢰감을 무너뜨리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양심보다 경쟁심이, 정의보다 불의가 출세의 방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모두가 남도 나처럼 존중하고, 남의 사정도 내 사정 같이 여기는 정의와 양심의 문화를 이뤄나가지 않는다면, 급증하는 실업률이며 개인부채, 경제력의 양극화 현상이 완화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국민 행복지수 최하의 나라라는 오명을 떨어낼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가을 최고의 수확이 김영란법입니다. 청탁을 금지하는 가이드라인을 넘어서 정의와 양심을 실천하는 입구입니다. 마땅히 민족사 대 전환의 계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음모가 발붙일 수 없는 사회, 음성적인 청탁이 필요 없고 은밀한 청탁으로는 해결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긍지 높은 사회로의 변혁을 이루어야 합니다. 가을 산의 단풍들처럼 사람들이 저마다의 빛으로 반짝이면서 함께 어우러지는, 긍지 높게 살다가 자연의 품안에 다시 편안히 안기는, 정의와 순리의 사회로 나아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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