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성산 너럭바위에서 내려다 본 산청 풍경. 정취암에서도 전경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다.

신라 의상대사, 서광 따라 대성산에 창건
본존불로 정취관음보살 봉안 ‘국내 유일’
책·쌍거북 바위 등 자연이 만든 보물 가득

뒷편 정상은 신년 해맞이 명소로 인기
드넓은 산천이 파노라마로 펼쳐져
빼어난 비경에 한없이 서성이는 발걸음


깎아지른 기암절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암자를 본 적이 있으신지?
 
오늘은 그런 암자를 찾아가는 길이다. '절벽 위에 핀 연꽃'이라 불리는, 산청 9경 중 하나인 대성산 정취암(주지 수완 스님)이다.
 
하늘은 늦가을답게 푸르게 맑고, 차 안으로 따스한 햇볕이 들어온다. 김해를 벗어난 뒤 1시간 40여 분 정도를 달렸을까. '산 좋고 물 맑다'는 치유의 고장 산청군이다.
 
산청대로를 벗어나니 '정취암'이란 이정표가 보이는데, 덜컥 겁이 난다. 절이 산 중턱에 위치해 있는 탓에 차가 힘겨워 할 것 같아서다. 하지만 도로가 절 입구까지 매끈하게 포장돼 있어서 오르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산허리를 휘감고 돌아가는 아스팔트길 위에서 자동차 핸들을 휙휙 돌리다보니 대형버스 주차도 가능한 주차장이 보인다. 수첩과 카메라를 챙긴 뒤 기지개를 켜면서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켠다.
 
정취암 입구에 서 보니 글귀가 적힌 종이들이 돌담 곳곳에 붙어 있다. '공덕의 의미', '기도하기 전 1분 생각', '축원의 의미' 등이 적혀 있다.  아름다운 풍경과 좋은 글귀들을 보면서 마음을 편안히 하라는 수완 스님의 뜻이다. 글귀들을 읽으며 내리막길을 걷다보니 절집이 온전히 제 모습을 드러낸다. 
 

▲ 정취관음보살좌상이 안치된 정취암 원통보전 내부.

절은 절벽 바로 밑에 자리 잡고 있어서 문득 아찔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절 앞에 펼쳐진 드라마틱한 풍경이 먼 길을 달려온 객의 노고를 단숨에 씻어준다. 오히려 차를 타고 쉽게 올라왔으면서 이런 멋진 풍경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면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미안함이 생긴다.
 
정취암은 규모로 말하는 절이 아니다. 건물은 소박하다. 그러나 보물들이 있다. 정취관음보살좌상(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14호)과 산신각의 산신탱화(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43호) 그리고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자연이다. 정취암은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예배의 중심이 되는 부처인 '본존불'로 정취관음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 삼성각 뒤편에 있는 책바위.

창건설화에 따르면 신라 신문왕 6년(686)에 동해에서 부처가 솟아올라 두 줄기 서광을 발했다. 한 줄기는 금강산, 다른 한 줄기는 대성산을 비추었다. 이때 의상대사는 서광을 쫓아 금강산에 원통암을 세웠고, 대성산에 정취사를 창건했다.
 
정취관음보살이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한 시기는 '혼란' 그 자체였던 통일신라 말기였다. 신라의 고승 범일(梵日)대사가 당나라에 유학을 갔는데 귀가 잘린 한 노인이 "저는 신라 사람이고 명주현(현 강원도 양양)에 있는 덕기방이 제 고향입니다. 후일에 고국이 돌아가시거든 그곳에 제 집을 지어주십시오"라고 청했다. 범일대사는 별 생각 없이 요청을 수락했고, 깨달음을 얻어 본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꿈에 그 노인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예사롭지 않다 여긴 범일대사는 수소문 끝에 '덕기'라는 이름을 가진 젊은 과부를 찾아냈다. 범일대사는 덕기의 어린 아들로부터 "몸에서 금빛이 나는 동자가 나타나 나와 놀아 준다"는 말을 듣고는 개울가로 갔고, 개울 바닥에 있는 정취관음보살좌상을 발견했다.
 
