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곡마을 뒷산 감나무과수원에서 바라본 병동리에는 오로지 공장들뿐이다.

 

대나무숲·무릉천, 아름다운 산수 자랑
마을 유래비 세울 만큼 자부심 높아

2000년 자동차전용도로 지정 상황 급변
임대 등 각종 공장 곳곳에 건설 바람

자연마을에 남은 건 채소텃밭과 콩밭 뿐
터전 잃은 주민들, 월세·식당일로 생계



'지역공동체' 유지와 '개발'이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까. 스페인의 협동조합 '몬드리안'은 공동체와 개발이 '공존'하는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몬드리안은 바스크 지역 257개 기업과 조합에서 7만 4000명이 일하는 연합체로서 자산이 40조 원에 이른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에서, 특히 농촌지역에서 이뤄지는 개발은 공존보다는 원주민의 삶의 방식을 수동적으로 바꿔놓고, 오히려 그들을 소외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임금이 병풍(屛風)을 하사한 마을'이라는 뜻에서 '병동(屛洞)'이라는 이름을 얻은 한림면 병동리는 개발이 공동체를 얼마나 무력하게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현장이다. 어병과 범곡마을로 이뤄진 병동리는 마을 뒷산으로는 13만 2000㎡(4만 평)의 대나무숲, 마을 앞으로는 화포천의 지류인 무릉천이 흘러 아름다운 산수를 자랑하던 곳이다. 이런 풍수 때문인지 예부터 나라의 관리들도 많이 배출됐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수백 개의 공장, 농공단지 그리고 개발이 진행 중이거나 예정인 3개의 산업단지로 인해 옛 모습과 인정(人情) 그리고 자족 기능을 잃어가는 곳이다. 여기다 삼천포발전소에서 북부산을 잊는 대형 송전선로가 지나가고, 2014년에는 마을 위쪽으로 상록골프장이 들어서면서 환경에 영향을 받고 있다.

▲ 담을 도배한 공장 임대 및 철거 광고.

개발은 범곡마을이 빨랐다. 범곡마을은 김해시내 방향으로 '웃담'(본동), 가운데 '아랫담', 진영 방면 '가다리'로 자연마을을 형성했는데, 아랫담은 공장이 들어서면서 사실상 사라졌다. 현재는 웃담과 가다리에 162가구 240여 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곳에 처음 공장이 들어선 것은 1982년 빙그레가 김해공장을 세우면서다. 이 공장은 아직도 영남 일원에 유제품을 공급하는 생산거점으로서, 빙그레의 전국 공장들 가운데 2번째 규모다. 김해공장은 1980·90년대까지 병동리 이름을 외부에 알리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후 15년 가까이 잠잠했던 1996년, 가다리에 한일합작 기업 칼소닉칸세이코리아가 입주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가다리 앞의 논은 장마 때면 화포천이 범람하는 상습 침체 지역이었다. 이 값싼 저습지에 흙을 매립해 지대를 높이고 처음 공장이 들어선 것이다.
 
그래도 이때까지 가다리는 두 개의 큰 공장이 있는 시골마을에 불과했다. 하지만 2000년 한림면 퇴래리와 불암동을 잇는 19.0㎞ 구간이 자동차 전용도로로 지정되고, 2007년에는 퇴래리와 주촌면 농소리를 잊는 10.5㎞ 고속구간이 개통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김해 1·2·3터널을 통해 남해고속도로와 바로 연결되면서 이곳의 물류환경이 급격히 좋아졌기 때문이다.

▲ 가다리 공장지대 위로 33만 볼트 초고압 송전선로가 지나고 있다.

