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언어적 유사성과 해상경로 근접성 때문에 가야불교 전래 후보지로 떠오르는 인도 남부 첸나이 인근의 스투파(불탑).


이종기, 인도~동남아~가야 루트 주장
“하이난·푸저우·규슈 거쳐 한반도 도착”

김병모, 허왕후릉 비석 문구에서 착안
“중국 보주 출생, 난리 피해 고향 떠나”

허명철, “인도 정착한 춘추시대 왕족 출신”
“남부 첸나이 동쪽 해안마을” 주장도 나와



가야불교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실마리가 되는 첫 사건은 김수로왕과 허황옥(허왕후)의 국제결혼이다. 허황옥의 고향으로 알려진 '아유타국'이 어디인가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해상국가 가야'의 내력과 다국적문화의 전통을 읽어내고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야불교 전래설의 기원과 경로도 허황옥 경로를 규명함으로써 찾아볼 수 있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고려문화재연구소 김병모 이사장은 "얼마 있지 않은 유물만으로 '허황옥과 가야불교는 고증이 된다, 안 된다' 하는 식의 논쟁을 넘어서야 한다. 허황옥이 어디서 태어났는지,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역사적 진실을 찾아가는 시도와 과정이 중요하다. 인도에서 왔다는 에피소드(이야기)는 수많은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만큼 당대의 모든 이동 경로와 기원을 규명하기는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런 의미와 중요성 때문에 가야의 역사를 복원하려는 많은 이들이 허황옥 일행이 어디서, 또 어떤 경로를 통해 이역만리 가야까지 오게 됐는지에 천착한다.

 
■인도 북부 아요디아 기원설
허황옥과 가야불교의 복원작업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오는 허황옥의 고향 '아유타국'이 과연 어디인가'에서 출발한다. 이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분분하다.
 
김해시는 물론 가락종친회 등에서는 아유타국을 현재 인도의 아요디아(아요디야)로 생각하고 있다. 아요디아는 힌두교의 성지여서 많은 사원이 있는 갠지스강 유역 도시다. 지난 4~10일 허성곤 시장과 가락종친회 일행이 아요디아에 다녀온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아유타국을 아요디아로 추정한 첫 번째 인물은 40여 년 전 허황옥과 가야불교의 흔적을 찾아 아요디아에 갔던 고 이종기 선생이다. 그는 아요디아 일대에는 출입문마다 물고기 장식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의문은 곧 풀렸다. 갠지스강 범람으로 수몰이 잦은 탓에 현지 주민들은 집집마다 '마주 보는 물고기', 즉 쌍어를 모시고 안전을 기원한 것이었다. 김해 곳곳에서 발견되는 쌍어와 놀랍도록 유사한 형태였다. 이종기 선생은 또 갠지스강 기슭의 아요디아 전통깃발이 <삼국유사>에 언급된 허황옥 꽃가마배의 붉은 깃발과 똑같다는 사실도 파악했다.
 

▲ 구산동 허왕후릉 비에 '보주태후허씨릉'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이종기 선생은 현지 답사를 바탕으로 1977년 펴낸 <가락국탐사>에서 인도~동남아~가야로 이어지는 '허황옥 경로'를 주장했다. 주장의 요지는 이렇다. '서기 20년 전후 허황옥 일행이 아요디아에서 출발해 태국 메남강변에 아유티아를 건설한 뒤 48년 아유티아에서 가야로 왔다. 아유티아는 쿠산 왕조의 공격으로 붕괴했다. <삼국유사>에는 허황옥 일행이 5월에 출발해 7월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인도에서 출발해 가야로 바로 오는 항해 일정으로 보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이종기 선생은 이후 영국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의 <서기 1세기 세계 교류도>를 근거로 '허황옥 일행이 인도를 출발해 아유티아에 머문 뒤 다시 항해에 나서 중국 해안선을 따라 하이난, 푸저우를 거쳐 일본 규슈까지 간 뒤 마침내 가야에 도착했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종기 선생의 주장은 고려문화재연구원 김병모 이사장, 조은금강병원 허명철 이사장 등에 이르러서는 조금씩 다르게 바뀐다.
 
김병모 이사장은 인도 아유디아~중국 보주(普州)~가야의 전래 경로를 주장한다. 그는 허왕후릉의 비석에 새겨진 문구에서 착안해 보주가 허황옥 일족이 인도에서 오는 연결고리가 된다고 추정했다. 허왕후릉 앞에는 조선 인조 25년(1641년)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비석이 있다. 거기에는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릉'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보주는 중국 사천성 안악현의 옛 이름이다.
 
김병모 이사장은 보주태후에 주목했다. 그는 '인도 아요디아에서 출발한 허황옥 일족이 중국 보주에 정착했다가 서기 47년 난리를 피해 가야로 왔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사천성 안악현 답사를 통해 인구 15만 명인 허씨 집성촌의 존재와 1~2세기에 만들어진 무덤·암벽에 쌍어문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김 이사장은 "<후한서(後漢書)>는 '보주 땅에서 서기 47년 봉기가 일어났는데, 이를 한나라가 제압했다. 봉기를 일으킨 주민 7000명이 무한으로 추방됐다'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며 "허황옥은 인도 출신 소수민족이 중국에 정착한 후 보주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봉기로 고향을 떠나게 된 일족으로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언급되는 '한사잡물(漢肆雜物)'도 김 이사장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기록에 따르면 '허황옥은 신보와 조광, 그들의 아내인 모정과 노비를 합쳐 20여 명과 함께 가락국에 왔다. 그들이 고급 옷, 금은주옥, 장신구 등 중국 한나라의 귀한 물건을 뜻하는 한사잡물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보주를 해상경로의 연결고리로 상정하는 입장에서 볼 때 설득력이 부여되는 대목이다.
 
