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탁 장군의 충심을 기리며 선조국문유서를 보관했던 흥동 현충사 전경. 현충사 건물과 선조어서각으로 이뤄져 있다.


임란 때 왜군포로 백성 회유하려 쓴 교서
자신은 피난처 머물면서 “탈출해 돌아오라”
충신 권탁 적진에 잠입해 100여 명 설득

후손들 ‘선조어서각’ 세우고 문서 보관
1975년 도난당했다 1년만에 되찾아

지역 국회의원 노력 덕 1988년 보물 지정
안동권씨 문중, 보안상 부산박물관 위탁



조선시대에 임금이 내린 문서는 대부분 한문으로 돼 있었다. 하지만 아주 드물게는 한글로 쓰인 것도 있었다. 또한 임금이 내린 문서는 대개 신하 개인에게 주어지지만, 불특정 다수의 백성들에게 임금이 친필로 써서 배포한 특별한 문서도 있었다. '김해의 문화재'인 '선조국문유서'가 바로 그것이다. 1593년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왜적에게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을 회유하여 돌아오게 하기 위해 직접 쓴 대국민 편지다. 보물 제951호로서 경남문화재자료 제30호인 선조어서각에 보관돼 있었으나, 보안상의 문제 때문에 지금은 부산박물관에 위탁 보관돼 있다.
 
이 문서에서는 나라와 백성의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선조가 선조국문유서를 쓴 배경을 살펴보자.
 
1593년 9월. 임진왜란이 발생한 지 1년 만에 김해를 비롯한 남부 지방은 초토화됐다. 선조가 의주로 피란을 간 지도 1년이 훌쩍 넘었고, 김해부사는 진주로 달아나 버렸다. 조선 최초의 의병장으로 김해성을 지키던 사충신인 송빈·김득기·이대형·류식은 순절하고, 그나마 남은 병사들은 흩어진 상태였다. 김해의 수령 자리가 비는 바람에 이웃 고을의 수령이 김해의 수령을 겸하고 있었다.
 

▲ 선조국문유서를 보관했던 선조어서각.

현재 경북 구미 인근인 선산에서 벼슬 없이 선비로 지내던 권탁은 이러한 사실을 전해듣고 홀로 걸어 김해까지 왔다. 그는 무너진 성을 새로 쌓고 스스로 수성장을 맡아 김해성의 경계를 다시 세웠다.
 
왜적이 점령한 지역의 백성들은 관곡을 나누어 주는 왜구에 복종하고 있었다. 부사 김성일이 선조에게 보낸 문서를 살펴보면 나라를 배신한 백성이 왜구의 편에 서서 조선 군대를 공격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에 피란처인 의주에 있던 선조는 흩어진 백성들의 마음을 모으기 위해 백성이라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한글로 선조국문유서를 썼다.
 
'너희들이 왜적에게 잡혀간 것은 너희의 본 마음이 아닐 것이다. 돌아오고자 해도 왜적에게 발각되어 죽을까, 돌아오더라도 나라에서 적을 따른 죄를 물어 죽일까 두려워서 탈출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는 그런 의심을 먹지 말고 서로 권하여 나오면 죄를 주지 않을 뿐 아니라, 그중 왜적을 잡아서 나오거나 왜적이 하는 일을 자세히 알아 오거나, 포로 된 백성을 많이 데리고 나오는 공을 세우면 양민과 천민을 막론하고 벼슬을 줄 것이니라. 이 뜻을 각처의 장수에게 다 알렸으니 의심하지 말고 모두 나오너라. 너희 역시 살던 땅에 돌아와 예전처럼 사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너희가 탈출하지 않으면 왜적에게 죽을 것이고, 나라가 안정되면 너희도 포로로 있었던 것을 후회하지 않겠느냐. 명나라 군사가 황해도와 평안도에 가득하고, 경상도와 전라도에 가득하다. 명나라 배와 우리나라 배가 합병하여 부산과 동래에 있는 왜적을 다 칠 것이다. 그때면 너희들도 휩쓸려 죽을 것이다. 그전에 왜적에게 탈출하여 나오너라.'
 
이 유서가 왜적의 근거지에 뿌려져야 백성들이 볼 수 있겠기에 선조는 남쪽 장수들에게 따로 교시를 내렸다. 그러나 겁을 먹고 선뜻 나서는 장수가 없었다. 이때 권탁은 선조국문유서를 품고 적진에 몰래 들어갔다. 포로의 가족처럼 꾸미고 밤중에 왜적의 진지에 잠입한 그는 선조국문유서를 보여주며 백성들을 설득했다. 권탁은 백성들에게 '김해에 사는 친척이 일본으로 건너갈 가족들을 위해 술과 음식을 가져와 만나기를 청한다. 함께 나가 배부르게 먹고 오자'는 유인책을 알려줬다.
 

▲ 현재 부산박물관에 있는 선조국문유서 원본.

