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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봉 능선·금병제 밭·마을 과수원… 허왕후 명복 빌던 절 어디였을까(7) 왕후사지
  • 수정 2017.03.29 09:26
  • 게재 2017.03.29 09:22
  • 호수 316
  • 13면
  • 심재훈 기자(cyclo@gimhaenews.co.kr)
   
▲ 가야시대 왕후사 터로 추정되는 금병제 뒷편 밭. 멀리 신어산과 조만강을 굽어보는 명당자리다.


<삼국유사>에 ‘452년 질지왕 왕후사 창건’
사실 밝힌다면 가야불교 실체 확인 자료

조선시대 들어 ‘임강사’로 개칭한 듯
지역 주민들 “어릴 때 큰 절 터 있었다”

곳곳에서 기와·자기 조각 등 쉽게 발견
시, 역사 실마리 풀기 위해 발굴 계획



허왕후(허황옥)과 장유화상이 가져왔다는 가야불교의 흔적을 찾는 여행은 왕후사(王后寺) 터를 찾는 것에서 시작한다. 긴 여정의 첫 걸음이다.
 
왕후사지는 응달동 태정마을에 있었다고 추정되는 절이다. 왕후사 관련 기록은 여러 문헌에서 발견된다. 그 실체를 확인한다면 가야불교의 실마리를 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왕후사라는 이름은 고려시대 일연이 쓴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처음 등장한다. '수로왕의 8대손 질지왕이 452년 허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로왕과 혼인했던 땅에 왕후사를 창건했다'고 기록돼 있다. 일연은 '창건 500년이 지나 이웃의 큰 절인 장유사의 삼강(三綱)이 사찰 소유 밭 동남쪽 경계 안에 있다는 이유로 왕후사를 폐하고 곡식 저장고와 마구간으로 만들었으니 슬픈 일'이라고 탄식했다. <삼국유사> '파사석탑조'에도 왕후사가 언급된다.
 
왕후사는 조선시대 들어 '임강사'로 이름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문헌인 <범우고(梵宇攷)>와 <김해읍지>, <경상도읍지>에는 강을 내려다보는 절이란 뜻의 '임강사(臨江寺)'로 기록돼 있다.

역사학계에서도 왕후사가 실존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합천박물관 조원영 관장은 "<삼국유사>의 왕후사 창건 기록은 다른 가야불교 기록에 비해 신빙성이 상당히 높다"고 인정했다.
 

   
▲ 금병제 뒷편 밭에서 수습한 기와편과 자기 조각.

김해시도 이러한 개연성 때문에 왕후사 발굴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1980년대부터 부산대·동아대·인제대 박물관,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등에서 지표조사를 진행했지만 아직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없었기 때문이다. 왕후사의 실체가 확인된다면 적어도 신라보다 이른 시기에 가야불교가 전래됐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셈이다. 우리나라 불교의 최초 도래 시기도 훨씬 앞당겨질 수도 있다.
 
왕후사의 흔적을 확인하기 위해 대성동고분박물관 이유진 학예사와 함께 왕후사의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거론되는 태정마을 일대를 둘러보았다. 태정마을에는 '김수로왕의 태(胎)를 묻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마을 이름도 거기에서 유래했다. 태정마을에 왕후사가 존재했다고 추정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남해고속도로 제2고속지선을 따라가다 보면 장유 김해관광유통단지와 '렛츠런파크 부산경남' 중간 쯤에 태정마을이 보인다. 모든 유서 깊은 절터가 그렇듯 왕후사지로 추정되는 응달동의 태정마을도 명당에 자리를 잡고 있다. 고속도로가 마을 앞을 지나는 바람에 낙동강 지류인 조만강과 갈라졌지만, 저 멀리 신어산·분성산·임호산과 마주하고 있다. 김해평야도 한 눈에 굽어볼 수 있다. 평야의 많은 부분은 일제강점기 때 낙동강 대동 방면에 수문이 생기기 전에는 바다였던 곳이다. 가락의 진산인 신어산과 김해의 평야, 옛바다를 가장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자리인 것이다.
 
