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기획.특집 김해의 뿌리 '자연마을'을 찾아서
김해 최고 ‘효자마을’ 명성 걸맞게 지역에서 가장 먼저 경로잔치 거행(1) 장유 유하동 하손마을
  • 수정 2017.04.26 10:52
  • 게재 2017.04.19 09:49
  • 호수 319
  • 15면
  • 배미진 기자(bmj@gimhaenews.co.kr)

<김해뉴스>는 2011~2014년 100회에 걸쳐 '김해의 뿌리-자연마을을 찾아서' 기획연재를 게재했다. 첫 연재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후에도 흙과 나무, 사람 사는 이야기가 있었던 자연마을에는 여전히 시멘트가 부어지고 생명은 뿌리째 뽑혀나가고 있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혀지기 전에 김해의 원형질과도 같은 자연마을 시리즈를 다시 진행한다.



 

   
▲ 1960년대 하손마을의 자랑이었던 풍차.

450년 전 생겨난 경주최씨 집성촌
‘겸손하게 살라’는 뜻 담긴 마을 이름

뒷산 유하패총은 철기시대 조개더미
1960년대 미국선교사 건설 풍차 유명

옛날에는 아름다운 동춘들 농사 활발
지금은 외국인근로자·공장트럭이 시끌



"하손마을의 역사는 자그마치 450년입니다. 시간에 비례하듯 마을의 자랑거리도 아주 많지요."
 
장유 유하동에서 가장 큰 마을인 하손마을은 450년 전 경주최씨의 집성촌이었다. 1600년경 마을에 처음 자리를 잡은 최계덕(繼德·1570~1621)이 입향조(마을에 맨 처음 들어온 조상)다. 곡부공씨 가문이 뒤이어 들어와 마을이 커지게 됐다.
 
하손마을의 이름에는 항상 겸손하게 살라는 선인들의 뜻이 담겨져 있다. 현재 마을에는 87가구 220명의 주민들이 밭작물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청년이 별로 없는 마을이지만 초등학생이 7명이나 있어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는 끊이질 않고 있다. 어린이들 때문인지 마을회관 앞에는 알록달록한 미끄럼틀과 그네, 정자가 설치된 작은 공원이 있다.
 
하손마을 입구에 세워진 비석에는 '동녘개 동춘들 유하천 앞바당'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동녘개는 이웃마을인 후포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어 갯가를 형성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동녘에 있는 갯벌'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장유면지>에 따르면 후포마을 앞에는 나루터가 있었다. 바닷물이 들어오면 하손마을 앞을 앞바당들, 후포마을 앞 농지는 뒷바당들이라 불렀다고 한다. 예전에는 하손마을 서쪽으로 드넓은 동춘들이 펼쳐졌지만, 지금은 매립 후 돋운 땅 위에 공장이나 주택만이 있을 뿐이다.
 
하손마을은 1960년대 '풍차마을'로 유명했다. 유하천 옆 공동우물에서 물을 길어먹던 시절, 미국 선교사가 풍력으로 물을 끌어올리는 풍차를 세워 마을의 식수를 공급하게 했다. "선교사가 직접 미제 파이프를 공수해 와 신기하게 봤던 기억이 있어. 하손마을은 황토 땅이어서 파면 팔수록 무너질 위험이 컸지. 135m 길이로 땅을 파야 했어. 굉장히 위험해서 작업하던 인부 하나가 도망갈 정도였다니까. 지금 생각하면 무모했지만 덕분에 마을 사람들과 소 140두가 먹고도 남을 물이 나왔어. 아파트 6층 높이의 풍차는 마을의 자랑이 돼 장유초에서 소풍을 올 정도였지. 지금은 사진만이 남아있네." 4대째 하손마을을 지키고 있는 김종호(64) 이장이 마을회관 벽에 걸린 풍차사진을 보며 옛 추억을 회상했다.
 