이종기 선생, 김병모 이사장과 달리 허명철 이사장은 '허황옥의 뿌리는 본래부터 중국에서 기원했다'고 본다. 이들이 나중에 인도로 이동해서 국가를 건설한 뒤 결국 가야로 왔다는 점은 두 사람과 비슷하다.
 
허명철 이사장은 '허황옥의 조상은 허씨 성을 가진 중국 춘추전국시대 허국의 왕족이다. 이들은 대월지국에 병합된 월지국 사람이 됐다가 인도 북부로 이동해 정착했다'고 본다. 이들 일족이 쿠산 왕조 귀족으로서 아유타국에 신왕조를 수립했다는 것이다. 그는 '허황옥 일행이 아요디아를 출발, 갠지스강을 따라 인도 동부 탐록에 도착해 본격적인 항해에 나섰다'고 추정한다. 현재 동남아의 말라카 해협을 통과해 중국 광저우를 거쳐 가야에 닿았다고 덧붙인다. 허명철 이사장은 이종기 선생, 김병모 이사장과 달리 '허황옥 일행이 여러 기착지를 거치지만, 한 번 항해로 인도에서 가야로 왔다'고 보는 셈이다.
 
 

■남인도 아요디아 꾸빰 기원설
최근에는 불교계를 중심으로 인도 남부의 첸나이 동쪽 바닷가 마을인 아요디아 꾸빰을 거론하는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
 
동명대 불교콘텐츠학과 장재진 교수는 "허황옥이 아요디아에서 왔다는 주장에는 허점이 많다. 오히려 언어학적 근거나 현지 풍속 등을 고려했을 때 남인도 타밀지방이 허황옥 일족의 고향이라는 주장이 신빙성을 더 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선문대 이거룡 교수는 지난해 11월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학술대회에서 "현재 아요디아 지역에서 보는 쌍어문을 고대 아요디아 왕국에서 사용했다는 근거는 아직 없다"면서 "고대 남인도 동부 해안을 통치했던 익슈바꾸 왕조의 왕들이 스스로 아요디아 왕국의 후손이라고 믿었다는 사실은 허황옥의 고향이 남인도일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주장했다.
 
남인도 첸나이는 과거 드라비다문화의 중심지로 물고기 신앙, 고대 타밀어 등에서 가야와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그런 만큼 많은 불교 연구자들이 관심을 가지는 새로운 전래경로가 되고 있다.
 
보조사상연구원 황정일 박사는 최근 논문에서 "만일 아유타가 북인도의 아요디아라면 가락국에 닿을 가능성이 낮아진다. 아요디아는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허황옥은 바닷가인 아요디아 꾸빰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수로왕릉의 쌍어문은 남인도 드라비다족의 전통문양이며, 북인도와 달리 남인도 드라비다문화권이 모계사회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허황옥의 왕자 10명 중 두 명에게 어머니의 성을 부여한 것도 이해하기 쉬워진다고 강조했다.
 

■다른 가설들
국내 역사학계에서 허황옥 경로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던 1960년대에 허황옥의 실체를 주목하고 전래 경로를 규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1960년대 북한 사학자 김석형은 1960년대 아유타국을 일본 규슈 동북방에 있던 가락국의 분국으로 파악한 뒤 허황옥이 일본에서 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삼국유사>가 불교적인 윤색이 가미된 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허황옥이 가지고 온 한사잡물을 연오랑, 세오녀가 신라 왕에게 바친 형식과 유사한 갈래로 이해했다. 김석형은 일본 속국의 지배층이었던 허황옥이 바다 건너에서 귀한 물건을 가져와 바친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허황옥의 고향을 발해만 일대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사학자 김인배 박사는 "고대 인도와의 교류를 인정하기 어렵다"며 "월별 평균 해류를 감안하면 황해에서 제주해협을 지나서 거제도를 통해 김해만까지 쿠로시오 지류의 영향을 받는 해류를 타고 왔을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그는 허황옥 일행을 발해만 일대에서 출발한 유이민 세력으로 추정한 것이다.
 
홍익대 김태식 교수는 과거 연구에서 "허황옥이 가지고 온 물품을 '한사잡물'이라고 언급한 점과 함께 온 인물의 관직이 천부경(泉府卿), 종정감(宗正監), 사농경(司農卿) 같은 중국계 관직이라는 점을 볼 때 허황옥 일행은 한 세력 영향권이었던 한반도 서북방 낙랑의 유이민"이라는 입장을 제시했다. 그는 당시 활발한 교역을 한 가야의 대외교류와 연관지어 허황옥 일행은 중국의 선진문물을 가지고 해상을 통해서 들어온 상인집단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김해뉴스 /심재훈 기자 cyclo@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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