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달진 문학관 전경.


김해에서 자동차로 40분 가까운 거리
김달진 생가·문학관엔 시인 삶 그득
100년 감나무에서 선생 얼굴 보는 듯

몇 발짝 옮기니 50년 세월 금세 흘러
근·현대사 물건 진열한 ‘김씨박물관’
따뜻한 창 앞 빛바랜 LP판 팝송 환상적

포토존 마련 박배덕갤러리서 일정 마무리
착시현상 염두 둔 입체작품에 눈길


 
 

▲ 김달진 시인의 유품.

가끔 유행이 지난 노래가 오래 전의 기억을 불러올 때가 있다.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인지 아니면 그 때의 내가 그리운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일종의 향수처럼 사무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괜스레 타임머신의 존재를 믿고 싶어진다. 오늘은 그런 날 떠나면 좋을 시간여행지를 소개한다.
 
목적지인 소사마을은 창원시 진해구 소사동에 위치해 있다. 김해 구시가지에서 차로 약 40분을 달리면 닿을 수 있는 비교적 가까운 곳이다. 1900년대 초반에는 소사마을에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마을 서쪽에 웅동수원지를 만들면서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을 소사마을로 강제 이주시켰다. 때문에 면소재지가 될 만큼 그 규모가 커졌다. 현재는 200호가 조금 넘는 집이 들어서 있고, 65세 이상의 노인이 150여 명이나 되는 장수마을이다.
 
타임머신이 멈춰선 어느 평일 낮 10시. 동네는 고즈넉하다. 간간이 마을주민들이 오가고 가끔 배경과 어울리지 않는 차림의 관광객들이 눈에 띈다. 마을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박배덕 갤러리가 보인다. 그리고 김씨박물관과 월하 김달진 시인의 생가, 김달진 문학관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어디부터 가야할지 잠깐을 망설이다가 문학관으로 향한다.
 
문학관 현관 정면에는 월하 김달진 선생의 사진이 걸려있다. 사진 속 그는 사람 좋은 웃음을 띤 채 손님을 반긴다. 왼쪽 방향으로 죽 따라 들어가니 시인의 지난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는 1907년 경남 창원군 웅동, 지금의 진해구 소사동에서 태어났다. 계광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가 유학생활을 했으나, 일본인교사 추방운동을 벌이다가 퇴학을 당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1926년부터 7년간 모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 무렵 선생은 순수문예지 <문예공론>에 시 '잡영수곡'을 실으며 등단한다. 이후 서정주, 김동리 등과 시 전문지 <시인부락>을 발간하고, 시집 <청시>를 내는 등 문학 활동을 활발히 한다.
 

▲ '꽁뜨 카페'에서 창으로 내다본 김달진 생가(위 사진). 복원된 김달진 서재.

그는 불교와도 인연이 깊었다. 금강산유점사 등에 입산해 수도 생활을 하기도 했고, 서른 살이 되던 해에는 중앙불교전문대학(현 동국대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시인이자 승려였으며, 한학자이며 교사였다. 선생이 작고한 이듬해인 1990년에는 그의 문학정신을 기리는 김달진 문학상이 제정됐다. 또 1996년에 김달진 문학제가 시작됐으며, 2005년 지금 이 자리에 김달진 문학관이 세워졌다.
 
선생은 평생을 수도자처럼 소박한 삶을 살았다고 하는데, 문학관 한 쪽에 놓인 그의 유품을 보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붓 몇 자루와 조각난 먹, 돋보기, 토시 등 그 모양새가 단출하다. 방명록에 이름을 남기고 문학관을 나선다.
 
김달진 선생의 생가는 문학관과 마주하고 있다. 2004년 복원된 생가는 정침과 아래채, 작은 집, 외양간 등 6동의 갈대집으로 지어졌다. 현재의 생가는 본래의 것보다 조금 작은 규모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도 제법 널찍하다. 출입문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뒷간을 지나면 작은집에 닿는다. 열린 문 안으로 보이는 책상 위에 고서가 펼쳐져 있다. 선생이 책을 읽다 잠깐 자리를 비운 느낌이 든다. 곁에 있는 텃밭에는 김치를 담글 때 쓰는 갓이 심어져있다. 생가 관리인이 여기에서 채소를 키워 마을사람들과 나누어 먹는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잘 정돈돼 있는데다 생명력까지 느껴지니 지금도 누군가가 살고 있는 것 같다. 흙바닥을 밟고 있노라니 어릴 적 생각도 난다. 텃밭 주변에는 평상이 놓여있다. 가끔 선생은 이곳에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생가 안에는 키가 큰 감나무와 가죽나무, 태산목이 자라고 있다. 선생이 이곳에 살던 때부터 있었다고 하니 적어도 100세는 넘었겠다. 감나무 앞에 서자 아까 문학관에서 보았던 시가 떠오른다. '유월의 꿈이 빛나는 작은 뜰을/ 이제 미풍이 지나간 뒤/ 감나무 가지가 흔들리우고/ 살찐 암록색 잎새 속으로/ 보이는 열매는 아직 푸르다.' ('비시' 부분)


 

▲ 근·현대에 사용된 물건들이 다양하게 진열된 김씨박물관.

