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극단 '연희단거리패'가 최근 창단 30주년을 맞았다. 강산이 세 번 변한 것이다. 연희단거리패는 창단 30주년을 맞아 극단의 역사가 총 정리 된 <연희단거리패 자료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연희단거리패의 역사 그 자체인 이윤택(64) 예술감독을 만나 지난 30년간의 연극 인생을 들어봤다. 인터뷰 장소는 연희단거리패가 있는 생림면 도요마을이었다.

 

▲ 이윤택 감독이 연희단거리패의 지난 30년 활동과 성과를 설명하고 있다.


연극제작 기능 잃은 밀양 이전 모색 중
‘수로왕·허왕후 제작’ 시 부탁에 김해로
창작스튜디오, 거주공간 만들어 정착

석탈해·수로왕 이야기 다뤄보고 싶어
낙동강 중심 고대가야 판타지 만들기 최적
‘시민’ 이윤택 활용하면 열심히 하고파



시인, 극작가, 연출가…. 이윤택은 다양한 장르를 섭렵한 사람이다. 그중에서 그가 가장 애지중지하는 장르는 연극이다.
 
이윤택이 연극을 처음 만난 건 중학생 시절이었다. "어릴 적부터 시를 썼습니다. 시를 쓰는 행위는 상당히 외롭습니다. 외동아들이라 외로움을 더 많이 느꼈죠.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건 연극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중학생 때부터 초등학교 아이들을 상대로 연극을 가르쳤습니다."
 
공부에는 뜻이 없었다. 고교 시절에는 '공부만 하기에는 청춘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흥사단에서 도산사상에 관한 토론을 하고, 학교 근처의 원불교당에서 밥을 얻어먹으며 지냈다. 학교 문예반, 합창단 활동도 했다. 스스로의 표현대로 '3년 동안 실컷' 놀았다. "그래도 국어는 전교 1등을 도맡아 했다"며 으스댔다.
 
이윤택이 본격적으로 연극을 시작하게 된 건 1972년 서울연극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서울연극학교 이사장이 저 유명한 극작가 유치진 선생이었다. 유치진은 "지방 학생들은 방학 때 고향에서 연극을 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그는 친구들과 단막극을 만들어 부산대학극장을 찾아갔다. 서울에서 왔다고 했더니 대관을 해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서면의 한 예식장에서 공연을 했다. 표는 안 팔렸고, '망하고' 말았다. 1973년에는 고교 동창생들과 '딜레탕트 아티스트'라는 동호회를 만들어 몰리에르의 '스가나르레'라는 큰 작품을 제작했다. '데모'가 일어나는 바람에 '왕창 망해' 버렸고, 학교를 중퇴한 뒤 군대로 도망갔다.
 
이윤택은 생계를 위해 안 해 본 일 없을 정도였다. 연극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긴 했지만, 돈이 떨어지면 일을 해야 했다. 부산우체국에서는 특수우편계에서 등기, 국제우편물 처리하는 일을 했다. 경남 마산 양덕동의 한일합섬에서는 염색기사로 일했다. "당시의 공장은 환경이 정말 열악했습니다. 밤을 세워 일했는데, 앉으면 졸린다면서 의자도 없애버렸어요. 작업반장은 공포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여자, 남자 상관없이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하루는 그 모습을 보고는 참지를 못해 작업반장을 두들겨 팼고, 직장을 그만뒀습니다. 도망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네요."
 
이윤택은 한국전력 밀양영업소로 자리를 옮겼다. 밀양의 매력에 빠지게 된 게 이 때였다. 한전은 학력 제한이 없어 고졸사원으로 들어갔는데, 대졸사원 시험을 치른 후 부산엘 가고 싶어 감천화력발전소에 지원했다. 그리고 자재과에서 두 달 정도 일을 하던 중 부산일보 기자시험에 응시했다. "당시 부산일보 왕학수 사장이 면접을 보면서 '자네는 2년제 대학을 나왔는데 왜 지원 했느냐'라고 묻는 겁니다. 알고 보니 지원자격이 '4년제 대학 졸업자 및 동등 학력 소지자'였습니다. 그런데 신입사원 모집 안내란에 실린 '학력'이라는 한자가 '지날 력(歷)'이 아니고 '힘 력(力)'으로 돼 있었습니다. 신문사가 실수를 한 것이었죠. 그 얘길 했더니 '4년제 대학과 동등한 이력이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묻기에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합격시켜 주더군요."
 
