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어산의 기암괴석을 배경으로 자리잡은 은하사 전경. 임진왜란 때 소실됐지만, 1644년 중건됐다고 전해진다.


1857년 새긴 ‘취운루 중수기’ 기록
“수로왕, 은하사·세 암자 건설 명령”

절 남쪽에 삼차수·불암창진 설치돼
수많은 배들 낙동강 오르내렸을 듯

대웅전 본전에는 신어·쌍어문 새겨져
오른편 삼성각에는 장유화상 진영 봉안
5층석탑 ‘연좌삼자’ 문양은 인도 영향


 
 

▲ 삼성각에 있는 장유화상 진영.

가야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조선시대 후기까지도 김해평야는 바다였다. 그곳을 내려다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김해의 진산, 신어산이 있다.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늙은 소나무가 빼곡한 산 중턱에는 은하사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이곳에는 대웅전과 화운루, 설선당, 명부전, 응진전, 요사채 2동과 객사, 산신각, 종각 등의 건물들이 있다. 1970년대 대성스님이 주지로 부임해 낡은 전각을 보수하고 도량을 정비해 현재 절의 모습을 갖췄다.
 
은하사는 가야 수로왕 때 여동생 허왕후(허황옥)를 따라 이역만리 인도 아유타국에서 온 장유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30년 넘게 은하사를 지킨 대성스님은 "과거 장유화상이 허왕후 일행과 함께 신어산 앞 바다를 통해 가야에 왔고, 신어산에 정착했다"고 설명했다.
 
1857년 은하사의 누각 중 한 곳인 취운루를 새로 지은 일을 기념해 새긴 '취운루 중수기'를 보면 '가락국의 왕비 허왕후가 천축국(인도)에서 올 때 오빠 장유화상이 함께 왔다. 천축국은 본래 부처의 나라이기에 수로왕이 은하사, 명월사 그리고 작은 암자들를 창건하라고 명하고 부암(父菴), 모암(母庵), 자암(子庵)이라 하여 근본을 잊지 않는 뜻을 보였다. 이는 허왕후의 소원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인제대 이영식(역사고고학과) 교수는 2010~2012년 <김해뉴스>에 연재했던 '신김해지리지'에서 절의 유래를 보다 명확하게 기록했다. 

“김수로왕이 아유타국에서 온 장유화상과 함께 절을 창건하여 산 이름을 금강산, 절 이름을 금강사로 하였다. 근년의 학술조사에 발견된 은하사 시왕전의 상량문에서는 1761년 은하사가 소금강사(小金剛寺)로도 불렸음이 확인되었다. 영구암을 소금강이라 했던 것과 바로 연결되는 대목이다. 결국 이후 은하사는 서림사나 은하사로 불리게 되었다."
 

▲ 1857년 취운루를 새로 지은 일을 기념해 새긴 '취운루 중수기'. 김수로왕이 은하사 등을 창건하라고 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은하사는 과거 서림사(西林寺)로 불렸다. 신어산 서쪽에 서림사를, 동쪽에 동림사(東林寺)를 지어 가야국의 번영을 기원했다는 것이다. 조선 중기까지의 연혁은 알려지지 않고,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44년(인조 22년) 중건했다고 전해진다. 신어산은 예전에는 은하산(銀河山)이라고 불렸다. 그래서 절도 은하사라고 부른다. 1989년 봄 신어산에 큰 산불이 났지만 다행히 은하사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은하사는 불교가 성행했던 통일신라, 고려시대에는 매우 번창한 사찰이었다. 한때 절 아래에는 암자 9개가 있었다고 한다. 2013년 경남대 산학협력단이 내놓은 '은하사 대웅전 기록화조사보고사'에는 '고지도에 나타나는 은하사는 김해 읍치 동쪽의 서림사라는 이름으로 돼 있다. 은하사 남쪽에는 낙동강이 세 갈래 물길로 나누어지는 삼차수가 있고, 여기에 큰 나루터로 보이는 불암창진이 있어 낙동강을 오르내리는 세곡선 등 많은 배가 들락거렸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은하사가 심산유곡의 한적한 사찰은 아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라는 설명이 들어있다.
 

