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김해의 도심을 흐르는 대표적인 물줄기로는 김해 중심지의 서쪽을 흘러 바다와 맞닿게 되는 해반천(海畔川), 분산에서 시작해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호계(虎溪), 활처럼 휘어져 동쪽을 휘감고 흐르는 활천(活川)이 있다. 이 가운데 <동국여지승람>이나 읍지 등 지리지에 오랜 옛날부터 기록된 물은 호계 뿐이다. 이는 호계가 가진 김해에서의 위상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호계의 지명 유래는 한글학회에서 펴낸 <한국지명총람>에도 밝혀져 있지 않고, 여타의 지명 유래집이나 김해시의 홈페이지에서도 밝혀지지 않았다. 우리나라 어느 시도이든 '범'과 관련된 지명이 하나쯤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가운데 특히 호계라는 지명을 김해 인근에서 찾아보면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의 호계리, 양산시 양산읍의 호계리, 울주군 농소면의 호계리 등이 있다. 이들 지역에서는 골짜기가 깊어 호랑이가 자주 나타났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김해의 호계 또한 사정이 비슷하다.
 
그 옛날 호계의 발원지인 분산은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던 대단히 깊은 골짜기였던 것이다. 김해의 가장 깊은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김해의 중심을 적시고 바다로 들어가는 호계는 구지봉과 신어산이 시대를 꿰고 흐르던 김해의 정신적 발원지요 근간이었듯, 그 시작과 끝을 책임지던 삶의 물줄기였다.
 
<삼국유사> '금관성 파사석탑(金官城 婆娑石塔)' 조에는 '김해 호계사의 파사석탑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가야일 때 세조 수로왕의 왕비이신 허왕후께서 아유타국에서 싣고 오신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호계 주변인 동상동 연화사(蓮華寺)에는 가락국의 옛 도읍에 있던 궁궐터의 비를 세워두었다. 더욱 많은 고증이 필요하겠지만, 이전 자료들을 참고해 보면 김수로왕이 처음 궁궐을 조성한 신답평(新沓坪)은 호계 주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화사는 조선조에 외지에서 공무로 김해를 찾았던 외래객들의 숙소 객사의 후원이었다. 이 주변에는 외지인들을 위로하고 경관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한 누정이 즐비하였으니 임금당(臨錦堂), 연자루(燕子樓), 함허정(涵虛亭), 청심루(淸心樓)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가장 오랜 세월 많은 시인, 묵객 들에게 김해의 상징으로 표현되었던 곳은 연자루다.'금관가야의 구형왕(仇衡王) 9년(531년) 겨울에 연자루가 울며 흔들려 김해 사람들이 모두 놀랐는데, 임자년(532년)에 나라가 망하리라는 것을 예언하는 것이라고 하자 왕이 없애도록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누각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까지 남아 있다가 일제강점기인 1932년에 헐렸다고 한다. 연화사에는 연자루의 돌기둥이 남아 있어 그 추억의 한 자락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조선조 후기 이학규(1770~1835)와 허훈(1836~1907)은 당시 호계 주변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시로 읊었다.
 
'호계 한 줄기 성을 꿰고 흐르고/ 곳곳에 다리 놓여 저자 누각과 닿았네/ 논에 물대고 모두 남쪽 수문으로 흐르니/ 빨래소리는 북문머리에서 많이 들리네'(이학규 '김해의 풍속')
 
'김해성 북쪽 호계 물가/ 콸콸 울리는 물결 골골이 기이하네/ 작은 방망이가 산 그림자 속에 오르락 내리락/ 알지 못하네 붉은 해가 서쪽으로 넘어간 줄을'(허훈 '호계의 빨래 방망이 소리')
 
호계는 가락국 건국 당시인 김수로왕 시절에는 왕국의 상징인 궁궐과 호국의 상징인 파사탑을 호위하던 물줄기였다. 고려와 조선조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경관을 제공하는 한편 생산과 삶의 현장으로 기능하였다. 현대에 들어서는 김해의 아픔을 간직한 곳으로 변화했다. 호계는 2000년의 세월을 김해의 정신과 삶을 버티고 흐르던 물줄기였다는 말이다.
 
조선조 초기의 기록을 보거나 1984년 복개되기 전 호계의 사진을 보면 호계는 그리 깊지는 않았으나 깊숙하게 마련된 분산의 샘에서 솟아나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던 물이었다. 지금의 호계는 발원지인 분산 주변을 제외하고는 모두 복개되어 도로로 활용되고 있다. 많은 주민들은 호계로라는 이름의 길을 걸으면서도 그 아래로 흐르는 호계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도심 하천은 도시의 형성에 중요한 기준이자 삶의 터전이었다. 도시가 복잡해지고 교통이 번잡해지면 가장 수월하게 교통의 흐름을 책임지는 통로로 기능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김해는 이러한 과거 도시의 하천 역할에 만족하던 중소도시였다. 그러나 이제는 문화도시요 환경도시로 거듭나야 할 때가 됐다. 그 핵심에 호계의 문화적, 환경적 개발이 있다고 믿는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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