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어산에 있는 은하사 전경. 허황옥의 오빠 장유화상의 창건설화가 전하는 사찰이다.


일연스님 <삼국유사> ‘남방불교 전래설’
대다수 역사학자 “고고 자료 없다” 부정

3·1운동 용성스님 “초전법륜 성지 복원”
허명철 이사장 등 역사 고증 위해 안간힘

최근 ‘법등회’ 소속 승려들 뿌리 찾기 합심
김해의 가야불교 천착 근원 찾기 노력
결정적 증거보다 시민 관심 제고 더 필요



일제강점기 때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인 용성스님(1864~1940)은 "가야의 초전법륜(처음 불교가 전래된 지역) 폐허성지를 잘 가꾸라"는 유훈을 남겼다. 그는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곳이 가야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의 제자격인 정토회의 법륜스님은 현재 용성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가야정사' 설립에 매진하고 있다.  
 
고려시대 인물인 일연스님(1206∼1289)도 <삼국유사>가 편찬되기 전인 통일신라 때부터 김해 지역 사람들은 하나의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에서 건너왔고, 그의 오빠 장유화상이 가락국(금관가야)에 불교를 전파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남방불교 전래설'로서, '가야불교'의 연원은 여기에서 유래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일들은 '역사'라기 보다 '신화'로 치부되는 경향이 강하다. 상당수의 역사학자들은 <삼국유사>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불교적 관점에서 한국 고대사를 다룬 측면이 강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따라서 불교와 관련된 부분은 윤색이 많이 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그 근거로 남방불교 전래설을 입증할만한 고고학적 유물이 발견된 사례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이들은 2000년 전에 이미 김해가 국제도시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이영식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는 가야를 '철의 왕국'이자 '해상왕국'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기원 전후부터 3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가야가 주 산품이었던 철을 매개로 일본, 중국 등과 활발하게 해상교류를 했다는 증거는 많이 남아 있다. 중국의 <삼국지 위지동이전> 같은 정통 사서에 그런 사실인 언급되어 있고, 김해를 비롯한 남해안 일대에서 중국 화폐와 덩이쇠 등이 발굴되고 있다.

▲ 은하사 대웅전에서 한 신도가 절하고 있다. 장유화상 사리탑이 있는 장유사. 수로왕릉 정문에 그려진 신어상.(사진 왼쪽부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과 장유화상이 해상루트를 이용해 가야로 왔다는 사실에는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반면, 다른 쪽에서는 '가야불교'를 '생각의 전승'이란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가야불교는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 그 존재가 1000년 이상 수많은 후세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돼 있으므로, 이러한 현상 자체가 하나의 역사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부산대 역사교육과 백승충 교수는 "무슨 일이든 오랜 시간 지역의 설화로 이어져 내려왔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가야에서 남방불교가 태동했다 아니다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지역불교'에 대한 관심은 소중한 것"이라고 말했다. 불교사에 천착해 온 조원영 합천박물관 관장도 "설화는 그 자체로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가야의 경우 험난한 이력 탓에 자료와 흔적을 남기기가 쉽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하고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우선 가야는 신라 등과 전쟁을 자주 치렀고, 마침내 신라에 복속됨으로써 실체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고려 말에는 왜구의 잦은 노략질에 시달렸고, 조선 중기에는 임진왜란, 현대에는 한국전쟁의 낙동강 전투 등으로 과거의 흔적을 보존하기 어려웠다.

경남·부산의 경우 '삼보사찰(三寶寺刹)'인 양산 통도사와 합천 해인사, 부산 범어사 그리고 밀양 표충사 등이 수많은 국보급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반면, 김해 지역의 고찰들에는 그런 유물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바로 이런 역사에서 연유한다.

▲ 인도에서 전래된 것으로 알려진 파사석탑. 조선말 호계사에서 허왕후릉으로 옮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불교에 대한 믿음을 늘 반추시켜 주는 유물들이 일부 있으니, 수로왕릉의 '신어상(쌍어문)'과 '태양문', 과거 호계사에서 지금은 허왕후릉 인근으로 옮겨진 '파사석탑' 등이 그것이다.
 
그동안 김해에서는 '설화'를 '역사'로 증명하려는 노력이 있어 왔다. 
 
1970년대부터 재야사학자로서 김해 가야문화연구회의 설립을 주도했던 조은금강병원 허명철 이사장은 이미 30년 전에 <가야불교의 고찰>이란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그는 서문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산과 들을 헤매고 깨어진 기와 한 조각에도 감격하여 탄성을 지르고 돌아와 앉은 자리에서 새벽까지 깨어 있기도 했다. 그 어느 때나 늘 안타까웠다. 엄연히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었던 오백년간의 가락국 문화가 어떠했는지 제대로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후 김해의 대표적 고찰인 은하사의 대성 큰스님이 신어산 인근의 불교흔적과 지역의 지명변천에 천착하며 가야불교의 뿌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최근에는 '법등회' 소속인 여여정사, 바라밀선원, 장유사, 경운사, 정암사, 불인사 등의 스님들이 가야불교를 계승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다. 
 
<김해뉴스>는 이런 분위기에 발맞춰 허황옥과 장유화상에 얽힌 가야불교의 흔적과 궤적을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한다. 가야불교에 대한 김해 사람들의 인식의 근원을 찾아가 보려 한다. 우리는 이 여정에서 가야불교의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가능성도 현재로서는 높은 실정이다.
 
하지만, 이 여정을 통해 김해사람들이 지역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가야불교에 대한 관심을 제고할 수 있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다행스런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부분에서 20세기 중후반 역사학계의 새 조류인 '아날학파'를 태동시킨 프랑스의 역사가 마르크 블로크의 말을 들어본다. "역사란 시계 제조업도 고급가구 세공업도 아니다. 그것은 더 나은 이해를 향해 가는 노력이다. 따라서 그것은 움직이는 그 무엇이다."(<역사를 위한 변명>에서) 독자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기대한다.
 
김해뉴스 /심재훈 기자 cyclo@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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