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는 고령화사회로 접어들었다. 전국 문화원연합회에서는 고령화사회를 복지차원으로만 접근하지 말고 노인들이 향유하거나 창조하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판단, 관련 프로그램 공모사업을 시작했다. 김해문화원에서 기획한 '동화 속 행복나라'는 이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문화체육관광부의 후원으로 지난 4월부터 11월까지 대감리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문화원까지 찾아오기 힘든 어르신들을 고려해 전문강사가 직접 찾아간다.

'동화속 행복나라' 프로젝트, 김해문화원, 4~11월 수업진행

이 사업을 기획한 김해문화원 허모영 사무국장은 "평생을 농삿일로 보낸 어르신들도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젊은 사람들 못지 않게 내재되어 있는 끼를 펼쳐볼 수 있는 기회도 되고, 전문강사한테 배운 내용으로 사회봉사활동도 할 수 있다"며 고령화 문화창조생활 프로그램의 의미를 설명한다.
 
감내노인정은 개그콘서트 녹화장 못지 않게 재미있고 행복하다. 한 마디 한 마디에 여기서 웃고, 저기서 뒹굴고 그야말로 할머니들은 웃음폭탄 제조기 같다. 변정원 씨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기 위해 지혜를 짜내는 쥐 가족들의 회의 장면을 먼저 시연했다. 다음에는 할머니들이 직접 해 볼 차례. 엄마 쥐, 아빠 쥐, 오빠 쥐, 언니 쥐, 할머니 쥐 배역이 정해졌다. "아이고 난 허리가 아파서 못 일어나" 슬며시 물러서는 할머니, "앉아서 해라, 고마, 괜찮다" 응원하는 할머니, 여러 의견이 쏟아진다. 앉아서 하면 뭐 어떤가. 해보는 게 중요하다. 두 배역은 서서 나머지는 앉아서 했다.
 

▲ 평생 농삿일을 해온 대감리 할머니들이 전래동화를 각색한 연극 대사 연습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박정훈 객원기자 punglyu@hanmail.net

배역을 맡은 할머니들은 변 씨가 직접 펠트 천으로 만들어 온 의상도 걸치고 역할에 맞는 쥐 가면도 머리에 썼다. 할머니 쥐는 예쁜 족두리 모양이다. "하이고 이뻐라. 새색시 같네." 누군가의 말에 할머니 쥐가 대꾸한다. "족두리만 주면 뭐 해. 신랑을 하나 맞춰 줘야지"하자, "시집가도 되겠다" 응수가 나오고 회관은 금방 웃음이 터진다.
 
"고양이가 오는 걸 미리 알려면 방울을 달면 되지요"라고 말해야 하는 언니 쥐는 "고양이가 오면 얼른 달라빼야지"라고 즉흥대사를 날린다. "맞다. 고양이가 오면 쥐는 달아나야지." 할머니 몇 분이 아예 배를 잡고 웃음보가 터졌다.
 
다음은 '금도끼 은도끼'. 할머니들 앞에 작은 무대가 펼쳐지고 변 씨가 시연을 한 다음 다시 연극 한 판이 벌어진다. 산신령 역할을 맡은 할머니 분장이 끝나자 "텔레비전에 나온 거 영판이네." 감탄이 쏟아진다. 정직한 나무꾼으로 뽑힌 할머니가 나섰다. 조금 전에 들은 대사이지만 입에 붙지 않아 낯설다. 실수로 연못에 빠뜨리는 연기를 해야 하는데 나무를 찍는 시늉을 하던 할머니는 "도끼, 여 빠자뿌까(빠트려 버릴까)?" 하며 도끼를 작은 무대 위로 툭 던진다. 산신령이 나타나 "이 도끼가 네 것이냐"고 근엄하게 묻는데 "그거 내꺼 아이다" "그것도 아이다" 반말로 부인한다. 지켜보던 할머니들 사이에 또다시 와르르 웃음보가 터진다. 배우도 관객도 웃느라 정신이 없다.
 
