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는 우리 식탁에서 빠질 수 없는 재료다. 급식이 없던 시절 '엄마표' 도시락 반찬의 단골메뉴는 단연코 멸치볶음이었다. 집에서 싸온 반찬들을 내어놓다 보면 그중에 멸치반찬은 반드시 있었다. 조촐한 술자리에도 고추장에 찍어 먹는 마른멸치라면 안주로서 일단은 불평이 없었다. 갓 잡은 멸치는 소금에 절여 젓갈로 만들어 발효시켜 온갖 음식의 양념으로 이용한다. 특히 남부지방에서 김치를 담글 때 필수적인 재료다.
 
우리는 평생 국물을 먹는다. 국이 없는 한식 밥상은 없다. 시래깃국, 김칫국, 소고깃국, 콩나물국, 미역국 등 어떤 국이라도 있어야 밥을 먹는다. 사는 곳이 일정치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북방형 유목민족의 음식이 건식(乾食)이라면, 한반도에 내려와 정착한 남방형 농경민족인 우리는 숟가락으로 '국'과 '탕'을 먹는 습식(濕食) 음식문화를 갖고 있다. 이러한 한국인의 식생활에 필수적인 깊은 맛의 국물을 우려내는 데 일등공신이 바로 멸치다.
 
멸치는 바다 표층에서 서식하는 멸치과에 속한 물고기다. 방어, 볼락 같은 포식성 물고기들의 중요한 먹이고, 갈매기와 같은 해양 조류의 먹잇감이다. 서양에서는 로마시대부터 현재까지 '엔쵸비'를 소금에 절여 발효·숙성시켜 우리의 멸치젓갈처럼 전통적 음식으로 즐겨 먹고 있다.
 
'멸치도 생선이다' '칼슘의 왕' '마른 멸치' 등등 멸치하면 금방 떠오르는 친숙한 표현들이 많은 것처럼 멸치는 우리와 아주 가까운 생선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알고 보면 멸치가 우리 민족의 생활에 깊숙이 자리잡은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멸치라는 이름은 '물 밖으로 나오면 금방 죽어버린다'는 데서 붙여졌다. 보관이 쉽지 않았다는 의미다. 1850년경 이규경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 '한 번에 많이 잡히며, 미처 말리지 못하면 썩으므로 거름으로 쓰기도 한다. 말린 것으로는 반찬을 만든다'고 해 처음으로 상세히 소개된다. 조선 전기나 그 이전의 기록에는 많이 잡힌다든가 음식으로 먹었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는다.
 
예전에는 멸치가 단일 품목의 생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바다에서 나는 작은 물고기'의 통칭을 의미했다. 나중에는 점차 건조돼 유통되면서 '말린 물고기'라는 의미 정도를 갖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멸치는 그야말로 천한 물고기로 여겨졌던 것이다.
 
한반도에서 천대받던 멸치 어업은 개항기 일본으로부터 비료용 마른 멸치의 수요가 증가한 덕분에 활기를 띠게 됐다. 당시 '물 반 멸치 반'이라 불릴 만큼 한반도 남쪽의 멸치어장은 풍성했다. 일본인의 어업 진출이 시작된 이후 멸치는 명태, 조기와 함께 조선의 3대 어종으로 부상했다.
 
멸치가 우리 식탁으로 올라온 것은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 이후부터였다. 6·25전쟁 당시 일본인 멸치어업의 근거지였던 부산으로 피난민들이 몰렸다. 이때 멸치로 국물을 내고 배급품 밀가루로 면을 뽑아 한 끼 식사를 해결하게 되면서 멸치국물 국수가 보급됐다는 게 역사의 사실이다. 이전까지 한반도에서는 육수라 하면 그야말로 소나 닭 같은 육류나 채소를 푹 고아내어 이용했다. 멸치 같은 해물을 이용해서 국물을 만든 곳은 일본이었다. 김치에 이용되는 멸치젓갈 역시 19세기 들어 고추를 넣어 김치를 담그면서 사용량이 더불어 늘어났다.
 
부산 기장에 있는 대변항은 우리나라의 멸치 어획량의 60%를 차지해 '멸치의 항구'라고 불린다. 멸치는 지방질이 많은 산란 직전의 초봄과 가을철이 제철이어서 매년 4월이면 대변항 일원에서 기장 멸치 축제가 열린다. 간에 열이 많은 목양·목음 체질이나 통풍질환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봄철 멸치를 즐겨볼 만하다. 김해뉴스
 




조병제 한의학·식품영양학 박사
부산 체담한방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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