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김해의 문화재'를 시작한다. 김해에는 70개가 넘는 문화재가 있다. 이들이 어떤 설화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이를 통해 김해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시민들의 자긍심을 높이자는 취지에서다.
 

▲ 문무인석과 마양호 석상이 김수로왕릉을 지키고 있다.

 

 입구 숭화문 들어갈 땐 동문 이용 원칙
‘왕의 영혼길’ 홍살문은 좌우로만 다녀야

 납릉 무덤 둘러싸고 갖가지 전설 전해져
 표준영정 모신 숭정각에선 매달 분향례

 숭선전 수로왕·허왕후 벽화 당시 모습 생생
 숭안전엔 가야 2~9대 왕·왕비 위패 보관
 왕릉 보호 ‘능림’ 잔존 고인돌 2기 이색적



"가락의 아홉 간(干)이 백성들을 이끌고 물가에서 목욕재계하고, 구지봉을 바라보니 이상한 기운과 함께 공중에서 소리가 들렸다. 이에 가서 보니 금색의 알 여섯 개가 있어 해처럼 둥글었다."
 
하늘에서 여섯 개의 알이 내려왔다. 그 중 가장 먼저 알을 깨고 나온 사람이 수로(首露), 즉 금관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이다. 김수로왕의 탄생 과정과 6가야의 생성 배경을 다룬 이 내용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와 있다.
 
학자들은 이 기록을 통해 가야가 연합국가 체제를 이뤘으며, 그 중 김수로왕의 금관가야가 가장 세력이 컸다고 이해한다. 김수로왕의 흔적은  가락로 93번길 26(서상동 312번지)에 있는 '수로왕릉'에서 만나볼 수 있다. 워낙 유명한 곳이지만, 사실 왕릉 안의 유물 등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일반인들은 볼 수 없는 유물들도 다수 있다.
 
수로왕릉은 다른 왕릉과 마찬가지로 '동입서출(東入西出·동문으로 들어가 서문으로 나온다)'을 원칙으로 한다. 숭화문 앞에서 동문을 통과한다.  악귀 축출의 상징물인 '홍살문'이 먼저 보인다. 홍살문 사이의 중간 길은 신도(神道)이다. 왕의 영혼이 지나다니는 길이라서 방문객들은 홍살문 좌우의 길을 이용해야 한다.
 
홍살문을 지나 안으로 더 들어가면 정면으로 높이 5m의 거대한 왕릉이 보인다. 왕릉 앞에는 정사각형 돌로 된 성생대(省牲臺)가 있다. 3월 15일, 9월 15일 석전대제가 열리기 전날 제사상에 올릴 돼지를 검사하는 곳이다. 지금도 제례 전날이 되면 참봉과 장생들이 제물인 돼지를 가져와 흠이 없는지를 살펴본다. 이를 성생례라 한다.
 
능침 정문에는 김수로왕과 허왕후에 얽힌 흔적이 남아 있다. 정문에는 파사석탑을 중심으로 물고기 두 마리가 양 쪽에 그려져 있다. 강정옥 문화관광해설사는 "인도에서는 물고기를 신처럼 여긴다. 지금도 인도에는 쌍어문양이 많다고 한다. 허왕후릉에 있는 파사석탑 역시 인도에서만 나는 돌이다. 인도 공주 허황옥과 수로왕의 국제결혼을 입증하는 자료"라고 설명했다.
 
원래 수로왕릉에는 납릉(納陵)이라 불리는 수로왕의 무덤만 있었다. 그러다 조선시대 말부터 전각이 하나 둘 세워졌고, 지금 같은 궁궐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무덤 앞에는 문신과 무신을 나타내는 문무인석 4개가 서 있다. 말·양·호랑이를 조각한 동물석상도 배치돼 있다. 오래 전에는 동네 아이들이 동물석상을 타고 놀았다고 한다.
 
납릉은 일본인들에 의해 도굴된 적이 있다고 한다. 조선 광해군 때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1614년)에는 "임진왜란 때 왜적이 수로왕릉을 파헤쳤다. 무덤 안이 매우 넓었다. 큰 대야만한 두골이 있었으며, 손발의 경골도 몹시 거대했다. 시신 옆에는 두 여자의 시체가 있었다. 얼굴이 살아 있는 것과 같았다. 나이는 20세 정도였다. 무덤 안에서 꺼내어 바깥에 두니 곧바로 소멸하고 말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두 여자'는 순장된 경우일 것으로 추정된다.
 
<죽암행장>에는 "임진왜란 당시 왜적이 수로왕의 능을 파헤치자, 죽암 허경윤 선생이 김해로 달려가 무덤의 봉분을 완성하고 왕릉에 나무를 심어 이를 보호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 숭정각 전경과 내부에 있는 수로왕·허왕후 표준영정.

