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광우 김해뉴스 사장(부산일보 이사).

안금마을에 사는 주정이 화백이 지난주 <김해뉴스>에 '금바다 칼럼'을 썼습니다. '회색인의 계절'입니다. 동아일보에 시사만화를 연재했던 이홍우 화백과 한겨레신문에 시사만평을 그렸던 박재동 화백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 화백은 두 사람과 다 친한데 서로는 우파니 좌파니 하며 내외하고 있어서 곤혹스럽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청준의 중편소설 '소문의 벽'이 생각났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진술을 거부하는 정신적 병리현상을 겪고 있습니다. 6·25전쟁 당시의 충격 때문입니다.
 
어느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들이 어두운 방 안에 들어와 어머니의 얼굴에 전짓불을 들이댑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좌, 우 어느 편이냐. 어머니는 사내들이 빨치산인지, 국방군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식구들은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주인공에게는 '진술공포증'이란 게 생겨버렸습니다. 
 
2017년 지금 '촛불'이 타오르고 '태극기'가 나부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설의 주인공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부모와 자식, 친한 친구, 친한 직장동료 들까지도 자신의 견해를 솔직하게 드러내기를 꺼려하는 것 같습니다. 자칫하면 그 좋았던 관계가 즉시 훼손돼 버릴 정도로 아슬아슬한 기류가 흐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눈치를 살피거나, 넌지시 떠보거나, 아예 '촛불'과 '태극기'를 외면하는 모습이 다반사로 목격되고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시국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에 가까운 사이에서도 관계가 틀어져버린 사례를 더러 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정치권 일부에서는 '국민 통합' 운운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순수성과 진정성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몇 가지 측면에서 이의를 제기할 부분이 있어 보입니다. 
 
첫째, '통합'의 가능성 부분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제시대 사람과 해방둥이와 전쟁 체험 세대와, 4·19, 5·16, 광주민주화운동, 6·10항쟁 등을 겪은 사람들과 '신인류'라 불리는 청년들이 뒤섞여 살고 있습니다. 심각한 예로는, 동족상잔의 와중에 죽창으로 찔러 죽인 사람과 죽창에 찔려 죽은 사람의 유족들이 같은 하늘을 인 채 한 마을에서 살고 있기도 합니다. 한 시대가 깨끗이 정리되거나 특별한 인문학적 혹은 종교적 성찰이 수반되지 않는 한, '통합'이란 단어는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둘째, 통합이란 단어는 시대정신과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전체주의적 질감 때문입니다. 인도는 10억의 인구가 그에 버금가는 숫자의 신을 믿는다고 합니다만, 실은 힌두교(힌두이즘)로 귀일되는 일신교 사회입니다. 힌두교에서는 '저 수많은 샛강들이 저마다 흘러 흘러서 광대무변의 바다 즉, 진리의 바다로 간다'고 여깁니다. 그리하여 인도인들은 '나마스테'라는 인사법을 갖고 있습니다. 당신 안의 신, 당신이 믿는 신, 당신의 삶의 방식을 존중한다는 뜻입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톨레랑스'를 중시한다고 합니다. 톨레랑스는 관용, 아량, 포용의 정신을 뜻합니다. 나와 다른 신앙, 나와 다른 사상, 나와 다른 행동 양식을 용인한다는 뜻입니다. 톨레랑스란 말이 그냥 나온 건 아닙니다. 그들은 구교도와 신교도로 갈라져 무자비한 살육전을 전개한 뒤 스스로의 안위를 위해 이 정신을 추앙하게 됐다고 합니다. 
 
이런 저런 사정을 감안했을 때, 지금 '무려 2017년의 전짓불 공포'를 겪고 있는 우리들에게 정작 필요한 미덕과 지향점은, 허황된 구호로서의 '통합'이 아니라 '상호 존중'과 '조화'가 되어야 옳을 것 같습니다.  사족이 되겠지만, 허성곤 시장 체제의 김해시가 채택한 '하나 된 김해'란 슬로건도 이런 상호 존중 정신의 지원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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