▲ 대웅전 대들보에 그려진 신어.
▲ 인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5층석탑.

은하사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되면서 과거의 영화를 잃었다. 성리학이 세상의 주도적인 이데올로기가 된 상황에서 조선 후반까지 초라한 산사에 불과했다. 1835년 제작된 현판에는 은하사를 '한때 명승으로 알려졌으나 지금은 승방 하나와 암자 두 개만 남아있다'고 기록돼 있다.
 
9개 암자 중에서는 영구암과 천진암 두 개만 남아 있다. 지장암과 청량암은 터만 남았다. 대성스님은 "오래 전에는 온 산에 작은 암자들이 있었다. 은하사 위쪽 밭이나 산자락에도 좋은 터에는 옛 건물 주춧돌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은하사에 남아 있는 각종 현판을 통해 은하사의 이력을 더 살펴볼 수 있다. 1753년에 제작된 서림사 상고중성서(西林寺 象鼓重成序), 1812년 판각한 것으로 전해지는 중수서림사선당기(中壽西林寺禪堂記) 등 대웅전과 부속 전각의 현판 13개가 남아 있다. 중수서림선당기에는 '수로왕이 처음 서림사를 창건할 당시 세 채의 불전과 일곱 채의 요사채(스님의 생활공간) 및 영구암이 옛 토성 동쪽 10여리 신어산 기슭 동북쪽 언덕에 있었다'고 적혀 있다.
 
사찰의 본전에 해당하는 대웅전은 정면 3칸의 아담한 규모다.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오래 전인 1644년 건립돼 1801년 중창된 것으로 전해진다. 1983년에는 경남 유형문화재 제238호로 지정됐다. 대웅전의 대들보와 대웅전 불단에는 용의 머리에 물고기 몸통인 신어(神魚)와 서로 마주보는 쌍어 문양이 뚜렷이 새겨져 있다. 벽화에도 장유화상, 수로왕 7왕자의 스토리가 담겨 있다.
 
대웅전 오른편에는 삼성각이 있다. 이곳에는 은하사 창건설화에 나오는 장유화상의 진영(얼굴 그림)이 봉안돼 있다. 대성스님은 옛 은하사를 건립했다고 전해지는 장유화상을 이렇게 설명했다.
 
"가야시대 사람들은 장유화상을 신선이라고 봤을 것입니다. 대각자(大覺者), 그러니까 크게 깨친 분이었죠. 장유화상 당대에는 불교의 흔적을 남기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는 사찰, 불탑이라는 형식이 아니라 작은 터만 있으면 어디라도 집을 지어 수행을 했습니다. 인도에서 온 장유화상이 원주민들과 소통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수행에 중점을 두면서 조카들인 수로왕의 7왕자를 가르쳤을 것으로 봅니다. 인도에서 사용하던 이름이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가야의 토착세력 가운데 통일신라 시기에 와서 장유화상이는 이름을 붙였을 것입니다."
 

▲ 은하사 입구 연못에 연등이 설치돼 있다.

은하사에는 건물 15동뿐 아니라 연못, 다리, 부도탑이 있다. 대웅전 아래 마당의 5층석탑은 가야시대 흔적을 보여주는 조형물이다. 석탑은 온전한 석탑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무너진 탑의 부재를 가져와 하나로 엮어 만든 탑이다.
 
대성스님은 "기단부와 1층은 원래 있던 것이지만, 다른 층의 일부는 동림사의 무너진 탑에서 가져왔다. 탑의 부속 중에서 1층 옥개석의 연꽃 문양은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연좌삼자' 문양이다. 인도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가야불교의 다양한 가능성과 단서들이 산재하는 은하사지만 경주 감은사지, 익산 미륵사지처럼 고대불교의 직접적인 자취를 찾을 수는 없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모습은 아직도 찾지 못한 가야 왕궁지와 허왕후 초행길처럼 여전히 망가져 있고, 우리가 발굴하고 찾아 나서야 할 가야역사의 한 단면일지 모른다.
 
김해뉴스 /심재훈 기자 cyclo@gimhaenews.co.kr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