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가야사국제학술회의가 지난 7, 8일 김해국립박물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김해시가 주최하고 인제대 가야문화연구소가 주관한 이번 학술회의는 '가야인의 불교와 사상'을 주제로 진행됐다. 행사에는 우리나라 외에 인도, 일본 등에서 학자 7명이 발표자로 참여했다. 학술회의 발표문과 토론 내용을 정리한다.

 
 

▲ 한국, 인도, 일본 학자들이 지난 8일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열린 가야사학술회의에서 '가야인의 불교와 사상'을 주제로 토론을 벌이고 있다.

 
 

 산토쉬 굽타 규장각 연구자
“아요디야 미쉬라 왕조 역사 불과 300년”

 이광수 부산외대 교수
“김병모 교수, 검증 없이 신화 퍼뜨려”

 주영민 일제강제동원역사관 부장
“4세기 해상으로 가야불교 전파 가능성”

 박장식 홍익대 교수
“인도 철기, 한반도 기술 기원 규명 기대”




■ 한국·인도 외교사에서의 아유타국과 김해 / 서울대 규장각 산토쉬 굽타 '박사 과정 이수 후 연구자'
허왕후(허황옥)는 1세기경 인도 아유타국에서 김해 가락국으로 왔다고 한다. 중국에 정착했다가 김해로 왔다는 주장이 있고, 중국~태국~일본을 거쳐 김해로 왔다는 학설도 있다. 고대 인도와 한국의 관계를 인도 역사의 기록 측면에서 자세하게 살펴봐야 한다. 이 시기 아유타국(현재 아요디아) 역사 연구는 거의 없다. <삼국유사> 서술을 기반으로 인도의 역사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김수로·허왕후 신화는 한국-인도 관계를 보다 밀접하게 만들었지만, 이 과정에서 '신화의 왜곡'이라는 불행한 현상을 남기기도 했다. 가락중앙종친회는 현재 아요디아의 미쉬라 왕족 후손을 허왕후의 후손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미쉬라 왕조의 역사는 300년 밖에 되지 않았다. 1947년 인도가 분열되기 전 565개의 왕국이 있었다. 이 때 미쉬라 왕조가 왕가로 등재됐는지조차 불분명하다. 미쉬라 왕조의 후손과 허왕후와의 연관성을 찾는 것은 한국-인도 교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인도는 카스트 제도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이다. 
 
허왕후의 이름이 '스리 라트나'로 바뀐 것 역시 안타깝다. N. 파르타사라티 전 한국주재 인도대사가 쓴 책에서 허왕후는 스리 라트나로 묘사된다. 이 책은 학술전문 도서가 아니지만, 고위직인 대사가 썼고 정부출판사가 출판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최근에는 인도 정부기관에서도 인정받는 추세다. 그녀의 새로운 이름은 오히려 <삼국유사>에 나오는 설화의 개념을 약화시킬 수 있다. 한국-인도는 더 깊은 관계 유지를 위해 이러한 신화의 왜곡을 막아야 한다.
 
■ 허왕후 신화 만들기 / 부산외대 이광수(인도학부) 교수
허왕후 신화의 정확한 원형은 알 수 없지만, 그 뼈대가 만들어진 이후 그 위에 다른 설화가 만들어지고 또 흡수되면서 확대됐다.
 
먼저 허왕후 신화는 호계사와 같은 불교 사찰에 의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후 조선조에 들어 성리학의 가문정치를 만나면서 허왕후는 실재하는 역사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양천허씨가 신화 속의 그를 실제인물로 여기고 '보주 태후'라는 시호를 붙여 족보에 올린다. 18세기 들어서는 김해 명월사를 비롯한 작은 사찰들이 사원 비즈니스 차원에서 적극 나서며 신화를 또 한 번 확장시킨다.
 