이윤택은 부산일보에서 편집부 기자로 6년 6개월 동안 일하면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신문 지면에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에 현실을 읽어내는 능력이 자연스레 생기게 됐다. 신문 편집을 끝내고 나서는 조사부에서 공부와 글쓰기를 했다. 부산일보 자료를 모두 머릿속에 담으려 한 것이었다. "연극을 위한 필요한 모든 자료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연극을 본격적으로 재개한 건 친구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는 우체국 직원 시절 '톱스타'였던 친구 하재영을 만나게 됐다. 둘은 언젠가 같이 연극을 하자고 약속했다. 그러던 중 계엄령이 선포되고, 신문이 군부의 검열을 거쳐야 하는 엄혹한 시기가 왔다. "'글쟁이가 책상 위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감이 들면서 허무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차라리 유랑극단을 만들어 광대 짓을 해야겠다 싶어 부산일보를 뛰쳐나왔습니다."
 
이윤택은 1986년 2월 부산 기장군 대변항에서 본 '동해안 별신굿'을 각색해 그해 4월 부산시민회관 대극장 무대에 올렸다. 한바탕의 굿판을 마친 뒤 극단을 창단했다. 극단 이름은 거리굿을 염두에 두고 '연희단거리패'라 지었다. 부산 광복동에 있는 부산고등기술학교 1층에 가마골소극장을 개관하고 창단기념작 '푸가'를 무대 위에 올렸다.
 
이윤택의 작품들은 실험적이라는 평을 많이 듣는다. '푸가', '문제적 인간 연산', '리어왕' 등 고전소설이나 시에서 영감을 받아 현대적으로 바꾼 작품들이 많다. "연극의 기본은 문학입니다. 저는 반성적 모더니스트예요. 1980년대엔 순수 한글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강했습니다. 모더니스트들이 반성적 입장에서 한국적인 것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굿을 연극화한 '산씻김'과 '오구'를 만들었습니다. 우리 세대의 특징은 전통을 가져오되 동시대의 예술을 현대화시키는 작업을 거쳤다는 것입니다. 이런 추세는 공교롭게도 제3세계에서 똑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1994년 2월 서울 동숭아트센터에 '우리극연구소'를 설립한 이 감독은 5년 뒤 밀양으로 가 '밀양연극촌'을 세웠다. 21세기는 빠른 변화의 시대이지만 그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마음에도 들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그때부터 '20세기 인간으로 살겠다'고 다짐하고 밀양에 정착했다. 10년이 지나자 밀양연극촌은 하나의 축제장소로 변해버렸고, 연희단거리패는 창작에 몰두하기 힘들었다. 다른 공간을 찾던 중 2009년에 도요마을을 발견했다.
 
이윤택은 김해에 정착하게 된 이유가 공간 문제보다는 김수로왕과 허왕후 때문이라고 밝혔다. 김해시에서 김수로왕과 허왕후의 이야기를 만들어달라며 밀양까지 그를 찾아갔다고 한다. 그래서 2001년 연극 '사랑의 제국-가야'를 만들었다. 사정상 공연을 못했다. 이후 3년에 걸쳐 '사랑의 제국'과 '태양의 제국'을 만들었다. 그 사이 다른 문제로 공연은 또 무산돼 버렸다. "새 시장이 당선되자 시에서 가야문화축제 기획공연을 의뢰해 왔습니다. 그런데 당시 축제 관계자가 '지역민을 위한 향토축제인데 왜 예술 공연을 하려고 하느냐'며 화를 내더군요. 그래서 손을 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야문화축제가 발전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연희단거리패는 연극제작소의 기능을 잃은 밀양을 떠나 도요마을에 창작스튜디오와 거주공간을 마련했다. 도요에서 만든 첫 연극 '방바닥 긁는 남자'는 제46회 동아연극상 작품상과 무대미술기술상, 신인연출상을 차지했다. "도요는 김해의 허파이자 연희단거리패의 심장입니다. 공장이 없는 순수 청정지역이어서 작품을 만들기에는 최적화된 장소지요. 언뜻 보면 작품공장 수준이랄 정도로 소극장 연극이 제작되고 있습니다."
 
