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영 봉화산 마애불이 동쪽으로 넘어져 바위 틈에 편안하게 누워 있다.


 ‘대통령의 길’ 따라 산 300m 지점 위치
 가파른 산세 탓 굴러 떨어졌을 가능성

 30년 전까지 전설 속 ‘자암산’으로 불려
 허황옥, 태자 거등 위해 암자 창건 전설
 통일신라 추정 기와 등 자암 흔적 곳곳에



진영읍 봉하마을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저가 있는 곳으로, 매년 전국에서 70만 명 이상이 찾는 김해의 대표적 명소 가운데 하나다. 이곳에는 노 전 대통령의 사저보다 훨씬 더 유명한 혹은 유명했던 문화재가 있다. 바로 유형문화재 제40호인 진영 봉화산 마애불이다.
 
마애불(磨崖佛)은 암벽에 새긴 불상을 말한다. 한국을 비롯해 중국, 인도, 일본 등지에서 주로 발견된다. 세계에서 가장 큰 마애불은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 있었던 높이 52.5m, 34.5m짜리불인데, 2000년에 이슬람을 모독하는 유산이라는 이유로 당시 탈레반 지도자가 로켓 폭탄으로 파괴해 버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마애불은 파주 용미리에 있는 것으로, 높이 17m가 넘는다.
 
이에 비하면 봉화산 마애불은 매우 작고 아담한 편이다. 노 전 대통령 묘역 뒤편 '대통령의 길'을 따라 봉화산을 향해 300m만 올라가면 마애불이 나타난다. 높이는 2.48m. 마애불은 콧등과 작은 입, 어깨까지 늘어진 커다란 귀에 살짝 미소를 머금은 듯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다. 기법으로 보아 고려시대 불상으로 추정된다.
 
앉아 있는 불상의 오른손은 어깨높이로 손바닥을 펴 앞으로 향하고 손가락은 위쪽을 향하는 '시무외인(施無畏印)', 왼손은 허리높이에서 손바닥을 세로로 펴 정면을 향하게 하고 손가락은 아래로 향하게 하는 '여원인(與願印)' 자세를 하고 있다. 이는 각각 중생의 두려움을 막아준다, 중생의 소원을 들어 준다는 뜻이다.
 
특이한 것은 마애불이 바위틈에 끼인 듯 동쪽으로 누워있다는 사실이다. 봉화산 마애불은 가부좌를 튼 좌상(坐像)이었지만 지금은 옆으로 넘어져 있어 완전히 오른쪽 머리를 바닥에 대고 누운 와상(臥像)의 모습을 하고 있다. 마애불이 옆으로 넘어진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봉화산 곳곳의 바위들이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지 않고 서로 겹쳐 있거나 바위가 갈라져 있는 모습을 통해 가파른 산세에서 바위가 굴러 떨어졌다고 추정해볼 수 있다. 마애불 역시 산에서 굴러 떨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코와 입 부위가 조금 마모된 것 외에는 큰 상처 없이 깨끗한 편이다.
 

▲ 봉화산 봉수대(위)와 자암터에서 발견된 기와 조각.

누운 모습 때문인지 마애불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배경은 신라 시대, 장소는 중국 당나라 황실이다. 당나라 황제에게는 아주 예쁜 황후가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황후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아무리 좋은 약을 써도 병은 깊어지기만 했고 그 원인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황제는 잠을 자던 황후가 헛소리를 하며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다. 그를 깨워 이유를 물으니 황후는 꿈에 한 청년이 자신을 괴롭힌다며 울었다. 이에 황제는 여러 절을 찾아다니며 불공을 드렸다.
 
황제의 간절한 기도가 하늘에 닿은 것일까. 황제 역시 이상한 꿈을 꾸게 됐다. 황제는 두 승려가 남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따라가게 됐다. 가다 보니 산이 하나 나오고 그 산에는 황후의 꿈에 나와 황후를 괴롭히던 청년이 있었다. 청년은 두 승려의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한 승려가 청년을 크게 꾸짖었다. "네 이놈! 너는 불법을 어기고 당나라 황후를 밤마다 괴롭힌 놈이로다. 내 너를 가둬 그 버릇을 고쳐 주겠다. 백 년이고 천 년이고 네가 죄를 뉘우치는 날 다시 구해주리라."
 
