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제봉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해금강 풍경. 십자동굴(왼쪽) 옆에 사자바위가 도도하게 버티고 서 있다.

소년·소녀 3천명과 서불의 설화 어려
전망대 가는 길목 빨간색 꽃망울 활짝
푹신한 낙엽 밟으며 듣는 파도소리 환상

산행 후 눈 앞에 펼쳐지는 바다 풍경
십자동굴, 대·소병대도 한눈에 조망
흐린 날씨 어우러져 한폭의 수묵화 같아


"신선이 산다는 한반도의 섬에 가서 불로장생의 약초를 구해오라!"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영원히 죽지 않는 삶을 꿈꾸었다. 그는 서불이란 신하에게 소년, 소녀 3000명과 보물을 실은 배를 줘 영생을 보장하는 신비의 영약을 찾아오라고 지시했다. 서불이 도착한 곳은 한반도 끝에 있는 거제도 해금강이었다. 그는 소년, 소녀들의 순수한 영혼을 잘 활용하면 불로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건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불로초는 찾지 못하고 해금강의 정취에 반한 서불은 우제봉 정상의 석벽에 '서불과차(徐市過此)'란 글자를 새긴 후 다시 남해로 떠났다고 전해진다.
 
김해에서 서불의 전설이 서린 거제도 남부면 갈곶리 우제봉을 찾아가자면 차로 두 시간 가까이가 걸린다. 일단 김해에서 거제도 시내까지는 약 1시간이 소요된다. 통행료가 비싸긴 하지만 거가대교 위에서 시원한 풍경을 즐기다 보면 눈 깜짝할 사이에 거제다. 우제봉은 시내에서 동쪽 방향으로 50분 정도를 더 들어가야 만날 수 있다. 장승포를 지나는 동안에는 '2003년 경남 건축대상'을 받은 거제문화예술회관이 보인다. 일운면 와현마을로 들어서자 마침내 바다가 제 모습을 드러냈다.
 

▲ 전망대로 오르는 나무 데크.

거제도는 아픈 역사를 간직한 섬이다. 거제에서는 물고기가 많이 잡혔고, 그 때문에 고려 때부터 왜구의 침략이 빈번했다. 해안가의 주민들은 수시로 고성, 거창으로 피란을 갔다. 무려 500여년을 그렇게 살 수 없는 환경에서 살았다. 그러다  세종대왕이 집권한 후부터 주민들이 안정을 찾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는 장승포에 일본인들의 어촌마을이 있었다. 나라 잃고 힘이 없었던 거제 주민들은 일본인들 밑에서 품삯을 받고 일을 했다.
 
차의 창문을 조금 열어본다. 바닷바람이 상쾌하다. 어깨가 쭉 펴진다. 망치마을에서는 해안을 따라 펜션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거제에서 펜션이 가장 많은 마을이란 말이 거짓이 아니다. 구불구불 해안선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해안도로도 장관이다. 1960년대에 한국을 방문한 에티오피아 대통령이 이 길을 지나며 극찬을 했다는 말도 있다.

▲ 동백꽃 한송이가 땅에 떨어져 있다.

우제봉 전망대 주차장에 도착하니 하늘이 먹구름을 머금은 채 잔뜩 찌푸려 있다. 전망대 입구에서 굴을 까던 횟집 아주머니가 "우제봉 꼭 구경하고 가세요~ 좋아요"라며 반겨준다.
 
우제봉 전망대는 해발 107m이다. 동백나무 숲길 산책로를 걸어야 한다. 파란색 돌길을 따라 걷는데 이내 푹신한 흙길이 나온다. 3분 쯤 발걸음을 옮겼을까. 서자암이란 이정표가 눈에 띈다. 마침 이른 점심시간이다. 절에서 공양을 하기로 하고 암자로 향한다. 서자암은 민가인가 싶을 정도로 자그마한 곳이다. 하지만 비경 해금강을 앞마당으로 둔 암자여서 반드시 찾아가 보길 권한다. 마당에는 동백꽃이 탐스럽게 피어 있다. 주머니에서 1000원 짜리 지폐를 꺼내 들고 불상 앞에 서서 삼배를 올렸다. "부처님, 우제봉에 다녀올 동안 비가 오지 않게 해 주세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절밥을 맛있게 싹싹 비우고 나서 다시 동백나무 숲길로 향한다. 소나무, 후박나무 등 100여 종의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하늘을 가리고 있다. 제법 어둑어둑하다. 마치 산신이 숨겨놓은 보물을 찾아 비밀통로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무채색 숲길에 떨어져 있는 빨간 동백꽃을 보고 발길을 멈춘다. 생각지도 않은 고운 손님의 등장에 기분이 좋아진다. 동백나무를 자세히 살펴보니 평소에 보던 키 작은 동백나무가 아니다. 높게 뻗은 다른 나무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이 곳 동백나무도 한껏 자신의 키를 높인 모양새다.
 
숲길은 낙엽과 솔잎이 켜켜이 쌓여 있어서 푹신하다. 숲길 너머로 들려오는 시원한 파도소리는 금상첨화다. 

▲ 전망대로 이어지는 동백나무 숲길.

20분 정도 더 걸어가자 잘 정비된 나무데크 길이 여행객을 반긴다. 허벅지의 근육이 당겨오는 듯한 느낌이 들 때쯤 자연이 만들고 세월이 조각한 돌계단이 나온다. 밟기 편한 돌을 골라 올라가다 보니 느닷없이 거제의 보석이라는 해금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우제봉 전망대다. 내려다 보니 열십(十)자 모양을 한 십자동굴과 사자바위가 바로 눈 앞에 있다. 남쪽으로는 외도가, 동쪽으로는 대·소병대도가 도도하게 떠 있다.
 
바다는 흐릿한 날씨와 어우러져 먹칠을 잘한 수묵화 같은 느낌을 선사한다. 숨을 크게 내쉬어 본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폐를 깨끗이 씻어낸다. 이런 느낌을 '상쾌하다'라고 표현하면 너무 진부하고 가벼운 것인가.
 
비가 올까 싶어 서둘렀던 마음은 '까짓것 비 좀 맞으면 어때'로 변한다. 쉴 새 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한편으로 해금강의 풍경을 눈과 가슴에 담는다. 전망대 주위에 서 있는 나무들은 거센 해풍에 서로를 부딪쳐가며 추위를 이겨내고 있다.
 
서불이 우제봉 석벽에 새겼다는 '서불과차'란 글씨는 오래 전의 태풍 때문에 유실됐다고 한다. 불로초를 찾아 우제봉을 누볐을 어린 소년, 소녀들의 모습을 그려본다. 몇몇은 험한 돌길을 걷다 발을 헛디뎌 바다에 추락했을지도 모르겠다. 진시황의 헛된 욕망이 안쓰럽다.
 
내려갈 때는 올라올 때와 반대쪽을 고른다. 꽃과 나무와 바다의 길이다. 바람에 날려 떨어진 동백꽃은 여전히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다. 키 큰 동백나무들은 그런 동백꽃을 무심히 바라보고만 있다. 바다는 잔잔한 물결을 일렁이며 나무와 꽃의 표정을 조심스레 살피고 있다.
 
우제봉에서 내려오자 마침내 억수같은 비가 쏟아진다. 간절히 바라면 이뤄진다는 '피그말리온 효과'인가. 일상의 스트레스를 하염없이 내리는 겨울비가 말끔히 씻어주고 있다. 감사한 마음이 드는 하루다.

김해뉴스 /거제=배미진 기자 bmj@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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