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뉴스>는 이번 주부터 새 기획시리즈 '여행-경남 둘러보기'를 연재한다. 수첩과 카메라만 갖고 가볍게 떠날 수 있는 경남의 유명 관광지는 물론 숨은 명소들도 소개한다.
 

▲ 젊은 연인들이 단풍으로 물든 상림숲 산책로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 인공숲, 통일신라 때 조성
활엽수 120여 종 2만여 그루 빼곡히

하늘 고스란히 비치는 위천 경치 장관
연꽃, 꽃무릇 30만 구 겨울나기 한창

인물공원엔 영남 빛낸 11인 흉상 우뚝
천년 세월 버틴 숲에서 ‘하루는 먼지’일 뿐


1100여 년 전, 통일신라 말기의 학자였던 고운 최치원(857~925) 선생은 천령군(옛 함양) 태수로 재직할 때 홍수가 자주 발생하자 강변에 둑을 쌓고 나무를 심게 했다. '대관림'이라 이름 붙은 이 숲은 제방 역할을 해 홍수 피해를 막았다. 잔가지와 낙엽은 불쏘시개로 활용돼 추위를 견디게 했고, 도토리는 굶주린 이들에게 구휼식량이 됐다. 아쉽게도 중간 부분이 파괴되는 바람에 숲은 상림과 하림으로 갈라졌다. 여기에 하림은 취락이 만들어지면서 훼손돼 흔적만 남아 있다. 다행히 상림은 옛날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조림숲인 상림은 이제는 함양의 큰 자산이 됐다. '천년의 숲'이라 불리는 천연기념물 상림을 찾았다.
 
청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오색찬란한 단풍옷을 입은 산봉우리를 감상하며 김해에서 2시간 정도 차를 타고 가다 보면 함양 상림에 도착한다. 주변에는 박물관, 종합사회복지관, 문화예술회관 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차를 세운 뒤 상림관광안내표지판을 올려다 보려는데 따가운 가을 햇살이 눈을 아프게 찌른다. 상림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회색빛 도심의 딱딱한 아스팔트길만 걷던 발이 벌써 부드러운 흙길에 취해 걸음을 부추겼는지도 모르겠다.
 
상림이 관광객들에게 주는 선물은 가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다. 아주 소소하지만 먼저 입장료가 없다는 것에 큰 점수를 매겨본다. 이곳은 사계절 풍광이 뛰어나고 천연기념물 제154호로 지정됐을 만큼 보존가치가 높기 때문에 관리비가 만만치 않게 든다. 하지만 입구와 출구가 10개 이상이어서 인력, 예산을 투입해 입장료를 받을 수는 없는 형편이다. 덕분에 함양 군민들은 제집 앞 공원 드나들듯 상림을 찾는다.
 

▲ 제방을 따라 심은 나무가 '위천' 강물에 고스란히 비치고 있다.

인근 학교에서는 학생, 교사들이 상림에서 수업시간 체육활동을 한다. 우스갯소리지만 함양 학생들이 가장 가기 싫은 소풍장소 1위는 상림이라고 한다. 유치원 때부터 체험행사·축제·대회가 모두 이곳에서 열린데다 주말이 되면 가족과 함께 찾아가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들 "상림만한 곳이 없더라"며 아끼고 사랑한다.
 
상림숲 산책로에 들어서자마자 "와" 하고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온다. 눈앞에서 '초콜릿색처럼 짙은 가을'을 마주한 느낌이다. 지난 여름 내내 받았던 햇빛을 노랗게 바꾼 잎들은 바람에 흩날린다. 춤추듯 살랑이며 떨어지는 단풍잎은 숲길 바닥을 오색빛으로 촘촘히 메운다. 울창하게 뻗은 가지는 나무터널을 만들어 햇빛을 막아준다. 텅 빈 나뭇가지 사이로 간간이 비치는 햇살은 절로 카메라를 들게 한다. 한 어린이는 마냥 쪼그리고 앉아 색이 고르고 찢어지지 않은 단풍잎 찾기에 몰두하고 있다. 샛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발견하자 천진난만한 미소가 얼굴에 번진다. 조막만한 고사리손에는 어린이의 얼굴만큼이나 예쁜 단풍잎 수십 장이 있다. 올해는 기온이 일정하지 않은 탓인지 단풍나무과인 복자기나무의 잎이 붉지 않고 노란빛을 띤다고 한다.
 
