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강 김계금 일고책판이 보관돼 있는 망미재.


김해 출신 서강 김계금 뒤늦게 벼슬길
단종 폐위되자 귀향한 뒤 청빈한 생활

진영읍 와룡산 무덤가에 고사리 피어나
선비·유림들 “생육신에 더해 육일거사”

300년 뒤 언행, 업적 모아 목판 편찬
경남도문화재 지정돼 미양서원에 보관



"내 죽은 뒤에 반드시 기이한 일이 있으리라."
 
세조(수양대군)가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 충신들을 무참하게 살육하는 것을 지켜 본 서강 김계금(1405~1493)이 집현전 권지학유(權知學諭)를 그만 두고 김해에 내려온 지 40여 년이 흘렀을 때였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주변에 "내가 죽은 뒤에 기이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가족들은 얼마 뒤 세상을 떠난 그를 진영읍 신용리 와룡산에 묻었다. 그러자 무덤가에 이전에는 없던 고사리가 돋아났다. 옛날 중국 백이·숙제의 고사에도 나오듯 고사리는 예로부터 충절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진 식물이었다. 사람들은 무덤에 피어난 고사리를 보고 "하늘이 선생의 절의를 알아준 것"이라며 감탄했다. 그러면서 그를 '생육신(生六臣)에 한 사람 더한다'는 뜻으로 '육일거사(六一居士)'라고 불렀다. 

▲ 책판 26장 중 1장과 책판으로 찍어낸 <서강일고>. 

김계금은 예조판서를 지낸 김돈의 아들로 1405년 김해에서 태어났다. 그는 세종 27년(1445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단종 2년(1454년) 문과에 급제해 벼슬을 시작했다.
 
당시 궁궐 사정은 일촉즉발이었다. 1452년 세종의 아들인 문종이 2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아들인 단종이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수양대군은 단종 즉위 1년 만인 1453년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김종서를 죽이고 실권을 장악하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켰다.
 
김계금이 벼슬을 시작했을 때는 계유정난 1년 후였다. 당시 단종은 15세, 김계금은 50세였다. 어린 단종은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신세였다. 김계금은 자신보다 훨씬 어리고 힘이 없었지만 단종을 향한 충심을 지켰다.
 
역사는 충신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단종은 결국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쫓겨났고, 수양대군이 왕위에 올랐다. 1456년 집현전 학자들을 중심으로 단종 복위운동이 벌어졌지만, 거사 직전 발각됐다. 거사에 연루된 주요 인물들은 수레에 매달려 사지가 찢겨 죽는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 이때 목숨을 잃은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 하위지, 유성원 등 6명을 '사육신(死六臣)'이라고 한다. 이들 외에 벼슬을 버리고 평생 절개를 지킨 김시습, 원호, 조려, 성담수, 남효온, 이맹전 등을 '생육신(生六臣)'이라고 부른다.
 

▲ 미양서원 본실 전경.

김계금은 단종이 폐위되자 3년여의 짧은 벼슬 생활을 버리고 고향인 한림면 퇴래리로 돌아왔다. 그가 그동안 맡았던 벼슬은 사헌부 지평, 의성 헌령 등이었다. 귀향한 그는 서강정(西岡亭)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정자 뒷산을 오서산(吾西山)이라 불렀다.
 
김계금은 밭을 갈고 낚시를 하며 청빈한 생활을 했다. 후학들에게는 도덕과 의리를 강론했다. 그러면서 88세의 나이로 타계할 때까지 늘 단종을 그리워하고 기리며 살았다. 그의 무덤가에는 지금도 고사리가 난다고 한다.
 
충절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선비들은 '일대의 죄인, 만고의 충신'으로 남는 법이다. 후손들과 선비들은 김계금의 지조와 절개를 두고두고 기렸다.
 
김계금이 세상을 떠난 지 300여 년 됐을 무렵 후손, 사림 들이 그를 기리는 서원을 만들어야 한다고 두 차례 청원해 1832년 그의 묘가 있는 한림면 수조리에 서원을 세웠다. 후손, 사림 들은 이곳에 고사리를 뜻하는 '미양(微陽)'이라는 이름을 붙여 미양서원이라고 불렀다.
 

▲ 미양서원 뒷편에 자리잡고 있는 서강 김계금의 묘.
▲ 미양서원 앞에 세워져 있는 신도비와 복원비.

1850년에는 김규동을 비롯한 후손, 유림 들이 뜻을 모아 김계금의 언행, 업적, 관직 기록 등을 수집한 뒤 '서강 김계금 일고책판'이라는 목판을 편찬했다. 일고책판은 표지를 포함해 총 26장으로 구성됐다. 2000년에는 경남도유형문화재 352호로 지정됐다. 일고책판은 현재 진영읍 신용리 245-1번지 미양서원에 보관돼 있다.
 
일고책판에는 김계금이 단종을 기리며 직접 지은 시 3편 외에 후손들이 그의 업적과 관련해 모은 부록과 추모시 28수가 실려 있다. 일고책판으로 만들어 찍은 책이 <서강일고>다.
 
단종을 향한 김계금의 충심은 <서강일고>에 실린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소쩍새를 경계하는 노래'라는 뜻의 '계자규가(戒子規歌)'는 마치 단종이 영월에서 지은 시의 답시처럼 들린다. 두 시를 함께 살펴보자.
 
'달 밝은 밤/ 두견새 꾸루꾸루륵/ 그리운 정담고 담아/ 누각에 기대어 섰네/ 네 울음 구슬퍼/ 내 듣기 괴로우니/ 네 소리 없다면/ 내 근심 없겠구만/ 아아, 세상에 마음 괴로운 사람들아/ 제발 춘삼월 소쩍새 우는 누각에 오르지들 마오(단종의 시)'
 
'소쩍새여, 소쩍새여/ 네 울음 어이 그리 괴롭게도 그칠 줄 모르느냐/ 세상 사람들 소리 소리 괴로움 몰라/ 봄철 네 울음이 한량을 노래 같다더구나/ 소쩍새여, 제발 괴롭게 울지 마라/ 다만 세상에 님 그리운 사람들/ 소리 듣고 혼자 누각에 기대어 잠 못 들까 걱정이구나(김계금 ‘계자규가’)'
 
단종왕릉에 조문하는 시인 '조릉시(弔陵詩)', 사육신의 처참한 최후를 듣고 먼저 고향에 돌아왔던 것을 후회하는 내용을 담은 '망해(望海)'도 서강일고에 실려 있다.
 
서원을 세운 지 36년 만에 고종의 서원철훼령이 내려져 미양서원은 전국의 다른 모든 서원들과 함께 사라졌다. 그러다  1990년 후손들이 힘을 모아 김계금의 묘소 아래에 미양서원을 복원했다. 전체 면적 2만 4787㎡인 미양서원은 서원, 미양사, 망미재, 전사청 등 4동으로 구성돼 있다. 일고책판도 이곳에 보관돼 있다.
 
미양서원의 김해영 총무는 "과거 미양서원은 후학을 양성하는 기능을 했다. 진영읍민들이 서강의 학식과 심성을 배우고, 예절 교육을 받고, 쉼터로 가족 나들이를 할 수 있는 교육, 휴식 공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해뉴스 /조나리 기자 nari@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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