범일대사는 좌상을 낙산사에 모셨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고려가 건국됐고 몽골이 침략해왔다. 낙산사에서는 좌상을 땅 속에 묻은 뒤 피난을 갔다. 전쟁이 끝난 뒤 경주 기림사 주지 각유 스님이 고려 공민왕 3년에 이 좌상을 정취사에 봉안했다. 이후 조선 효종 3년에 화재가 나 전각이 소실됐고, 좌상은 효종 5년에 재현됐다. 
 
정취암 원통보전에 안치돼 있는 정취관음보살좌상은 아담한 크기다. 보살은 넙데데한 네모난 얼굴인데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다. 원통보전 천장에는 시주한 사람들이 소망을 적어놓은 연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원통보전 뒤에는 삼성각이 있다. 정취암의 명물 쌍거북바위가 자리하고 있다. 거북이는 부부의 화합과 장수를 뜻하는 영물이라서 오랫동안 자식이 없는 사람들이 찾아와 기도를 한다고 한다. 삼성각 뒤편에는 산신 탱화가 있고, 그 옆에 책 모양의 바위가 있다. 책바위다. 여기에는 재미 있는 설화가 있다.
 

▲ 기암절벽에 매달린 것 같은 정취암 풍경.

매년 섣달 그믐날이 되면 대성산 여우굴에서 구미호가 나와 사람들을 죽였다. 소이마을에 살던 문가학이라는 도인이 여우 굴에 들어가 구미호를 묶은 뒤 죽이려 했다. 구미호는 자기를 살려주면 둔갑술을 가르쳐주겠다고 약속했고 문가학은 이를 받아들였다. 책바위에서 비서(秘書)를 꺼내 온 구미호는 문가학에게 둔갑술을 가르쳤고, 새벽녘에 여우 굴 안으로 도망쳤다. 문가학은 둔갑술을 완전히 익히지 못했는데도 요술을 부려 왕실의 재물창고를 드나들었고 훔친 재물로 역모를 꾀하다 참수를 당했다.
 
책바위 왼편에는 부처님의 제자들을 모신 응진전이 있다. 응진전 뒤로 난 산길을 오르니 평평한 너럭바위와 고목이 눈에 들어온다. 바위 위에 서 보니 드넓은 산천이 눈 앞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한 달 전만 해도 산들은 단풍으로 물들었다는데, 서서히 무채색으로 바뀌고 있다. 겨울이 오고 있다. 저 멀리 차가 지나온 구불구불한 산길이 내려다보인다.
 
욕심을 내 정상까지 가 보기로 한다. 땅 위에 소복하게 내려앉은 낙엽들을 밟고 걸어가는데 길이 제법 미끄럽다. 후들거리는 무릎을 부여잡고 20분쯤 올라갔을까.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외투를 벗은 뒤 차고 청량한 바람을 만끽한다. 정상은 고요하고 낙엽들이 바스락대는 소리와 새가 지저귀는 소리뿐이다. 사방의 색은 채도가 빠진 갈색과 녹색 그리고 하늘색뿐이다. 그저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는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사색을 하기에 적격이다. 그러고 보니 이 곳은 해맞이 명소이기도 하다. 매년 1월 1일이 되면 수백 명의 인파가 몰린다고 한다.
 
혼자 와서 외로울 것 같은가? '웅이'와 '망고'라는 이름의 하얀 개 두 마리가 대성산을 휘젓고 다닌다. 살가운 형제 같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달아나기는커녕 무표정한 얼굴로 자세를 고쳐 잡기까지 한다. 순하고 매력적인 개들이다.
 
정취암은 20분이면 다 둘러볼 수 있다. 하지만 절벽 아래의 청정 자연과 빼어난 절경이 발길을 한없이 부여잡는 탓에 머무는 시간은 오래 걸린다.
 
정취관음보살은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나타나 중생들을 널리 보살피고 고통을 덜어준다고 하니, 안정과 여유가 필요한 사람들은 문득 정취암으로 달려가 보시라. 

김해뉴스 /산청 대성산=배미진 기자 bmj@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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