태정마을에서는 세 곳 정도가 왕후사지 후보로 거론된다. 낮은 언덕인 태봉 8부 능선의 대나무숲 인근, 금병제 뒤편 경작지, 태정마을에서 500여m 떨어진 과수원이다. 과수원의 경우 자기 파편이 일부 나오기도 하지만, 마을 주민들 사이에 절터 내력이 전해지지 않아 가능성이 가장 낮은 곳으로 평가받는다.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는 태정마을 뒤편 태봉에 허왕후가 머문 왕후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오래 전 태봉에서 건물터, 다량의 불상편과 기와편 등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 마을 뒷산인 태봉 8부 능선 대나무 숲에는 옛날 건물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석축이 지금도 남아 있다. 지금은 석축을 제외하면 가끔 자기 파편이 수습되는 황량한 밭과 산죽(山竹) 숲 뿐이다.
 
태정마을 최용해 이장은 "어릴 때 소에게 풀을 먹이러 마을 위로 올라가다 보면 태봉 8부 능선에 큰 절터가 있었다. 마을에서는 수로왕과 관련된 절터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고 말했다. 2004년 인제대 가야문화연구소의 지표조사 당시 마을주민 유순남, 박영주 씨도 "태봉 아래 대나무숲에 탑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어릴 적 마을 어른들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 금병제 뒷편 밭의 석축. 과거 건물터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시는 이곳보다는 아래 쪽 금병제 뒤편 경작지가 왕후사지일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대성동고분박물관 송원영 학예연구사는 "산 기슭에 사찰이 건립되기 시작한 건 삼국시대 이후다. 가야시대 절인 왕후사는 태봉보다는 평지에 가까운 아래 쪽 금병제 인근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곳에 가야시대 절이 세워졌다는 가정이 역사적 기록과 부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해김씨의 제실인 '금병제' 뒤쪽에는 양파·마늘 같은 밭작물과 두릅·도라지 같은 특용작물을 제배하는 밭이 있다. 산돼지, 고라니 등이 출몰해 작물을 훔쳐 먹을 정도로 우거진 숲과 맞닿아 있다. 이곳은 평지는 아니어서 밭은 계단식으로 조성돼 있다. 서로 높이가 다른 밭 사이에는 석축이 일부 남아 있다. 석축은 농사를 지으려고 과거에 쌓았던 것인지, 아니면 건물에서 기단 역할을 하던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석축 가운데 일부에는 큰 돌로 반듯하게 쌓아 올린 흔적도 있다. 이끼가 끼고, 인공적이지 않은 석축도 있다. 이유진 학예사는 후자의 석축을 찬찬히 살피며 주목했다. 그는 "반듯하게 놓인 돌들은 (일제시대 이후 쌓은) 농경용 석축일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균일하지 않은 돌들을 모아 쌓은 형태가 옛 건물 터일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현장을 둘러보는 동안 밭에서 서너 점의 기와, 자기 편(조각)을 수습했다. 땅 속에서 왕후사의 흔적을 발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998년 인제대 가야문화연구소의 지표조사 때에도 이곳에서 삼국시대 경질토기편, 고려도기, 기와편 등이 발견됐다. 이유진 학예사는 "과거에는 기와는 고급주택에만 사용할 수 있었다. 산 중턱에 기와를 얹은 가옥은 대개 절인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농사를 짓는 조병제(60) 씨는 "이전에는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조개무덤도 발견됐다. 바다를 메워 평야를 조성하기 이전이었던 조선시대에는 태정마을 인근에 지표수가 풍부해 천수답이 유명했다. 이런 좋은 환경 때문에 조상대대로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어릴 적 어르신들로부터 이곳이 절터였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 산재한 기와·자기 조각, 일부 석축만으로 질지왕이 창건했다는 왕후사의 실제 존재를 확인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쓴 서문을 떠올린다. '국토 어디를 가더라도 유형·무형의 문화유산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영광의 왕도에서 심심산골 하늘 알 끝동네까지 아직도 생명을 잃지 않고 거기에 의연히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중략) 우리는 국토박물관의 참모습과 참된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태정마을에서 아직 과거의 찬란한 유적을 발견하진 못했지만, 유 전 청장의 말처럼 왕후사 이야기와 소소한 흔적들은 바로 가야의 뿌리를 찾아가는, 그리고 가야의 역사를 반추해 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김해뉴스 /심재훈 기자 cyclo@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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