다음날 권탁은 장사 수십 명과 함께 왜적과 포로가 된 백성들을 기다렸다. 그는 왜적들에게 술을 먹이며 기회를 엿보다 수십 명의 목을 베었다. 이 전투로 권탁은 100여 명의 백성과 김해로 돌아오게 됐지만 큰 상처를 입어 11월 21일 김해성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현존하는 선조국문유서는 권탁의 품에 있던 유품으로 알려져 있다. 안동권씨 후손들은 1836년 선조국문유서를 보관하기 위해 재실 옆에 '선조어서각'을 세우고 이를 지켜왔다. 세월이 흘러 선조어서각이 노후화되자 1989년 지금의 위치인 흥동로 123-18에 권탁의 충심을 기리기 위한 현충사와 함께 증축했다. 선조어서각은 1983년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30호로 지정됐다. 교서는 1975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됐고 1988년 다시 보물 951호로 승격됐다.
 
현충사에 가면 선조국문유서의 복사본을 볼 수 있다. 현충사 입구에는 궁전, 능, 묘에서 악귀를 물리치고 나쁜 액운을 막는 역할을 하는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홍살문을 지나면 10여 개의 계단 위에 태극문양이 그려진 붉은 문이 있다. 계단 옆에는 권탁의 업적을 기린 비석들이 세워져 있다. 문을 통과하면 권탁의 제사를 지내는 현충사가 나타난다. 안동권씨 문중의 권태곤(80) 씨는 "권탁 할아버지의 생일인 3월 21일 향교에서 이곳을 찾아 대제를 지낸다"고 설명했다.
 
현충사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면 다시 계단이 등장한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면 그제야 선조어서각이 모습을 나타낸다. 어서각은 앞면, 옆면 모두 한 칸 규모다. 잠겨 있는 어서각의 문을 열면 빨간 헝겊 안에 선조국문유서가 들어 있다. 세로 75㎝, 가로 48.8㎝ 크기이며, 양질의 닥나무 종이에 한글로 쓴 교서다. 교서에는 옥새인 '유서지보(諭書之寶)'가 세 군데에 찍혀 있다. 지금 선조어서각에 남아 있는 선조국문유서는 복사본이지만 크기나 모양은 원본과 같다.
 

▲ 권탁 장군에게 제사를 지내는 현충사 내부 모습.

홍살문 아래로 내려오면 오른편에 안동권씨 문중에서 사용하는 재실이 있다. 이곳에도 유서 복사본이 있다. 1988년 보물로 지정될 때 받았던 보물지정서가 액자에 걸려 있다. 안쪽 방에는 당시 문화공보부에서 보물 보관을 위해 내린 금고도 있다.
 
권태곤 씨는 "보물 지정을 받는 데 2~3년이 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김해·양산 지역 국회의원이 문화공보부에 보물 지정을 추천했다. 이후 서울대 사학과 교수들과 정부 관계자들이 여러 차례 내려와 심의했다. 옥새의 진위 여부가 중요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중요한 문화재를 도난당한 일도 있었다. 선조국문유서가 지방문화재로 지정됐던 1975년의 일이었다. 안동권씨 종친회 권영호(70) 회장의 집 바로 옆에 재실과 선조어서각이 있었다. 권 회장의 선친인 권태근 씨가 재실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가 보니 교서를 보관한 나무함의 자물쇠가 부서져 있었고, 교서는 사라져버린 상태였다. 그는 즉시 경찰에 신고했지만 범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1년 동안 유품을 찾지 못해 안동권씨 문중이 애를 태우던 중 권태근 씨의 사위가 이발소에 갔다가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됐다. 외동의 한 도박꾼이 돈을 크게 잃은 뒤 돈을 구할 궁리를 하다 김해에 귀한 문화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선조국문유서를 훔쳤다는 것이었다. 도박꾼은 선조국문유서의 도난 사실이 알려지자 땅에 숨겨두었고, 이 사실을 주변 사람에게 털어놓았던 것이다.
 
권 씨 등은 즉시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이 불러 추궁하자 도박꾼은 범행을 시인했다. 흥동 뒷산에 선조국문유서를 묻었다는 자백에 따라 땅을 팠더니 비닐봉지에 담긴 선조국문유서가 나왔다.
 
이후 안동권씨 문중에서는 직접 보관하기가 어렵다고 판단, 부산 대연동에 있는 부산박물관에 위탁했다. 지금 선조국문유서는 내년 7월까지 이어지는 박물관 리모델링 때문에 수장고에 보관돼 있어 볼 수가 없다. 작업이 끝나면 상설 전시돼 누구나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권 회장은 "선조국문유서는 권씨 집안의 가보이자 국가의 보물이다. 정작 시민들 중에는 이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고 관심도 없다. 조상의 충심과 나라의 아픔이 담겨 있는 문화재에 많이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김해뉴스 /조나리 기자 nari@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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