이렇게 2000년대 초부터 공장들이 급속도로 들어왔고, 외지인들과 마을 일부 주민들이 논에 임대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여기다 2003년 웃담에 9만 2400㎡(2만 8000평) 규모의 병동농공단지가 준공되면서 가다리와 웃담 사이에 공장 유입을 부채질했다. 가다리의 일부 공장은 1980년대 중반 설치된 33만 5000볼트 송전철탑 아래에 들어섰다. 조금이라도 싼 값에 공장부지를 조성하기 위해 기업주들이 선택한 결과다. 한전 경남본부 관계자는 "원래 송전탑이 있었는데, 공장 설립을 신청해서 한전이 협의해 줬던 내용"이라고 밝혔다.
 
결국 범곡마을은 이름만 '마을'이지 공장 밀도가 높은 공단지대가 됐다. 병동리에 등록된 자가공장은 131개, 임대공장은 29개지만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공장 수는 이 보다 훨씬 많다. 이제 범곡마을에는 채소텃밭과 겨우 몇 마지기도 안 되는 콩밭과 산딸기밭만이 남았다. 마을 뒤편 감나무과수원도 얼마 전 외지인에게 팔렸다고 한다.
 
일부 주민은 농사를 짓지만, 삶의 터전을 잃은 주민 대부분은 이제 개발과 함께 들어온 외지인들에 의존해 살아간다. 많은 주민들이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방을 세 놓거나, 공장에 밥을 대는 식당에서 일한다. 더러는 골프장을 오가는 사람들을 상대로 음식장사를 하기도 한다.
 
이렇게 개발은 범곡마을 원주민의 삶의 방식을 변화시켰고, 주변 환경도 악화시켰다. 처음 공장이 들어왔을 때 공장의 기계 소리와 철판 내리는 소리에 깜짝깜짝 놀랐던 주민들은 수년 간의 반복 탓에 소음에 많이 무뎌졌다고 한다. 골프장이 들어온 후 수질검사에는 별 문제가 없다고는 하지만 지하수를 그대로 먹던 주민들은 정수기를 이용하는 경우도 늘었다.
 
이제껏 개별공장들이 많이 들어오지 않아 논농사를 짓는 주민들이 많은 맞은편의 어병마을은 201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단지 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다. 116가구 220여 명이 거주하는 어병마을에는 5년 전 도랑 정화 활동을 통해 되살린 빨래터도 있고, 지난 4월에는 마을의 역사를 기록한 유래비(由來碑)를 세웠을 정도로 자부심이 높은 곳이다.

▲ 범곡마을에서 진행중인 개별공장 공사.

하지만 산단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마을 분위기는 전 같지 않다. 지난해에 있었던 마을 이장 투표에서 이장 자리를 두고 주민 간에 갈등이 표출되기도 했다. 어병마을 인근에 3개의 산단이 개발되는 가운데 개발업체와의 협상권을 이장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현재 마을 뒷산에는 66만 7000㎡(20만 평) 규모의 사이언스파크산단의 터파기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고, 얼마 전 공사를 시작한 26만 3000㎡(약 8만 평) 규모의 명동일반산단도 마을과 접해 있다. 이들 산단보다 시작은 늦었지만 병동일반산단(19만 8000㎡·6만 평)도 시의 승인을 받고 개발을 준비 중이다.
 
과거 어병마을 이장과 산단 반대 대책위원장을 맡았던 한 어르신은 "13만 2000㎡(4만 평)에 이르는 대나무 밭이 명동일반산단 공사로 거의 다 베어졌다. 대나무 뿌리가 질기고 땅에 촘촘히 박혀 홍수가 없고 지하수도 맑았는데, 이젠 비만 오면 흙탕물이 쏟아진다"며 "산단이 처음 들어온다고 했을 땐 반대도 많이 했지만 결국 포기했다. 쌀값이 떨어져 990~1650㎡(300~500평) 정도의 농사를 지어봐야 1년에 200만 원밖에 안 남는다. 자식 용돈과 노령연금으로 사는 주민이 많다. 산단이 들어와 외국인이 늘어나면 셋방을 놓을 거라 기대하는 이들도 있다"고 전했다.
 
김해뉴스 /심재훈 기자 cyclo@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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