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전 수로왕대제 진상 오른 천곡 샘물
이젠 마을 식수 ‘앞새미실’에도 쓰레기만
물·공기 오염 탓 단감 품질 예전만 못해
영세 선박기자재 관련업체 연이어 도산
좁은 도로 대형차 접촉사고 끊이지 않아
논 판 주민들은 공장 임대료 받아 생활
“소음·매연 다 포기… 이대로 살다 죽어야”
김해시청 앞에서 자동차를 타고 호계로와 동서대로, 서부로를 15분 정도 달리다 보면 주촌면 천곡리 천곡마을이 나온다. 천곡마을 입구에는 500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천곡리 이팝나무(천연기념물 제307호)'가 서 있다. 높이 17.2m, 둘레 6.9m. 이 나무는 매년 5월이 되면 쌀밥처럼 하얀 꽃을 피워서 봄이 왔음을 알린다. 천곡마을 주민들은 그때 이 나무 앞에서 풍년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뜻에서 고유제를 올린다.
하지만 주민들의 바람과 달리 천곡리 천곡·연지·용덕마을 등 3개 마을은 전혀 안녕하지 못하다. 포악한 난개발 때문이다.
천곡(泉谷) 마을은 한자의 뜻이 말해주듯 샘으로 유명했다. 주촌면의 주민들이 이곳을 '샘실'이라 불렀을 정도로 마을 입구의 '앞새미'와 학봉산 끝자락의 '뒷새미'에서는 매일 물이 넘쳐흘렀다. 마을 아낙네들은 앞새미 옆에서 물을 퍼다 빨래를 했고, 샘물이 좋아 30년 전에는 천곡마을에서 생산되던 술이 김수로왕 대제의 진상에 올랐다. 마을주민 박 모(75·여) 씨는 "천곡마을은 흙이 가지고 있는 수분이 많아 산자락 어디를 파도 물이 샘솟았다"며 옛 마을의 모습을 회상했다.
샘이 솟았던 양질의 토양은 15년 전부터 마을주민들이 하나 둘 논농사를 포기하고 외지로 나가면서 콘크리트 아래에 묻혀버렸다. 천곡마을은 마을 앞 도로 서부로 1638번 길을 사이에 두고 공장들과 마주하고 있다. 천곡마을 한동희(71) 이장은 "마을주민들의 식수였던 앞새미실은 이제 공장에 파묻혀서 찾아보기도 힘들다"며 앞새미실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마을 입구에서 5분을 걸어 한 공장 앞 말라버린 나뭇가지를 걷어내자 우물 모양의 앞새미실이 나타났다. 인근에는 스티로폼, 병 등 각종 쓰레기가 버려져 있었고 그 사이에서 앞새미실은 여전히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한 이장은 "지금 밟고 있는 콘크리트 바닥이 예전에는 빨래터였다. 공장이 들어서고 물을 먹지 못하게 되자 지하수를 다시 팠다. 주민들은 이제 다른 물을 먹고 있다"고 말했다.
공장이 빼앗은 건 맑은 물뿐만이 아니었다. 마을주민들은 천곡리 산 일대에서 단감농사를 지어왔다. 늘어나는 공장들은 맛 좋은 단감의 품질까지 바꿔버렸다. 주민 김 모(69·여) 씨는 "공기, 물이 오염되니 이를 양분으로 먹고 사는 나무도 시들해졌다. 요즘은 단감 농사가 옛날같지 않다. 수확량도 맛도 모두 좋지 않다"고 말했다. 한 이장은 "공장이 들어선 곳은 예전에 모두 논, 밭이었다. 농사지어서는 돈이 안 되니 논을 팔고 용도변경을 해서 공장이 생겨났다. 논을 팔아 공장을 지은 주민들은 공장 임대를 하고, 임대료를 받아 생활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천곡마을 일대 공장들은 대부분 10인 이하의 영세업체다. A업체 관계자는 "여기 앞 공장은 사장 혼자서 일하고 납품한다. 10명 안팎의 직원을 고용해 공장을 운영하는 영세업체다. 대부분 선박기자재 관련 공장이다. 요즘에는 조선업이 망하다보니 문을 닫는 공장도 수두룩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을 안과 공장 사이 5m도 채 안 되는 좁은 길 위로 대형 화물차들이 수시로 다닌다. 이 때문에 마을은 차량 접촉사고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고 한다. 마을주민 김 모(60·여) 씨는 "길은 좁은데 주차공간이 없어 갓길에는 불법 주차차량들이 줄지어 서 있다. 대형차량이 오가는 일부 공장들은 공장 앞에 CCTV을 직접 달아 불법주차를 막고 있다. 그럼에도 대형차량들의 접촉사고가 하루 2~3번씩 발생한다"고 말했다. 김 씨는 "쓰레기 무단 투기도 허다하게 발생한다. 종량제 봉투를 사용하지 않은 쓰레기들을 직접 주워서 버리기가 수십 번"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연지마을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마을회관 바로 옆뿐만 아니라 주택 사이사이에서 공장들이 쉼없이 기계음을 내고 있다. 산 아래 경사진 곳에 위치한 한 공장의 경우 용접용 가스통을 실은 트럭이 도로 위의 얼음 때문에 바퀴가 미끄러져 도랑에 빠지는 사고도 발생했다. 인근에 사람이 있었다면 인명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주민 박 모(70) 씨는 "공장이 들어서서 좋은 게 뭐가 있겠는가. 이제는 소음, 매연 모두 체념하고 살아간다. 이렇게 살다가 죽는거지"라며 허탈해했다.
원지리는 국계, 석칠, 대리, 내연마을 등 4개 마을로 이뤄져 있다. 시냇가에 들국화가 많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국계(菊溪)마을도 난개발의 칼날을 피하진 못했다. 다른 지역에 비해 공장 수가 적었던 이 마을에도 3년 전부터 마을 앞까지 공장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공장 근로자가 늘면서 4층 규모의 원룸도 생겨났다.
마을주민 박 모(60) 씨는 "벼농사, 보리농사로 돈 벌고, 밭농사로 자급자족하며 살아왔다. 20년 전 마을 인근에 공장이 만들어지더니 이제 마을 앞까지 들어섰다. 소음 피해를 어떻게 일일이 설명하겠는가. 개별공장과 인구가 늘면서 원룸도 자연히 생겨났다"고 말했다.
김해시 허가민원과에 따르면, 주촌면의 임대, 자가공장은 각각 239곳, 630곳이다. 천곡리에는 임대 16곳, 자가 51곳, 원지리는 임대 30곳, 자가 74곳이다.
B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는 "천곡리, 원지리는 주촌면의 대표적 난개발 지역이다. 선박기자재 등을 생산하는 10인 이하 영세업체가 많다. 천곡리, 원지리의 전·답이었던 토지용도는 각각 1종 주거지, 2종주거지, 준주거지 등으로 바뀌어 이제는 공장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임대료는 3.3㎡ 당 2만 원이다. 매매는 3.3㎡당 200만 원에 거래된다. 요즘은 워낙 불경기라 공장 매매, 임대를 불문하고 거래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김해뉴스 /김예린 기자 beaurin@gimhae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