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3일 봉황동 유적지 학술자문위원회에서 전문가들이 발굴 현장을 지켜보고 있다.


23일 봉황동 유적지 발굴 설명회
지배층 사용 유물 대규모 발견돼
2018년까지 조사 후 궁 복원계획

 

▲ 주요 건물에 사용한 연화문전돌.

금관가야의 왕궁터로 추정해 왔던 김해 봉황동 유적지에서 서민 계층의 주거지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유물, 기와 등이 나왔다. 봉황동 유적지가 실제로 왕궁터였거나 지배계층의 주거지였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소장 김삼기)는 지난 23일 회현동주민센터 앞 봉황동 유적지 발굴현장에서 유적 발굴조사 성과와 앞으로 조사방향에 대한 전문가 자문회의, 현장설명회를 개최했다.
 
지난해 9월부터 금관가야 왕궁 유적 발굴조사를 진행해 온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가야시대 기와를 포함해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 토기들과 고려시대의 청자, 조선시대 자기류 등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유적지의 표토는 대체로 5~6개의 층위로 나타났다. 아래에서부터 삼국시대 문화층, 통일신라~삼국시대 문화층, 조선시대 문화층, 조선시대 이후 퇴적층, 현재 퇴적층으로 나뉘었다. 많은 수혈(구덩이)과 주거지로 추정되는 생활의 흔적들도 다수 발견됐다. 각각의 깊이가 확인된 만큼 가야시대를 중심으로 발굴조사에 더욱 속도가 붙을 예정이다.

▲ 그릇을 받치기 위해 만든 소형기대.

출토된 유물 중에서는 옹, 사발, 시루 등 생활용기로 사용되는 토기류가 많았다. 굽다리 접시, 그릇 받침대, 차륜형 토기 등과 삼국시대 고분에서 주로 발견되는 유물도 다수 나왔다. 철촉, 동전 등 철제유물과 유리구슬 1점, 곡옥 1점 등 장신구도 확인됐다. 이외에도 사슴, 멧돼지, 소, 고래, 상어, 강치 등 동물의 뼈와 굴이 주를 이루는 패각류도 다량 출토됐다.
 
특히 가야시대의 기와와 차륜형(수레바퀴 모양) 토기, 연화문전돌, 고래척추뼈 등이 발견돼 이곳이 가야의 왕궁터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김해시 문화재과 관계자는 "가야시대 기와와 지배층이 사용하던 차륜형 토기 등이 나왔다. 출토된 유물을 전체적으로 볼 때 서민 계층의 주거지로는 보기 어렵다. 지배층이나 왕궁 건물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는 유적지의 일부만 발굴조사를 벌인 상태다. 앞으로 추가 발굴 조사를 통해 왕궁터를 나타내는 유물이 나올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가야시대 기와는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처럼 틀에 구워낸 기와가 아니라 토기를 만드는 방식으로 빚어져 가야시대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기와 조각은 처음에는 토기로 혼돈되기도 했지만 기와로 사용하기 위해 매끄럽게 절단한 가장자리 면을 통해 기와였음을 확인했다. 가야시대 기와는 지배층의 주거지에 주로 사용한다. 전문가들은 기와를 지붕 전체가 아닌 건물의 주요 기둥에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 유적지가 왕궁터였음을 뒷받침하는 차륜형 토기(왼쪽)와 가야시대 기와.

차륜형 토기는 일상 생활용품으로 쓰이는 토기가 아니라 고분에 부장되는 '명기(明器)'다. 주로 신분이 높은 지배층의 거주지나 초대형 무덤에서 발견되는 유물이다. 연꽃이 새겨진 연화문전돌은 김해에서는 처음 나온 유물이다. 후기 가야~고려시대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요한 건물에 사용하거나 중요 유물 바닥에 깔기도 하는 돌이다. 이는 봉황동 유적지가 가야시대뿐 아니라 이후에서 중요한 시설물이 있었던 터라는 것을 나타낸다.
 
50㎝ 직경의 고래척추뼈는 봉황동 유적지 인근이 바다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고래척추뼈가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말 모양 토우는 주거지에서는 잘 발견되지 않고 제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고대에 주로 발견되는 유물이다. 이 곳에서 제사 관련 행위를 진행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한편, 봉황동 유적지는 <김해읍지> 등 관련 문헌에서 수로왕궁터로 기록한 곳이다. <김해읍지>에는 '수로왕 때의 대정궁터가 오랜 세월로 모두 무너져 흙계단 세 단만이 남아 잃어버릴까 두려워 대를 쌓고 은행나무를 심어 표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실제 봉황동 유적지에는 은행나무와 왕궁터 표지석이 남아 있어 지금까지 가야 왕궁터로 추정해 왔다.
 
봉황동 유적지 조사는 1907년 일본인 이마니시 류가 '회현리패총'을 발견한 뒤 처음 이뤄졌다. 광복 이후에는 주택 건립과 도로 공사를 위한 소규모 조사를 진행했다. 1999년 부산대 박물관이 '전(傳)금관가야궁허지' 발굴조사에서 주혈, 방형주구형 유구, 청동기시대 유물을 출토한 덕에 규모가 큰 주거지 등을 확인했다. 김해시는 2007년 유적지를 매입한 뒤 2010~2011년 왕궁터 발굴조사를 실시할 예정이었지만 국비 지원이 끊겨 어려움을 겪었다.
 
이번 발굴조사는 전체 유적지 5000㎡ 중에서 북동쪽 30%만 진행한 상태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2017년 유적지 남편 구역, 2017~2018년 서편 구역, 2018년 북편 구역을 발굴할 예정이다. 발굴조사 이후에는 왕궁을 복원할 계획이다.
 
김해뉴스 /조나리 기자 nari@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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