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해훈 시인·동아대 홍보팀장.

남녀 간의 사랑은 한 가지가 아니다. 정도를 벗어난 사랑이 있고, 서로를 진정으로 아껴주면서 오랫동안 지속하는 사랑도 있다. 여기서는 신분이 다른 한 사대부와 김해지역 기생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고 품격 있는 사랑을 이어간 이야기를 다루려고 한다.
 
고려 후기의 문신인 야은 전녹생(1318∼1375)은 지금의 동상동 연화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연자루에서 김해 기생 옥섬섬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연분을 쌓았다. 1363년 감찰대부로 원나라에 가서 황태자에게 예물을 드리고 돌아온 전녹생은 경주의 행정 책임자인 계림윤에 제수되었다. 이 무렵 두 사람이 만났던 것이다.
 
연자루라는 누정이 어떤 곳이길래 두 사람이 여기서 함께 시간을 보냈을까? 연자루의 건립에 대해서는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 이전부터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를 뒷받침해줄 자료는 없다. 연자루는 김해부 객관의 동쪽에 흐르는 호계 위에 세워진 높은 누정이었다. 이곳에서는 여러 공식적인 행사를 거행하기도 하고, 관리나 문사들을 영접하거나 전송하기도 하였다. 전녹생이 김해를 방문하자 당시 김해부사가 그를 접대하였을 것이다. 김해부 관기였을 옥섬섬이 그 자리에 불려와 거문고 솜씨를 뽐냈던 모양이다. 그녀의 거문고 소리에 도취된 전녹생은 문신답게 '김해 기생 옥섬섬에게 주다'라는 제목의 시를 한 수 지어 주었다.
 
'바다 위 신선의 산 칠점산은 점점이 푸르고/ 거문고 가운데 흰 달이 둥글고 밝구나/ 세상에 섬섬의 손이 없다면/ 누가 능히 태고의 정을 탈 수 있으리'
 
전녹생은 시에서 옥섬섬을 욕망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내용은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대신 그녀의 거문고 솜씨를 칭찬하면서 가락국 때 거등왕이 칠점산에 살던 참시선인을 초현대로 초대하여 거문고를 타게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태고의 정'을 회상하고 있다. 시의 첫 구를 보면 연자루가 지금의 김해공항 부지의 물 위에 떠 있던 칠점산이 보일 정도로 누정이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옥섬섬과 연자루에서 인연을 맺었던 전녹생은 세월이 흘러 여러 직책을 거친 후 경상도 도순문사로 합포(마산)에 와 옥섬섬을 다시 만나게 된다. 이 이야기를 들은 포은 정몽주가 전녹생의 시를 차운하여 시를 지었다. 그 시의 제목은 '옛날 재상 야은 전녹생이 계림판관이 되었을 때 김해 기생 옥섬섬에게 준 시다. 10여 년 뒤에 야은이 합포로 와서 지킬 때 옥섬섬은 이미 늙었는데, 그녀를 곁에 불러 두고 날마다 가야금을 타게 했다. 내가 그것을 듣고 그 운에 화답하여 벽에 네 개의 절구를 적는다'이다.
 
전녹생과 옥섬섬의 아름답고 절제된 러브 스토리는 김해 뿐 아니라 합포에까지 많이 회자되었던 모양이다. 정몽주가 1374년 경상도 안렴사로 합포에 내려와 일화를 듣고 공감하여 시를 읊은 것이다. 만약 두 사람의 사랑이 육욕적이고 아름답지 않았다면 정몽주가 그 이야기를 소재로 시를 짓지도 않았을 것이다.
 
민간에 퍼져 있던 이야기를 다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중요 직책에 있는 관리가 부임지에서 한 기생을 만났고, 아름다운 그녀에게 마음이 끌리었지만 자신의 신분과 임무 등을 고려해 절제하고 마음속으로만 그리워하였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른 후 인근으로 발령받아 갔다가 그녀가 생각 나 다시 만났으나, 이미 그 기생은 늙어 있었다.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관리는 그녀를 매일 불러 곁에서 거문고를 타게 하며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녀와의 사랑을 확인했던 것이다.
 
전녹생과 옥섬섬의 사랑 이야기를 소재로 한 시는 이후에도 여러 문인들에 의해 지어졌다. 고려 말 조선 초의 시인 권근(1352~1409)은 1390년 김해에 유배왔다가 '차김해연자루시삼운'라는 제목으로 세 수의 시를 지었다. 그는 둘째 수에서 '섬섬의 옥 같은 손은 이팔청춘이라/ 춤추는 비단 치맛자락에 향기가 이네/ 글 잘하는 전녹생은 거문고에 취해 있었지/ 높은 풍류 이어받은 이 몇이나 될까'라고 읊었다. 이 시에도 전녹생과 옥섬섬의 신분과 성격이 잘 드러나 있다. 이들의 일탈하지 않은 낭만적 사랑을 누가 이어갈 수 있을까, 라면서 그들의 격 높은 사랑을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리라.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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