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황대에서 바라다 본 김해 구시가지 전경과 분산.


금관가야 사람들 살던 생활유적지
“날개 펼친 봉황”이라 이름 붙여져

입구에 수령 400년 은행나무 인상적
다양한 유물 출토 패총전시관도 흥미

황세장군·여의낭자 전설 얽힌 여의각
정상에서 내려다 본 시내 깊은 감동



봉황동 253외 일원에 '김해봉황동유적'이 있다. 청동기시대의 무덤과 삼한시대~삼국시대의 생활유적이 혼재된 복합유적이다.
 
유적으로 향하면서 회현동 13통을 먼저 들렀다. 누가 벗어놓은 것일까. 담장에 신발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벽화였다. 다양한 내용의 벽화들이 오래된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어주고 있었다. 페인트칠이 아직도 선명했다. 골목을 둘러본 뒤 회현동주민센터를 지나자 펜스로 둘러싸인 발굴 현장이 나왔다. 가야시대 왕궁 터로 추정되는 현장이었다.
 
벌써부터 현대의 페인트 벽화와 가야시대의 왕궁 이야기가 공존하는 데서 오는 느낌이 독특했다.
 

▲ 봉황대 정상에 서 있는 '가락국천제단'.

왕궁 터 발굴 현장 한 가운데에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펜스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 볼 수는 없었지만, 멀리서 봐도 그 둘레는 성인이 안기 힘들 정도로 두꺼웠다. 동행한 이란 문화해설사는 "조선시대 숙종 때 허재라는 분이 '여기가 가야시대 왕궁 터였음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수령은 약 400여 년 정도일 터.
 
은행나무의 잔상을 지닌 채 봉황동유적 초입에 섰다. 이 유적은 원래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87호였는데, 2001년 2월 5일에 해제되면서 회현리 패총과 함께 사적 제2호로 통합됐다. 이 해설사는 "사적 제2호는 그만큼 빨리 발굴되었다는 뜻이다. 회현리 패총은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를 찾던 일본인들이 1907년에 발견했다"면서 "그 후 1920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됐다"고 전했다.
 
봉황대로 난 돌계단 대신 왼쪽으로 난 길을 먼저 찾았다. 패총전시관이 있는 곳. 이 해설사는 "패총은 이곳이 바다였음을 말해주는 지표다. 정확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확신할 순 없지만 지금의 김해시청과 김해평야는 오래 전에 바다였다고 한다"고 말했다.
 

▲ 여의낭자의 영정을 모신 '여의각'.
▲ 여의각 뒤에 있는 '여의낭자의령단'.

패총전시관에 들어서자 두꺼운 유리벽 뒤로 높이가 약 8m에 이르는 조개무덤이 우리를 반겼다. 이 무덤에는 조개껍질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곳곳에 동물뼈와 토기의 잔재가 남아있었다. 조개의 칼슘 성분이 보존제 역할을 한 덕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패총에서는 여러가지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회현리 패총에서 처음 확인된 토기 중에는 아예 '김해토기'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있다.
 
패총에서 나온 사슴의 어깨뼈 '복골'은 꼬챙이를 달궈 뼈에 구멍을 내 점을 치는 도구로 사용됐다. 이 해설사는 "사람들은 흔히 큰 일을 앞뒀을 때 점을 보곤 한다. 당시의 큰 일이라는 건 아마도 장거리 무역이 아니었을까 싶다. 먼 바다로 나갈 때 탈이 있을지 없을지를 알고 싶어 복골 점을 보지 않았을까 한다"라면서 "그건 또 당시에 장거리 운항술과 건조술이 있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 ‘하늘문’.

문득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더니 청동기 유구 자리가 남아 있었다. 이 해설사는 "패총을 처음 발굴한 일본사람들은 '김해에는 청동기시대 유물이 없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저 유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김해에는 청동기시대의 흔적이 있다"고 설명했다.
 