상림의 길이는 1.6㎞, 전체 면적은 21만㎡(6만3525평) 정도다. 활엽수 120여 종, 2만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빠르게 걸으면 40분 만에 다 둘러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마음을 따뜻하고 푸근하게 만드는 숲을 그렇게 짧은 시간에 둘러보고 휑하니 돌아선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여러 나무 위로는 다람쥐가 뛰어다니고, 나무 아래에는 떨어진 도토리들이 굴러다닌다. 딱따구리는 연신 나무를 쪼아댄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원앙은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높은 곳에 앉아 편안히 쉬고 있다. 상림에서 1년 내내 머무는 원앙 무리는 여유롭게 강물 위를 유영하고 낮잠을 자거나 먹이를 사냥한다.
 

▲ 역사인물공원에 세워진 최치원 흉상.

나무 아래에는 마늘종 모양의 꽃무릇 30만 구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다. 꽃이 진 후에 잎이 돋아나는 꽃무릇은 수선화과의 여러해살이 풀이다. 마늘종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석산화라 불린다. 10년 전 산책로를 따라 조성됐지만 사실 심으면 안 되는 식물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식물이 아니기 때문이어서 문화재청의 경고를 받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좋아해 뽑을 수 없어 그대로 놔뒀다고 한다. 그 덕분에 해마다 9월 중순이 되면 짙은 분홍빛 꽃이 개화해 장관을 이룬다.
 
숲을 끼고 흐르는 함양의 강 위천(謂川)에서는 탁 트인 전망을 볼 수 있다. 상수원보호구역이어서 투명하고 깨끗한 강이다. 위천은 욕심이 많아 가을하늘을 혼자 물 속에 숨겨놓은 것 같다.
 
숲속 한쪽에는 역사인물공원이 있다. 상림을 조성한 최치원은 물론 영남 유림의 중심인 사림학파의 거장 김종직(1431~1492), 성리학의 대가 정여창(1450~1504), 조선후기 실학자 박지원(1737~1805) 등 영남을 빛낸 11인의 얼굴을 조각한 흉상이 서 있다. 옆에서는 고성능 카메라를 장착한 촬영용 드론을 가져와 조종하는 손길이 분주해 보인다.
 
상림에는 문화관광해설사 2명이 상주하고 있다. 그만큼 전설과 문화재가 많다는 이야기다. 구전되는 이야기 중 하나는 '금호미 전설'이다. 내용은 이렇다. '최치원은 직접 지리산, 백운산에서 활엽수 수백 종을 캐어 옮겨 심어 숲을 조성했다. 이때 힘을 보태준 산짐승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작업이 끝났다는 것을 선언하기 위해 금으로 만든 호미를 힘껏 던졌다. 금호미는 숲속 나뭇가지에 걸려 댕그랑 하는 소리를 냈다. 이때부터 천령군은 재앙이 들어오지 못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상림에는 벌레가 없기로 유명하다. 모친이 뱀을 보고 크게 놀라자 최치원은 그 자리에서 "뱀이나 해충은 일체 숲에 오지 마라!"고 외쳤다. 그는 숲을 떠나면서 제자들에게 "숲에 해충이 나타나거나 산죽이 자라나면 내가 죽은 줄 알라"고 했다. 이후 숲속에 개미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최치원이 신선이 돼 승천했다고 이야기했다.
 
이곳에는 또 최치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23년 경주최씨 가문이 세운 '문창후 최선생 신도비'가 있다. 1906년 유림들이 최치원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사운정도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다. 흥선대원군이 서양과의 화친을 배척하기 위해 세운 척화비도 상림 입구에 서 있다.
 
산책로의 끝에는 물레방아와 민가가 있다. 위천 반대방향으로 몸을 틀면 6만 6000㎡(2만 평) 규모의 연꽃단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아쉽게도 연꽃은 겨울을 나는 중이다. 여름에는 백련, 홍련, 어리연, 수련, 가시연꽃 등 다양한 품종을 볼 수 있어 여름철 관광지로도 인기만점이라고 한다. 상림의 겨울 설경, 여름의 연꽃은 과연 어떤 느낌을 줄지 궁금해졌다.
 
해가 기울었다. 상림은 황금빛 노을로 물들었다. 숲 끝부분에 잠시 앉았다. 1000년의 세월을 이어온 상림에서 하루는 먼지 같은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해뉴스 /함양=배미진 기자 bmj@gimhaenews.co.kr


▶함양 상림 / 함양군 함양읍 교산리 1047-1
경전철 사상역에서 내린 후 부산서부버스터미널로 이동, 함양행 버스를 타고 함양시외버스터미널 하차, 함양-신촌 농어촌버스 탑승 후 함양군청정류장 하차, 도보로 10분. 문의 055-960-5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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