납릉 옆 숭정각(崇幀閣)에는 수로왕과 허왕후의 표준 영정이 있다. 현대에 그린 것이다. 이곳에서는 매달 분향례를 드린다. 수로왕은 붉은 색, 허왕후는 푸른 색의 의복을 입고 있다. 왕과 왕비는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하다. 수로왕의 수염도 흰색이다. 납릉 관계자는 "이 영정이 표준 영정으로 사용되고 있긴 하지만, 사실 분산 해은사에 있는 영정이 실제 모습에 더 가까울 것이란 말이 있다"고 말했다. 사실 숭정각의 영정은 해은사의 영정을 토대로 한 것이다.
 
숭선전(崇善殿)은 1889년 고종 때 김해부사였던 허전 선생이 '수로왕과 허왕후의 신위를 모시는 재실당호를 숭선전으로 정해 달라'고 고종에게 진언을 올린 뒤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는 현재 '8전'이 있다. 모두 나라를 세운 시조왕을 모시는 전이다. 그런데 전국 8전 중 왕과 왕비의 신위가 함께 있는 곳은 숭선전이 유일하다. 숭선전은 3월 15일 춘향대제, 9월 15일 추향대제 때에만 문을 연다. 취재를 위해 잠시 숭선전 문을 열던 수로왕릉 사무국 김준호 부장은 입구에 서서  "할아버지, 할머니. 인사드립니다"라며 짧게 예를 갖췄다.
 
숭선전에는 수로왕과 허왕후의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다. 벽면의 그림을 보니 허왕후가 배를 타고 거친 파도를 거치며 아유타국에서 가락국으로 건너오던 당시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김준호 부장은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아주 가치가 있는 그림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숭선전에서 우측으로 들어가면 1990년에 신축한 숭안전(崇安殿)이 있다. 금관가야에는 총 열 분의 왕이 있었다고 한다. 수로왕릉과 허왕후릉은 온전히 남아 있지만, 2대 도왕부터 9대 숙왕까지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 숭안전 전경과 가야 2~9대 왕·왕비의 위패를 모신 방.

숭안전은 2~9대 여덟 왕과 왕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숭안전도 숭선전과 마찬가지로 제례를 지낼 때에만 문을 연다. 숭안전 내부에는 조그마한 8채의 집이 있다. 각 집에는 여덟 왕과 왕후의 위패가 놓여 있다.
 
마지막 왕인 10대 구형왕의 무덤은 경남 산청에 있다. 구형왕의 능은 돌무덤이다. 신라에 투항한 구형왕은 "나라를 지키지 못한 죄인이니 돌로 내 가슴을 눌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왕릉 한켠에는 제기를 보관하는 건물과 음식을 만들 때 사용하는 건물도 있다.
 
제사의 중요성과 왕릉의 신성함에 대한 기록은 과거 문헌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 성종 때 노사신 등이 각 도의 지리, 풍속 등을 기록한 <동국여지승람>(1481)에는 '신라 말 장군 충지의 부하 영규라고 하는 자가 수로왕릉에 제사를 올리지 못하게 했다가 갑자기 들보가 부러지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부하의 죽음을 본 장군 충지가 두려운 마음에 수로왕의 초상화를 그려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올리자 초상화에서 피눈물이 흘렀다고도 전한다. 한 도둑떼가 능 안에 금은보화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무덤을 파헤치려 하자 갑옷을 입은 무사가 무덤 안에서 나와 몰아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며칠 후 도둑이 다시 찾아오자 길이가 삼십여 척(약 9m)이나 되는 구렁이가 이 도둑을 물어 죽였다고도 전한다.

▲ 수로왕릉 사무실에 백범 김구의 흑백사진과 친필문서가 걸려 있다.

이외에도 수로왕릉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보물들이 있다. 숭선전을 지키는 참봉의 사무실에는 백범 김구 선생의 흑백 사진과 친필 문서가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28년째인 1947년 김구 선생이 수로왕릉을 방문했다. 흑백 사진 속의 김구 선생은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중 한 직책을 맡아 왕릉에 제례를 드리고 있다.
 
수로왕릉을 보호하는 숲인 능림(陵林)은 왕릉을 찾는 시민, 관광객 들의 작은 공원 구실을 하고 있다. 이곳에는 조선 후기의 '김해부내지도'에도 나타나는 고인돌 중 2기가 남아 있다. 원래 김해에는 7기의 고인돌이 있었는데, 합성초등학교와 김해교회가 생기면서 4기가 없어졌다. 능림의 고인돌은 나머지 3기 중 2기이다.
 
김해시 문화재과 김선필 주무관은 "수로왕릉은 김해의 뿌리다. 매일 1500~2000명의 시민, 관광객 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날씨가 좋은 봄, 가을에는 하루에 5000명도 다녀간다"고 전했다.
 
김해뉴스 /조나리 기자 nari@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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