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림면 퇴은마을에서 바라본 퇴래리 전경. 마을 인근에는 공장 뿐이다.

 

통일신라 경애왕 때부터 집성촌 이뤄
조선시대 충신 삶에서 마을 이름 유래
2008년 공사 도중 가야유물 등 출토

79만㎡ 친환경농업단지 덕 ‘봉순이’ 방문
이마저 사라지면 화포천습지 환경도 파괴

삼화페인트 설립 이후 “자고 나면 공장”
길 건너 산단 예정, 농사 지을 사람 없어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세계문화유산재단(GHF)'은 2010년 10월 '사라져가는 우리 문화유산을 구합시다'라는 보고서를 냈다. 전 세계의 고대유적 가운데 200곳이 난개발과 지나치게 많은 관광객, 관리 소홀 등으로 파괴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도 80곳도 포함돼 있었다. 세계문화유산재단이 한림면 퇴래리를 방문했더라면 그 보고서에 퇴래리 이야기도 넣지 않았을까. 1000년 역사를 가진 퇴래리는 모두의 무관심 속에 사라져 가는 마을 가운데 하나다.
 
퇴래리와 퇴은마을이란 지명은 조선시대 충신들의 삶에서 유래했다. 단종 3년(1445년) 서강 김계금과 인조, 효종 때 회령부사를 지낸 김영준이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퇴래촌, 퇴은마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퇴은마을은 영남지방에서 유명한 마을이었다.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통일신라시대 경애왕 시절부터 김해김씨의 집성촌이었다. 김해김씨가 마을을 이루고 산 지 1000년을 넘는다. 영남지방에서 5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문중의 마을 8곳을 '영남팔명촌'이라 부른다. 퇴은마을은 조선시대 때 생원과 진사가 30여 명 나온 마을로 영남팔명촌 중 가장 으뜸인 마을이었다.

▲ 벼가 노랗게 익은 친환경농업단지 퇴래뜰 앞에 공장들이 우뚝 서 있다.

영남팔명촌이었던 퇴은마을은 이제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마을의 유래와 출신 인물의 이야기는 어르신들이나 기억하는 옛이야기가 돼 버렸다. 공장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마을은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가도 찾기 어려웠다. 마을 주변이 온통 공장이어서 마을 인근 도로를 30분이나 돌고 나서야 마을회관을 찾을 수 있었다. 퇴래리의 퇴은마을, 삼미마을, 소업마을에는 278가구, 518명이 살아가고 있다. 가구와 인구는 개별공장을 포함한 숫자다.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퇴래리에 가장 먼저 설립된 공장은 츄고쿠삼화페인트㈜이다. 우리나라의 삼화페인트와 일본 츄고쿠마린페인트의 합자회사이다 친환경 선박용도료를 생산하는 업체다. 이 회사는 2001년 9월 퇴래리에 김해공장을 건설했다. 연 2만 4000t의 선박용 도료를 생산하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2013년에 마을 주민들은 페인트 공장에서 발생하는 악취로 인해 십수 년 째 고통을 겪고 있다고 호소하기도 했다(<김해뉴스> 2013년 2월 27일 보도). 당시 주민들은 악취를 유발한 유독물질을 주민들이 앓는 폐암의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 퇴은마을, 삼미마을로 이어지는 도로.

츄고큐삼화페인트를 시작으로 신발부품공장, 선박부품공장 등이 마을 입구까지 들어왔다. 마을주민 김 모(76·여) 씨는 "이전에는 마을 주변이 모두 논밭이었다. 추고큐삼화페인트부터 시작해 공장이 하나 둘 들어오더니 10년 만에 마을 안까지 들어왔다. 옛 마을 풍경은 어디 가도 안 보인다. 눈에 보이는 것은 공장뿐이다. 페인트냄새로 머리가 아파도 힘없는 노인들이 어떻게 하겠나. 이렇게 살다 죽는 수밖에 없다"라며 말끝을 흐렸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지역이란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2008년에는 공장 신축현장에서 가야시대 유물이 출토되기도 했다. 2008년 4월 뉴시스 보도에 따르면 퇴래리의 공장 신축현장에서 가야시대 고상가옥 19동을 비롯해 구상유구 4기, 수혈 4기, 집석유구 1기 등 총 28기의 마을 유적이 확인됐다. 이 유적은 퇴래리 고분을 축조한 가야인들의 마을유적이었다. 국립김해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태양문장식의 철갑옷도 이곳에서 출토됐다. 발굴이 완료된 공장 부지는 지하 유구 보존을 위해 1m 정도 성토한 뒤 지어졌다.

▲ 퇴은마을 주택 뒤에 공장이 세워져 있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공장 하나가 더 들어 와 있더라." 마을 주민들의 말처럼 공장은 이제 마을회관 앞까지 쳐들어왔다. 주민 주 모(75) 씨는 "공장 때문에 마을이 다 망가지면서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로 공기가 나빠졌다. 자식들은 외지에 살고 있고 마을을 지키는 것은 노인들 뿐이다. 3~4년 전에는 평생 살아왔던 마을을 떠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텃밭농사를 짓다 보니 떠나기가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그는 '공장 분양' 현수막이 나부끼는 신축 공장을 가리키며 "공장 설립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마을 모습을 그나마 이렇게라도 지키는 것도 우리 세대에서 끝날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 '임대' 플래카드가 붙은 퇴래리의 공장.

우습게도 공장으로 둘러싸인 퇴은마을 앞 약 79만㎡ 규모의 퇴래뜰에는 친환경농업단지가 조성돼 있다. 농민들은 막바지 추수에 한창이다. 화포천습지에서 날아온 기러기떼들이 먹이를 찾아 퇴래뜰 위로 날아가고 있다. 주민 김 모(70) 씨는 "공장 앞에 친환경농업단지가 조성돼 있는 게 어찌 보면 우스운 모양새다. 하지만 그나마 남아 있는 퇴래뜰 덕분에 황새 봉순이가 찾아오고, 화포천습지에서 멸종위기종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마저 없어지면 화포천습지의 환경은 무너질 것"이라고 말했다.
 
퇴래미산 너머 병동삼거리 일대에 있는 소업마을 입구에는 주택 옆으로 옹벽이 쌓였다. 옹벽 위로 포클레인 한 대가 공장을 짓기 위해 공사를 하고 있다. 한 주민은 공장이 들어오는 걸 반기기도 했다. 땅을 팔 생각인 것이다. 소업마을 주민 박 모(78) 씨는 "마을 앞 길 건너편에 병동일반산업단지가 조성될 예정이다. 이제 시골에서 농사를 지을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기업들이 논을 사서 산업단지를 만들면 좋은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김해뉴스 /김예린 기자 beaurin@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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