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정이 판화가.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로 가슴이 먹먹할 때가 더러 있다. 그럴 때 마음을 다스리려면 바깥바람 쐬면서 걷는 것이 약이다. 며칠 전에도 한 번 그랬다. 나이를 먹어 어지간한 일에는 무덤덤한데, TV에서 인양된 세월호의 처참한 몰골을 보니 울분이 치밀어 가슴이 먹먹했다. 늘 하던 대로 집을 나섰다. 이왕 걷는 김에 우리 고장에서 살다 간 선현들의 발자취를 찾아 한 바퀴 돌아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봉황대 황세바위 쪽에서 패총까지 걸었다. 봉황대는 김해 거인리(지금의 외동) 출신의 청빈 선비 유진옥이 강학을 했던 '춘산정(春山亭)'이 있던 곳이다. 그의 시 '청계목욕(淸溪沐浴)'을 옮겨 본다.
 
'한 구비 찬물 맑고도 힘차게 오르나니/ 티끌세상 옷깃에 묻은 때 씻어내는구나/ 아깝도다 속세에 묻혀 지내는 사람아/ 어찌해 보배 거울 찾지 못하는가' 
 
망국의 시대를 살았던 선비가 당시의 어지러운 세상, 시류에 따라 절의를 버리는 세태를 안타까워하며 읊은 시다. 한창 어지러운 오늘날 시류에도 딱 맞는 시라 하겠다.
 
늦게 나선 터라 서산으로 지는 해를 등지고 발길을 동쪽으로 향했다. 대동면 초정리에는 남명 조식이 강학하던 '산해정(山海亭)'이 있다. 남명은 일생토록 타락한 권력을 질타하고 무기력한 지식인사회에 경종을 울린, 이른바 '선비정신'을 실천한 큰 선비다. 후학들에게 '경'으로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서 실천하라고 했던 그의 가르침은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행에 옮기는 실천철학이었다.
 
우리는 국정농단 사건을 통해 드러난 수많은 지식인들의 더러운 민낯에 참담해 했다. '야, 이놈들아, 배웠으면 배운 값을 하라'고 일갈하는 남명의 환청이라도 아쉬운 대목이다.
 
남명은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옷고름에 달고 그 소리를 들으며 스스로 경계와 반성을 멈추지 않으려 했다. 그가 제자들에게 강조한 것은 철저한 자기 절제를 통해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한 절의였다. 그가 몸소 실천하는 게 서릿발 같았다.
 
온 나라가 안으로 곪을 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 당시의 세태을 두고 올린 '단성소(丹城疏)'라는 제목의 '을묘사직상소'는 이렇게 돼 있다.
 
'전하의 나랏일은 이미 잘못되었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없어졌으며,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나버렸고 민심도 이반되었습니다.'
 
그는 임금을 향해서도 거침없는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도 모자라 '대비(문정왕후)는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국왕(명종)은 아직 어리니 돌아가신 왕의 한 고아일 뿐'이라며 목숨을 건 극단의 직언도 서슴치 않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 파국의 단초가 직언이 없고 직언을 용납하지 않는 언로가 차단된 불통의 통치행태였다면, 공사를 구분하지 않고 사사로운 인연을 편애하고 유유상종함으로서 쌓인 해악은 결론이라고 할 것이다. 스스로 경계와 반성을 소홀히 한 탓이다. 패션외교를 한다며 한껏 맵시를 뽐내던 그 수많은 의상에 장식품 삼아 성성자 방울을 하나 달았더라면 어땠을까. 헌정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의 구속이라니 생각할수록 안타까움만 더할 뿐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가슴이 먹먹할 때가 더러 있다. 그럴 때 바깥바람 쐬며 걷는 것이 약이다. 그러나 그보다 가슴에 성성자 방울을 하나 달아 평시에 마음을 다스려 평상심을 잃지 않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바꿀까, 라고 생각해보다 바깥바람 쐬기와 걷기를 마감했다. 생각 같아서는 대눌과 소눌 '형제선비'의 근거가 있는 생림면 금곡을 거쳐 밀양 여곡과 창녕 마수동까지 발길을 늘리고 싶었으나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해 아쉬웠다. 
 
참, 곧 개막하는 '가야문화축제' 기간 중에 '김해남명문화연구회'에서 부스를 마련해 남명과 관련한 저작물과 학술자료를 전시하고, 남명 한시 낭송회와 연구회 회원 작품 전시회도 갖는다고 한다. 맑은 눈에 귀를 열고 간다면 분명 귀한 소득이 있지 않을까 싶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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