이윤택은 김수로왕과 허왕후란 콘텐츠를 강조하는 김해시가 정작 '허왕후 신행길' 행사에 무관심한 데 대해 아쉬움을 드러냈다. "김해에서 허왕후 신행길 행사를 하는데 포스터 광고 하나 없었습니다. 부산시의 지원금을 받아 우리 힘으로 가야테마파크에 무대를 세우고 뮤지컬 '사랑의 제국'을 공연했습니다. 김수로왕과 허왕후 이야기는 전 세계적으로 흥행할 수 있는 콘텐츠입니다. 시가 관심을 가지고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이윤택은 김수로왕의 행적을 좇는 가야 스토리텔링을 구상하고 있다. 그는 석탈해와 김수로왕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석탈해는 김수로왕과 왕위쟁탈전을 벌이다 신라로 도망을 갔다고 전해집니다. 낙동강을 통해 지금의 양산으로 간 겁니다. 가야국이었던 도요마을 맞은편에는 신라 지역이었던 양산 원동이 있습니다. 도요는 신라와 가야의 국경지대인 거죠. 제가 판단하기로는 생림면은 김수로왕의 발원지이고 철기문화의 힘으로 삼계동까지 넘어갔다고 봅니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고대가야에 대한 판타지를 만들기에는 도요가 최적지입니다."
 
요즘 문화예술인들이 세운 예술커뮤니티는 오래 버티기가 힘든 실정이다. 이윤택은 연희단거리패의 운영 방식에 그 해답이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갈수록 연희단거리패의 지원자가 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택지를 줍니다. 서울에서 한 달 동안 지원자를 받고 교육을 시킨 후 김해로 가겠냐고 묻습니다. 도요에서 6개월 동안 합숙 생활을 한 후 또 같은 질문을 합니다. 남겠다는 단원들은 도요나 가마골소극장, 밀양연극촌을 오가며 일하게 됩니다." 그는 쉽게 말해 부족사회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했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21세기에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뭉치는 것이다. 연희단거리패는 무정부주의적인 문화공동체이고, 이것이 바로 대안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김해시민 7년차인 이 감독은 지역발전을 위해 언제든지 나설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제가 김해 시민인 줄을 잘 몰라요. 이윤택이라는 예술가를 마음껏 활용해도 될 텐데, 막연히 두려워하고 꺼리는 게 느껴집니다. 저는 김해에서 할 일이 없습니다. 윗선들은 자기 영역을 지키려 하고 편 가르기에만 몰두합니다. 저와 같이 할 마음이 없는 거예요. 불러만 주면 열심히 할 텐데…."
 
도요마을은 연희단거리패의 최종 정착지다. 단원 30명이 여기서 먹고 자며 연극을 만든다. 나중에는 극장과 도서관을 지을 계획이다. 집 앞에 연극 '오구'의 무대소품으로 쓰인 '오구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그는 나중에 이곳에 수목장을 하고 싶다고 했다. 집 앞에 동상 하나만 세우면 '이윤택 기념관'이 되는 거라며 껄껄 웃었다.
 
김해뉴스 /배미진 기자 bmj@gimhaenews.co.kr


▲ 극단 숙소 겸 연습공간인 도요창작스튜디오 앞에 선 이윤택 감독.

▶이윤택 /1952년 부산 출생. 경남고-서울연극학교 중퇴-한국방송통신대 졸업. 2008~2009년 동국대 연극영화학과 교수.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 가마골소극장 예술감독, 밀양연극촌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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