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끔하게 복원된 분산성 성곽. 이곳에서는 발 아래로 김해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산 정상 평지 부분 둘러싼 테뫼식 산성
삼국시대 조성, 고려·조선 때 축성·개축
우물터 4개 있어 전란 때는 오래 항전

박위·정현석 부사 등 비각 모신 충의각
허왕후, 바다에 감사하며 세운 해은사
대왕전엔 현존 최고 수로왕 부부 영정

넓은 김해평야, 유장한 낙동강 발 밑에
선조 땀냄새와 넉넉한 지역모습 인상적
운 좋으면 숲 가르는 고라니 만날 수도



드넓은 김해평야와 낙동강의 유장함을 한 눈에 내려다보면서 김해의 역사를 호흡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김해의 진산인 분산에 위치한 사적 제66호 김해 분산성이다.
 
겨울이지만 한낮의 햇살이 따사롭게 느껴지던 어느 날 분산성을 향해 길을 나섰다. 북문 터에 차를 세우고 분산성 안으로 들어섰다. 흙길에 바위가 드문드문 박힌 길을 따라 걷다가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니 성곽 안이었다. 성곽은 안으로 휘어져 있었다. 왜구를 비롯한 외부의 적들이 성 안으로 침입해 올 때 최대한 진입이 어렵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성곽에 올라서니 왠지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성곽은 복원된 것으로, 바위를 촘촘하게 쌓아서 조성한 것인데, 약 900m 정도의 길이였다. 성곽은 허리띠처럼 산을 빙 두르고 있었다.
 
동행한 오순임 문화해설사는 "분산성은 산 정상의 평탄한 부분을 둘러싼 테뫼식 산성이다. 축조 기법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고려시대 때 박위 부사가 왜구를 막기 위해 축성하고,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고종 때 정현석 부사가 개축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면서 '보존지역'이라 적힌 팻말을 가리켰다. 오 해설사는 "저쪽 성벽의 색이 조금 다른 부분이 보존된 부분"이라고 부연 설명을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보존지역 부분의 벽은 유독 검었다.
 

▲ 분산성의 비밀출입구인 서암문.

성곽 위에 올라서자 김해시내가 한눈에 다 들어왔다. 그 언젠가 이 성에서 적들을 맞아 분투했을 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기자의 속내를 읽었던지 오 해설사는 "저 아래로 보이는 동광초등학교 부근이 김해읍성인데 전란이 나면 주민들이 산 정상의 분산성까지 피난을 왔다고 한다. 분산성에서는 오랫동안 항전을 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분산성 안에는 우물터가 4개 있다"고 전했다.
 
성곽을 따라 걸었다. 조금 걷다 보니 서쪽으로 암문(暗門·성곽의 후미진 곳이나 깊숙한 곳에 적이 알지 못하게 만드는 비밀 출입구)이 나왔다. 허리를 숙이고 통과하니 지금까지 따라 걸었던 성곽 밖으로 성이 한 겹 더 쌓여 있는 게 보였다. 성곽 위에서 밖으로 몸을 길게 빼보았더니 발을 딛고 선 성벽 앞으로 두 겹에서 세 겹 정도의 성이 더 쌓여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겹마다 축조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성을 새로 쌓으면서 겹이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성을 봤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분산성 탐방이다. 분산성에는 성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다.
 

▲ 축성 내력 등이 기록된 4개의 비가 보존된 충의각.

서문을 지나면 충의각이 나온다. 충의각은 외침에 대비해 분산성을 쌓은 박위와 정현석 부사의 업적을 기록한 비 각 1기, 이를 보수하도록 한 흥선대원군의 뜻을 기린 비 2기를 보전하고 있는 각이다. 세월 탓인지 비에 새겨진 글씨는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매년 10월 28일에는 충의각 추향대제라 하여 충의각에서 제가 열린다고 한다.
 
성곽 길에서 벗어나 산 한 가운데로 들어서니 절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해은사다. 허왕후가 인도에서 가야까지 무사히 오게 해준 바다의 은혜에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세운 절이다. 대왕전 안에는 수로왕과 허왕후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영정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영정에서 수로왕과 허왕후의 실제 모습을 떠올려보다 대왕전 뒤쪽으로 가니 새로 세운 파사석탑이 있었다. 
 
해은사 약수로 목을 축인 뒤 다시 성곽으로 나왔다. 완만하지만 오르막이라서 그런지 조금 숨이 찼다. 가만히 앉아서 눈을 감으니 겨울 해가 기분 좋을 만큼의 따뜻한 기운을 내뿜었다.
 

▲ 한 관람객이 해은사 영산전을 살펴보고 있다.

눈을 뜨자 김해시내가 새삼스럽게 정다웠다. 정면에 저 멀리로 보이는 임호산이 정말 드러누운 호랑이의 모습인지, 김해가 그 호랑이에게 잡아먹히지 말라고 입 부분에 세웠다는 흥부암은 어디에 있는지, 익숙한 큰 건물들을 지표로 삼아 우리 집을 찾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때 오 해설사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는 "낮의 풍경도 아름답지만 사실 분산성의 진짜 풍경을 즐기려면 해가 질 때 와야 한다. 분산성에서 바라보는 노을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허왕후는 이곳에서 노을을 보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의 노을을 아예 '왕후의 노을'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옷을 든든하게 입고 연인끼리, 친구끼리 해질 때 맞춰 와 꼭 한 번 보길 권한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 해은사에 새로 세운 파사석탑.

다시 성의 남쪽으로 향했다. 흥선대원군의 친필과 낙관이 찍혀 있는 바위를 보기 위해서였다. 이 바위에는 분산성의 또 다른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바로 '만장대(萬丈臺)'다. 만장대란 '왜구의 침입을 막은 만 길의 높은 대'라는 의미로 흥선대원군이 내린 칭호다. 김해 토박이들에겐 분산성이라는 이름보다 만장대가 더 친숙하기도 하다. 명필로 통했던 흥선대원군의 친필답게 글씨체가 힘 있고 단정했다.
 
봉수대로 향했다. 돌계단을 잠시 오르자 복원된 봉수대가 반겼다. 오 해설사는 "분산성 봉수대는 가덕도에서 강서 녹산으로 이어진 봉화를 받아 진영 자암산, 경주로 연결해 주는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봉수대 옆에는 추운 날씨에도 잎눈을 틔운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오 해설사는 팽나무라고 말했다. 팽나무는 딱총에 열매를 끼워 총알처럼 쏘면 팽하고 날아간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홀로 봉수대를 찾았다 하더라도 이 팽나무와 함께라면 외롭지 않을 듯했다.
 
봉수대에서 내려와 동문으로 향했다. 동문에서는 무너진 성벽 보수 공사가 한창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안고 동문을 지나 출발점인 북문 터로 돌아왔다. 분산성을 한 바퀴 다 둘러본 셈이었다.
 
하산해서 시내로 돌아와 분산성을 올려다보았더니 황토색 성곽이 머리띠를 두른 듯한 모습으로 의연하게 서 있었다. 김해시민이라면 한번쯤 일삼아 분산성에 올라 김해를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선조들의 땀 냄새와 김해의 넉넉한 모습을 더불어 감상해 볼 일이란 생각을 했다. 운이 좋으면 숲을 가로지르는 고라니를 만날 수도 있다는 데, 그것은 덤.
 
전은영 프리랜서


▶분산성 가는 길 /김해시 가야로405번 안길 210-162. 경전철 인제대역에서 가야테마파크 셔틀버스에 탑승해 가야테마파크에서 하차. 이후 도보로 20분.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인제대를 지나 천문대 방향으로 20분.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