다음에는 욕심 많은 나무꾼 배역을 뽑아야 하는데, 변 씨가 조금 망설이다가 할머니 한 분의 손을 잡았다. "그래, 잘 잡았네. 내가 욕심이 좀 많다." 선선히 일어났지만 할머니는 오래 서 있기가 조금 힘들어 보였다. 허모영 국장이 얼른 밀대걸레를 손에 쥐어 주었다. 욕심 많은 나무꾼 할머니는 "금도끼 은도끼 쇠도끼 전부 다 내껍니다. 빨리 주이소." 억지를 부려본다. 그러다 산신령에게 혼이 나고 쇠도끼마저 못 찾게 되자, 바닥에 몸을 던져 우는 열연을 보였다. 박수와 웃음이 쏟아졌다. "선생님, 내 잘하지예?" 확인 한 마디도 잊지 않는다.

어디에 저런 끼가 숨어 있었을까
살아온 내공에 애드립도 척척, 변정원 전문강사도 깜짝 놀라
"내재된 감성이 표출되는 것" 12월 멋진 공연이 기다려진다

할머니들 모두 뛰어난 배우였다. 어디에 저런 끼가 숨어 있었을까 내심 궁금해진다. 그 끼에 살아오신 내공까지 더해지니 즉석에서 쏟아지는 애드립 또한 환상적이다. 짧은 연극이지만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 기자도, 사진기자도, 할머니들의 연극에 빠져 웃느라 취재가 힘들 정도였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데, 그날 웃음으로 만 가지 복을 받은 것 같다. 웃으면 젊어진다는데 할머니들은 십년도 더 젊어지셨겠다.
 

▲ 딸처럼 며느리처럼 대해주는 할머니들께 배우는 게 더 많다는 변정원 전문강사(뒤쪽 서있는 이)와 대감리 할머니들.

이 프로그램의 전문강사로 활동 중인 변정원(49) 씨는 문화예술을 가까이 접해보지 못한 농촌 어르신들과 어떻게 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할지 처음에는 많은 연구를 해야 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딸처럼 며느리처럼 대해주는 할머니들과 어느새 정이 들었다. 변 씨는 할머니들에게 익숙한 옛 이야기를 각색한 연극을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간다. 배역을 맡은 할머니들은 대본을 외워야 하는 스트레스 없이, 기본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연극은 특정한 사람들이 하는 게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고, 할머니 자신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전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할머니들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는 감성을 다시 끌어내고, 마음의 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변 씨는 할머니들을 만나 배우는 게 더 많다고 말한다. 변 씨는 연극에 쓰이는 소품을 직접 만들어 오며 할머니들과의 시간을 알뜰하게 이끌어 간다.
 
김해문화원에서 이루어는 변 씨의 동화구연강좌를 배운 김광술(72·외동) 할머니도 대감리 할머니들의 연극 연습에 함께 참여한다. 7년 간 동화구연을 배운 김 할머니는 할머니들 앞에서 사자에게서 달아나는 지혜로운 토끼 공연을 했다. "다른 프로그램도 참가해봤지만, 동화구연이 내 취미에 딱 맞다. 어린이들이 '할머니 이 책 읽어주세요' 하고 다가올 때 너무 행복하다"는 김 할머니는 김해 지역 도서관에서 '이야기 할머니' 봉사활동도 한다.
 
대감리 박주현(44) 이장은 "평생 농삿일밖에 모르고 사신 분들이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문화를 접하게 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기쁘다. 대감초등학교 옥영석 교장선생님께서 이 프로그램에 많은 관심을 쏟았다. 할머니들을 모은 것도 교장 선생님 덕분이다"고 말한다.
 
연극 무대가 끝나고 노인정에는 작은 파티가 벌어졌다. 박 이장이 큰 수박 한 통을 내고, 문화원에서 떡 과자 음료수를 보내왔다. 오지 못한 할머니 소식부터 크고 작은 대감리의 안부들이 쏟아졌다.
 
주민등록으로 93세지만 실제로는 96세인 박옥순 할머니와 일일이 이름을 밝히지 못하는 여러 할머니들이 건강하길 바란다. 11월까지 연극 수업이 끝나면 개근상도 받고, 12월에는 문화원에서 멋진 공연 한 판도 벌여주시기를 기다린다. 그 무대에서 할머니들은 또 어떤 기발한 대사를 날려주실까. 어쩌면 객석을 향해 "인자 시작하까?"하고 물어볼지도 모르겠다. 우리들의 스타, 김해 대감리 할머니들의 무대가 지금 한창 연습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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