선생의 시에 등장하는 감나무가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로 100년을 거슬러 온 듯 그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5월에 피는 태산목 흰 꽃은 사람 얼굴만 하고 그 향이 아주 좋다고 하니, 그 때쯤 다시 한 번 찾고픈 마음이 든다.
 
생가의 왼쪽 편 돌담을 끼고 몇 발짝만 걸으면 금방 50년의 시간이 흐른다. 낡은 건물에는 '김씨공작소', '부산라듸오' 등 옛 사진에서나 봄직한 간판들이 걸려있다. 건물 옆에는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김씨박물관이 자리해 있다. 박물관에는 요즘 보기 힘든 낯선 모양의 TV와 전화기, 타자기, 갖가지 벽시계 등 신기한 것들이 많다. 옛날 책가방과 학용품, 장난감도 진열돼 있다.
 
김현철(63) 관장이 들려주는 소사마을의 옛 이야기는 더 흥미롭다. 88올림픽 이후 우리나라에 쓰레기종량제 시행계획이 발표됐다. 앞으로는 돈을 주고 쓰레기를 버려야 한다는 부담감에 너도나도 부피가 큰 물건들을 많이 버렸다고 한다. 김 관장은 전국을 돌며 그 물건들을 주워 담았다. 진열되지 못한 물건들이 두 개의 창고를 가득 메우고 있을 만큼 많이 모았다. 오랜 시간 준비해온 그는 2009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자신의 외갓집에다 박물관을 개관했다. 문화를 공유하는 것 자체에서 기쁨을 느끼기 때문에 입장료는 받지 않는단다. 그는 주말에만 스토리텔링박물관인 소사주막을 열어 재미있는 근현대사를 들려준다.

몸을 녹이려고 들른 박물관 앞 '꽁뜨카페'에서는 김 관장의 둘째 딸 김주연(27) 씨가 혼자 밀크티를 마시고 있다. 모든 메뉴는 균일가 2000원이다. 따뜻한 홍차를 한 잔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주머니에 있던 초코바를 반으로 잘라 그녀에게 내밀었더니, 뜯지도 않은 과자 한 봉지를 건네 온다. 그녀는 소사마을에는 일명 '빨리빨리병'이 없다며 느긋한 분위기가 참 좋다고 한다. 한 쪽 벽면에는 빛바랜 LP판들이 가득 걸려있고, 반대쪽 큰 유리창 너머로는 김달진 선생의 생가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관리인이 텃밭에서 채소를 따고 있다. 햇살 따뜻한 창가에 앉아 조용히 흘러나오는 오래된 팝송을 듣고 있으니 시간이 정지한 것 같다. 타임머신을 타고 내리는 곳이 있다면, 아마도 이 커다란 창 앞이 아닐까 싶다.
 

▲ 박배덕 갤러리 입구 '포토존'(위 사진)과 갤러리 야외전시장.

잠깐 휴식을 취한 뒤, 마을 앞에 있는 박배덕 갤러리로 되돌아 나간다. 친절하게도 문 앞에는 포토존이 마련돼 있다. 먼저 사진 한 장을 찍고, 화살표를 따라 전시장을 향해 걷는다. 몇 개의 작은 방에는 벽마다 작가의 작품이 걸려있다. 주로 입체작품인데, 착시현상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본 트릭아트 작품과 비슷한 느낌이 있다. 야외에는 설치미술 작품들이 곳곳에 전시돼 있다. 박 작가는 누구나 편하게 들어와 사진도 찍고 즐겁게 구경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단다. 진해가 고향인 작가는 김달진 문학관이 좋아 2009년에 소사마을로 들어왔다. 내년부터는 갤러리를 마을 뒤 큰 공간으로 옮겨갈 계획이라고 한다. 방문객들에게 즐길 거리를 더 많이 제공하기 위해서다.
 
갤러리를 끝으로 시간여행은 끝이 났다. 아쉬운 마음에 돌아보니 여러 개의 산이 마을을 병풍처럼 휘감고 있다. 덕분에 태풍의 피해를 본 적이 없다는 마을 어르신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 올해 일흔 살을 맞았다는 할아버지는 지난 70년 동안 소사마을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고 한다. 늘 예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고.
 
요즘은 타임슬립(Time slip)을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매체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도 좋겠지만, 한 번쯤은 내가 주인공이 되어 직접 소사마을로 시간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김해뉴스 /이경민 기자 min@gimhaenews.co.kr


▶소사동마을(김씨박물관 기준) / 경남 창원시 진해구 소사로59번나길 4.
가는 방법 : 김해시청 앞에서 97번 버스 승차 후 성산구청·성주동마을도서관(건너편) 정류장에서 하차. 성산구청에서 다시 757번 버스를 타고 마천공단입구에서 내려서 도보로 약 13분.
문의/010-2047-5417(월요일 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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