허왕후가 인도에서 왔다는 주장은 아동문학가 이종기 씨가 1977년 출간한 탐사문 형식의 수필에서 시작됐다. 그것이 '국민신화'로 떠오른 것은 고고학 전공 김병모 교수 탓이다. 그는 사료 검증을 전혀 하지 않고, 20세기에 만들어진 이야기를 마치 신화의 원형인 것처럼 말하면서 수로왕 시대의 역사를 논했다. 특히 허왕후가 오빠인 장유화상과 같이 가락국에 왔다거나, 허왕후가 아들을 몇 명 낳았다 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는 이를 무차별적으로 언론에 살포시켰다. 여기에 위대한 한민족 민족주의까지 더해지면서 '국민 신화'가 돼 버렸다. 
 
설화는 문학이나 예술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다. 이야기로서의 문화자산이라는 가치를 가질 뿐이다. 설화를 역사적 실체로 인정할 경우 문제는 달라진다.
 
■ 가락국 불교 전승 관련 유적 연구 / 일제강제동원역사관 주영민 학예연구부장
가락국의 불교 수용 과정은 제한된 자료로 인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간 연구자들 사이에서 다양한 논의가 진행돼 왔다.
 
불교가 기원전 1세기 초 동남아시아를 거쳐 가락국으로 전래됐다는 설, 가락국에 불교가 수용되지 않았다고 하는 설, 인도나 백제 또는 남중국을 통해 5세기경에 전래됐다는 설이 있다. 이 중 세 번째 설이 가장 유력하게 인정받고 있다.
 
5세기 중엽(452년)에 제8대 질지왕이 허왕후를 기려 그가 수로왕과 혼인했던 땅에 왕후사를 창사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신빙성이 높다. 김해지역이 아니더라도 5세기 중엽 이후에 함안, 합천, 고령 등과 같은 가야문화권에서 연화문 등의 불교 관련 고고학 자료가 확인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불교가 한 나라에 전래된 시점은 국가에서 불교를 공인하는 때로 본다. 전래된 불교는 민중이 받아들이기에 거부감이 없어진 후에야 국가 공인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5세기경에 불교가 가락국에 전래됐다는 설도 재검토할 여지가 있다고 판단된다. 사적기록과 고고학 조사에 의지해 검토해 본 결과 적어도 4세기 대에 해상교통로를 통해 가락국으로 불교가 전래됐을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다.
 
왕후사가 있던 자리는 김해 장유면 응달리 태정산 일원으로 추정할 수 있다. 태정산 일원은 해상과 내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길목에 있는 요지다. 왕후사와 관련된 유적지 조사는 김해시 의뢰로 2004년 실시됐다. 그 결과는 학계에 보고됐지만 설화로 치부돼 잊혀졌다. 당시 조사보고서에 '사찰 후보지를 1곳씩 단계적으로 조사해 나가자'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아직 조사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 가야·신라의 철기기술 체계 형성에 미친 인도의 영향 / 홍익대 박장식(재료공학부 금속공학전공) 교수
인도 비다르바 지역의 거석문명 유적지에서 출토된 철기유물을 분석했다. 기술 체계는 탄소함량이 낮은 연철소재를 생산하는 블루머리 제련법이, 제강법으로는 침탄법이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주철제련과 탈탄에 의한 제강법을 근간으로 하는 전통적인 중국식 기술체계와는 분명하게 구별된다.
 