이어 승려는 그 청년을 바위 틈에 넣어버렸다. 꿈에서 깬 황제는 꿈에서 나온 산과 바위를 찾아보라고 신하들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당나라를 아무리 뒤져도 그런 산과 바위를 찾을 수 없었다. 이에 신하들은 다른 나라까지 찾아보게 됐고 마침내 김해 자암산(봉화산)에서 황제가 말한 대로 청년이 새겨진 석불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후부터 차츰 황후의 병이 낫기 시작했다. 그러나 석불에 갇힌 청년은 아직도 황후를 연모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해 바위틈에서 고뇌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야기 속에서는 봉화산의 이름이 자암산(子庵山, 子巖山)으로 나온다. 실제로 20~30년 전까지만 해도 봉화산은 자암산으로 많이 불렸다고 한다. 지금 마애불이 있는 곳 바로 아래에 자암(子庵) 혹은 태자암(太子庵), 자암사(子庵寺)라는 암자(庵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암은 수로왕의 왕비인 허황옥이 태자 거등을 위해 창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밀양 안태리에는 아버지의 은혜를 기린 부은암(父恩庵), 김해 생림면에는 어머니의 은혜를 기린 모은암(母恩庵)이 있다. 부은암, 모은암, 자암 세 암자는 같은 시대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버이와 자식의 복을 빌기 위한 이곳을 삼원찰(三願刹)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형태가 없어 전설 속에만 남아있는 암자이지만 이 산을 자암산, 골짜기를 자암골 등으로 불렀던 것으로 보아 이 절은 실재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의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자암산은 부(府·마을)의 북쪽 30리에 있다'고 적혀 있다. <경상도지>에도 자암에 대해 적혀 있다.
 
자암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는 듯한 사찰, 마애불에서 400m가량 떨어진 정토원의 선진규 법사에 따르면, 봉화산이라는 이름은 산꼭대기에 있는 봉수대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봉수대는 김해시의 고증작업 결과 1425년에 축조돼 1895년에 철폐된 것으로 추정된다. 봉수대는 밤에는 불로, 낮에는 연기로 이웃 봉수대에 연락해 적의 동태를 살피는 역할을 했다. 봉화산에 있는 봉수대는 가덕도 응암대 봉수대에서 신호를 받아 밀양 남상봉으로 전달했다고 한다. 봉수대는 지난해 복원을 마쳐 조선시대 때 사용 당시의 모습을 되찾았다.
 

▲ 봉수대에서 내려다 본 봉하마을 전경.

역사의 기록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이곳을 방문하면 자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험한 바위들로 둘러싸인 봉화산에서 마애불 바로 아래쪽에는 평평한 땅이 있다. 선진규 법사는 이 부분을 자암의 터였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곳에는 굴러 떨어진 바위가 많이 있다. 자암 역시 바위가 굴러 떨어지면서 건물을 덮쳐 무너졌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과거에는 이 주위가 다 바다로 돼 있어 절을 찾기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찾는 이가 없다 보니 절을 다시 고쳐 세우기도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곳에서는 통일신라~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 조각들이 쉽게 발견된다. 땅을 조금만 유심히 살펴보면 한쪽에는 빗살무늬가 새겨지고 한쪽에는 천을 아래에 깔고 기왓장을 만든 듯한 직물 모양이 남아 있다. 김해시 문화재과 관계자 역시 이곳에서 통일신라~고려시대 기와가 발견된다고 설명했다.
 
바위틈에 있는 마애불에 대해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또 있다. 사실 40여 년 전 마애불 발견 당시에는 마애불 앞에 1.2m 길이의 바위가 끼여 있었다. 그 답답했던 모습 때문인지 '부처님이 자유로워지면 이 지역에서 큰 인물이 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 말에 따라 선 법사는 1984년 석공을 동원해 화약으로 바위를 폭파시켜 바위를 걷어냈다. 그는 "폭파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이불 등으로 바위를 싸고 아주 작은 화약으로 폭파시켰다. 처음에 이 이야기를 시에 전했을 때 담당자들이 깜짝 놀랐다. 그러나 마애불에 전혀 손상이 없어 모두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그 바위를 없앤 이후 이 마을에서 노 전 대통령이 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누워 있는 마애불이 바로 앉으면 통일이 이뤄진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때문에 마애불을 세워보려는 시도를 했지만 도저히 세워지지 않더라는 이야기도 함께 나온다. 지금은 함부로 마애불에 손을 댈 수도 없지만, 과연 마애불이 세워지면 통일이 이뤄질지는 두고 볼 일이다.
 
김해뉴스 /조나리 기자 nari@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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