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해훈 시인·동아대 홍보팀장.

생림면 금곡리 출신의 대눌 노상익(1849~1941), 소눌 노상직(1855~1931) 형제와 김해부사를 지낸 그들의 스승인 성재 허전(1797∼1886)은 이곳저곳에 소개가 많이 돼 있어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대눌·소눌 형제가 한일합병 후 보인 애국활동과 연원을 개략적으로 한 번 들여다보고자 한다.
 
대눌이 만주에 망명해 있을 때 그의 집에 들이닥친 일본 경찰과 주고받은 이야기를 먼저 보자. 일제 강점에 대한 대눌의 인식을 읽을 수 있다.
 
"저들(일제)이 말하기를, '뭣 때문에 왔냐?'라고 하기에, 노인(대눌)이 '일본인을 피해서다'라고 대답하자, 저들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눌이 주로 망명지에서의 생활을 시로 쓴 <도강록(渡江錄)>의 <자지(自誌)>에 나오는 구절이다. 일본 경찰이 만주로 망명한 동기를 묻자, 그는 한 마디로 말했다. "일본인을 피해서"라고. 다른 구차한 설명이 필요 없다.
 
대눌이 일본의 강제 점령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했는가를 분명히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망명 동기를 간략하면 다음과 같다. 1906년 2월 이토 히로부미가 부산에 올 때 그는 밀양 영남루에 구금되었다. 1910년 11월 은사금 거부로 구금되었다 풀려났으나, 다시 영남루에 압송되었다 풀려난 뒤 일제의 감시를 받으며 살았다. 그 후 일제의 감시를 피해 1911년 11월 17일 서간도로 망명을 떠났다. 망명지에서도 대눌은 일제의 감시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그의 망명은 망국에 대한 유가적 의리를 실천하고 지조를 지키는 데 있었던 것이다.
 
다음은 대눌의 동생인 소눌 노상직이 1개월 전 먼저 떠난 형 대눌이 있는 만주 안동현으로 가면서 지은 한시를 한 수 보자. 한시 원문은 생략한다.
 
'떠나려 함에 유독 슬픈 일은 산소가 멀어지는 것/ 형제 함께 멈추고 가는 것 어렵네/ 맑은 새벽 사당에 공손히 참배하고 나서니/ 화동 만리에 두 충심을 비추네'
 
소눌은 형님이 있는 만주로 가면서 여러 수의 시를 써 <신해기행>이라는 시집을 냈다. 그는 시집 첫 시에서 고향을 떠나는 심경을 나타내고 있다. 만주와 조선에서 형제가 항시 충심을 간직한 모습을 자부하고 있다. 소눌은 유자였던 탓에 조상의 산소를 떠나는 게 슬프고 힘든 상황을 내비치고 있다. 나라 잃은 지식인의 고뇌도 읽힌다. 국권피탈의 현실 인식이 드러난다고 하겠다. 그의 만주행은 망국 조선에 대한 유자로서 거지수구(去之守舊)를 실행한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만주 생활은 1년 2개월 남짓 된다.
 
소눌은 총 2674자로 구성된 '파리평화회의에 보내는 편지'(파리장서)에 서명했던 인물이다. 파리장서는 1919년 3·1운동이 발발했을 당시 유림측에서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하고, 각 지역 대표 유림들이 작성한 서한이다. 명성황후와 고종황제 시해사건의 내막과 일본이 대한제국의 주권을 찬탈하는 과정의 부당성을 폭로하고, 대한제국 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한 문서이다.
 
그는 환갑을 넘긴 나이에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만주로 망명을 떠났다. 이는 자신의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제에 대한 최고의 저항이었다. 망명지에서 대눌은 수많은 저술을 남기면서 항일정신을 드러냈다. 소눌의 파리장서운동 참여의 의미는 바로 빼앗긴 국권을 다시 찾아오는 일, 무너진 도학의 전통을 바로 세우는 일, 바로 그것이었다.
 
대눌·소눌 형제의 애국정신, 망국에 대한 유가적 의리의 근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스승인 허전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성재는 조선 말기의 격동기에 성호학의 계승자로서 부패한 사회제도의 개혁을 요구한 제도개혁론자였고, 침략적 외세에 항거하는 척사위정론자였다. 스승의 영향을 받은 형제 역시 침략적 외세와 그에 빌붙어 권력을 도모하는 사람들에게 항거하며 조선의 자주 독립을 옹호하는 데 나름의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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