패총전시관을 나와 당산으로도 불리는 봉황대로 향했다. 이 곳은 나무들 사이를 걸으며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기에 좋은 곳이다. 산책을 하는 주민들이 더러 눈에 띄었다.
 
봉황대는 금관가야시대 사람들의 생활유적지다. 이 이름은 조선 고종 때 정현석 부사가 서쪽의 구릉이 봉황이 날개를 펼친 모양과 같다 해서 붙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 해설사는 "구릉의 생김새도 생김새지만 여기에는 정 부사의 마음도 담겨있으리라 본다. 봉황은 나라에 성군이 들고 태평성대하면 날아드는 상상의 새다. 봉황은 오동나무에 둥지를 틀고 대나무만 먹는다는 설이 있다. 정현석 부사는 태평성대를 바라는 마음으로 대나무와 오동나무를 심고 봉황대라 이름 짓지 않았을까 한다"며 대나무들을 가리켰다. 이 해설사의 말마따나 봉황대를 걷는 동안 심심치 않게 대나무와 오동나무들을 만날 수 있었다.
 
걷다 보니 누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여의각이었다. 봉황대에는 황세장군과 여의낭자의 설화가 남아 있었다. 설화에 따르면 황세장군과 여의낭자는 서로 사랑했는데, 장군이 왕의 부마가 되어버렸다. 여의낭자는 장군을 그리다가 죽었고, 그 혼을 위로하는 곳이 이 누각이었다.
 
사랑하는 이를 다른 사람에게 보내야했던 한 여인의 아픔을 느끼면서 계속 숲 속 샛길로 걸어 들어갔더니, 차례대로 여의낭자의 혼이 들어갔다는 하늘문 바위, 황세장군이 오줌을 누었다는 황세바위가 나왔다.
 

▲ 황세장군과 여의낭자의 전설이 서린 ‘황세바위’.

이런 저런 사정을 감안해 음력 5월 5일이 되면 회현동 주민들이 여의낭자의 넋을 달래기 위해 제를 지내기도 한다.
 
봉황대의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있는 회현동의 전경이 나타났다. 골목 사이사이에서 움직이는 주민들도 눈에 들어왔다. 몸을 뒤로 돌렸더니 이번에는 정면으로 임호산과 내외동이 한 눈에 들어왔다. 봉황대는 낮지만 높은 산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해설사는 정상 가운데에 놓인 '드무' 혹은 '확'을 가리켰다. 방화수가 담겨 있었다. 그는 "방화수라고 하면 어떤 분들은 안의 물을 떠서 화재를 진압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데 그렇지 않다. 화마가 지나가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 도망가라고 곳곳에 설치해둔 것"이라고 설명했다.
 
봉황대를 내려와 올라올 때의 반대편으로 향했다. 망루 보수 공사가 한창이었다. 망루를 지나니 역시 보수 중인 고상가옥이 눈에 띄었다. 집토기모양을 재현한 것이었다.

그 옆에는 이 일대가 항구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바다와 배 모형이 재현돼 있었다. 이 해설사는 "김해도서관 주변에서 배를 대는 접안시설이 발굴됐다. 그 위치에 재현하기가 힘들어 봉황대 뒤쪽에 배를 만들어둔 것 같다"면서 "이 항구 유적 역시 패총과 함께 이곳이 바다였음을 알려주는 지표"라고 말했다.
 
그대, 김해의 옛 이야기가 듣고 싶은가. 그렇다면 봉황동유적을 찾아가 보자. 봉황대는 봄엔 흐드러진 벚꽃, 가을엔 수북한 낙엽으로 저마다 다른 풍경을 보여주고 있으니 데이트코스로도 안성맞춤이다. 김해뉴스

전은영 프리랜서


▶봉황대 가는 길 /부원동사거리에서 걸어서 10분. 8, 21, 21-1번 버스 타고 김해도서관정류장 하차 후 걸어서 5분. 경전철 수로왕릉역에서 걸어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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