인도 철기유물들은 판상 또는 봉상의 비교적 단순한 모양으로 만든 뒤 한쪽 끝을 날 형태 또는 침상으로 가공해 칼·도끼·화살촉 등의 기능을 수행하게끔 만든 것이 대부분이었다. 연철을 두드려 형상가공을 완료하고, 날 부위는 침탄 처리를 해서 탄소 함량을 높였다. 때로는 담금질 열처리를 추가해 강도를 극대화한 흔적이 관철되기도 했다. 대부분이 완제품 형태이면서 필요할 때에 다른 용도의 것으로 제작할 수 있도록 특별히 만들어졌다. 중간소재로서의 기능도 담당했음을 의미하며, 철기기술의 표준화가 촉진됐음을 의미한다. 이들은 유통에 필요한 지역 간 교류 네트워크가 활발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반도 남단의 옛 가야와 신라지역에서도 이와 같은 독특한 철기 기술체계가 실행됐다. 주철을 근간으로 하는 중국식 기술 체계와 분명하게 구별된다는 점에서 중국을 한국 철기기술의 기원으로 보는 기존의 견해와 대치된다. 인도의 철기기술 연구가 고대 한반도에 존재했던 비중국식 철기기술의 기원을 밝히는 데 큰 의미가 돼 줄 것으로 보인다.
 
■ 가야지역의 선사·고대 수변의례 / 중부고고학연구소 윤호필 연구위원
의례란 '제사'와 비슷한 개념이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의식적 행동이나 직접 종교와 관계없는 세속적인 행사도 포함한다. 제사보다 포괄적인 개념이다. 수변의례는 '물의 의례' 중 하나다. 물과 관계된 장소에서 다양한 대상에게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행하는 의례를 말한다.
 
발표대상은 가야지역이다. 범위는 청동기시대~삼국시대로 한정한다. 대상유적은 김해 봉동황유적, 산청 묵곡리유적, 고성 동외동 유적을 포함한 10개다.
 
청동기시대~삼국시대 유구의 형태, 의례 행위, 공헌물, 의례용 기물 등이 변화했어도 기본적인 맥락은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청동기시대에는 주로 취락을 중심으로 집단의례가 이뤄졌다. 집단의 안녕과 생산량 증대가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다. 삼한시대에는 의례의 형태나 종류가 매우 다양해졌다. 특히 청동기나 철기를 묻은 것은 집단 의례가 유력개인이나 소수집단을 중심으로 본격화됐음을 말해준다. 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의례 양상이 보다 체계화되고 대규모화돼 국가 주도의 의례도 이뤄진다.
 
가야지역에서는 하천이나 저습지를 기반으로 한 의례보다 해양을 기반으로 한 의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가야가 남해안의 중요한 교통로를 차지하고 있어 해양교류를 빈번하게 하면서 해양세력으로서의 역할을 키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봉황동 유적의 봉황대 구릉 일대는 삼국시대 금관가야의 중심취락이다. 대규모 패총을 비롯한 호안시설, 제방, 토성 같은 기반시설 등이 밀집해 있어 다양하고 체계적인 대규모 의례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대 동아시아 바닷길의 개통과 김해 / 서울대 권오영(국사학과) 교수
고대국가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는 항구도시를 바탕으로 형성된다는 것이다. 가락국이 해양왕국임은 그동안의 연구를 통해 알려진 사실이다. 가락국은 다른 나라뿐만 아니라 여러 가야국 안에서도 해상교류의 중심이 됐다. 지금까지 연구로는 북쪽 지역 나라들과의 물건 교류가 주였다. 그러나 3세기 후반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에서 고알루미나 소다유리가 급증했다는 점을 보면 동아시아와의 교류도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종합 토론 결과
지금까지 기존학회에서는 우리나라 고대문화를 북방지역 기준으로 평가했다. 이번 학회는 남방을 기준으로 보기 시작하는 단서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철기문화를 좀 더 체계적으로 폭넓게 분석해서 가야와 인도의 철기 관계를 연구하는 게 필요하다. 유리문화의 교류에 초점을 둔 것 역시 가야사 연구에 큰 진전이라고 본다.
 
지금은 자연과학 분석 측면에서 당시의 해상교역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허왕후의 실체를 알아가는 단계다. 앞으로는 단순히 김해-인도가 아니라, 문화가 오가는 과정을 들여다보기 위해 동남아를 비롯한 주변국과의 교류도 살펴 봐야 한다.
 
김해뉴스 /정리=이경민 기자 min@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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