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속담을 두고 무릎을 친다. 어제까지만 해도 설마 했던 사건들이 오늘의 실체로 바뀌면서 국민들은 그 끝이 어디일까에 아찔함과 두려움마저 느낀다. 그동안 '존재하지도 본 적도 없다'라고 우기던 문화계의 블랙리스트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현직 장관이 동시에 구속되는 헌정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문체부 관료들도 '예술 표현의 자유와 창의성을 지키는 보루가 되지 못하고 문화 예술 지원의 공정성 문제를 야기한 것에 대해 너무나 참담하고 부끄럽다'고 머리를 숙였다. 특검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국정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을 향해 의혹의 칼끝을 겨누고 있다.
 
블랙리스트란 '특별히 주의하고 감시할 필요가 있는 인물과 단체의 명단'으로, 위험에 미리 대비한다는 의미에서 반드시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다. 정부가 지향해야 할 문화예술 사업에 대해 어느 정도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은 긍정적인 측면도 없지 않다.   
 
문제는 정부가 예산이나 공공자산을 가지고 정부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아주 광범위하고 조직적으로 차별하고 핍박하여 헌법상 국민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훼손했다는 점이다.
 
박근혜 정부가 창조경제와 함께 한류를 중심으로 한 문화융성을 국정기조로 삼은 것은 바람직하다고 하겠으나, 문화융성의 토양부터 척박하게 만든 것은 안타까울 따름이다. 시국 선언자, 야당 대권 후보 지지자, 세월호 비판 다큐멘터리를 상영한 국제영화제의 예산 삭감, 좌 편향적 영화 제작사의 인사권 압력, 정부의 입맛에 맞지 않는 문학·연극 단체 등 무려 9천여 명이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심지어 세계 3대 문학상 '맨부커 상'을 받은 작가에게 흔한 대통령 축전 하나 주지 않는 옹졸함 속에서 문화융성을 기대할 수 있을까.   
 
블랙리스트는 당근과 채찍의 효과가 있어 권력이 소기의 정치적 목적을 거둘 수는 있겠지만 국가 경제적으로는 엄청난 부정적 효과를 초래한다. 2002년 국가기술과학위원회는 정보기술(IT), 생명과학기술(BT), 나노기술(NT), 환경기술(ET), 항공우주기술(ST)과 함께 문화기술(CT)을 6T에 포함시키면서 국가 집중전략 산업 분야로 지정했다.
 
문화기술이란 디지털 문화를 기반으로 영화, 방송, 음반, 애니메이션, 게임, 음악 등 문화예술 산업을 첨단산업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기술을 총칭한다. 문화기술 산업은 문화 콘텐츠 수출뿐 아니라 관광, 의료서비스, 상품 수출 등 연관 산업의 수출 증가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경제적 중요성이 매우 크다. 지난해 우리나라 총수출은 전년도에 비해 감소했지만 드라마, 영화 등 한류 열풍을 통한 문화콘텐츠의 수출로 파급된 농식품 수출은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태국, 이란, 중동, EU, 대만, 중남미 등에서 채소류, 김치, 인삼, 돼지고기 등 신선식품과 라면 소스, 과자 등 가공식품의 수출이 크게 증가했다. 특히 한인 거주자 수가 적은 중동, 중남미 지역 등으로 수출이 증가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순실 게이트로 엮여진 블랙리스트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30년 전으로 되돌려 놓았다'라는 전직 문체부 장관의 푸념 속에 우리 문화융성의 민낯을 읽을 수 있다. 2017년은 세계 각국의 보호무역 확산으로 인해 가격 경쟁력마저 위협받게 되는데 뻔한 줄거리의 한류 패러다임으로는 콘텐츠 수출의 증대가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한때 큰 인기를 누렸던 홍콩 영화들이 동일 배우의 겹치기 출연, 반복되는 스토리 등 콘텐츠 품질 저하로 소비자의 외면을 받아 몰락한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군사 독재시절 가요 <아침이슬>은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라는 가사가 대한민국 적화를 의미한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꼬투리로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한류 문화기술 산업의 경쟁력은 신선한 스토리 개발, 작가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창의력 외에도 비판과 풍자를 수용할 줄 아는 사회에서만 꽃 필 수 있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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