   
▲ 높은 둔덕에서 내려다 본 하손마을 전경. 마을 앞으로는 유하천이 흐르고 있고, 벼농사를 지었던 자리에는 공장과 주택이 들어서 있다.

풍차는 마을회관 앞마당 놀이터 자리에 서 있었다. 10년 동안 돌아가던 풍차는 바람이 거셀 때 소음이 크고 넘어질 위험성이 높아 작동이 중단됐다. 풍차를 잘라 마을 정미소 옆에 뒀지만 그마저도 위험해 결국에는 고물상으로 보내버렸다. 당시 사용했던 물탱크에는 물 200t을 담을 수 있었다고 한다. 아직까지도 마을회관 뒤쪽에 남아 있어 마을상수도로 쓰이고 있다.
 
동춘들이 아름다웠던 하손마을에서는 벼농사와 농작물 재배가 활발했다. 김 이장은 "1960년 김해에서 비닐하우스를 처음 시작한 박해수 씨 다음으로 하우스 농사를 시작했다. 쌀가마 거적과 비닐을 엮어다가 하우스를 만들었다. 토마토를 많이 키웠다. 무거워 쓰러질까봐 비만 오면 동네사람 모두 잠을 못자고 하우스를 지켰다"고 말했다.
 

활발했던 벼농사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는 마을 입구에 자리한 정미소다. 지금은 농사를 하는 사람이 적어 2년 전 폐업신고를 했다. 그래도 가끔 쌀을 찧고 있다고 한다. 마을 할머니들은 소일거리로 상추, 꽈리, 오이, 옥수수 등 밭작물을 재배해 장유오일장에 내다 팔고 있다. 김 이장은 "자식들이 바쁘다는 핑계로 고향에 안 오니 팔 수 밖에 더 있나. 하손마을이 장유오일장에 밭작물을 가장 많이 가져간다. 장날 전에는 동네 전체가 분주해져서 회의도 못할 지경"이라며 웃었다.
 

   
▲ 마을 뒷산 동남단에 있는 유하패총에서 2015년 발굴조사가 이뤄지고 있다.

김해지역에 산재한 비석을 탁본해 놓은 <김해금석문총람>에는 하손마을 동쪽과 서쪽에 최씨 입향조의 6대손인 인택(仁澤)과 문택(文澤) 형제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비가 있다고 실려 있다.
 
효자비의 내용은 이렇다. '형제는 농사를 지으며 산에서 나무를 해 부모에게 음식을 공궤했다. 부모가 병이 들었을 땐 대변을 맛보며 건강을 챙기고 윗옷을 벗어 하늘에 빌기도 했다. 형제는 백발이 성성한 나이에도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마냥 재롱을 떨어 부모를 기쁘게 했다. 부친상을 당했을 땐 어머니가 걱정돼 시묘살이를 하지 않고 무덤이 있는 장소까지 매일 10여 리를 걸었다. 산길이 험하고 가팔라 마을주민들이 "어찌 효자들을 쓰러지게 하겠느냐"며 돌길을 깎아 효자로를 만들었다. 모친상을 당했을 땐 묘소 근처에 움집을 짓고 3년간 호랑이와 함께 시묘살이를 했다.'
 
이렇듯 효자마을로 이름 높은 하손마을은 그 명칭에 걸맞게 김해 지역에서 가장 먼저 경로잔치를 시작했다. 1978년 동네 청년들이 단합해 어르신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십시일반 돈을 모아 첫 잔치를 마련했다. 매년 꾸준히 열리는 경로잔치는 올해 38회째를 맞이했다.
 

   
▲ 마을 상수도로 쓰고 있는 풍차 물탱크.

마을회관에서 나와 왼쪽 방향으로 300m를 걸으면 유적이 보인다. 마을 뒷산 동남단에 위치한 경상남도 기념물 제45호인 유하리 패총이다. 패총은 철기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조개를 먹고 버려 만들어진 조개더미다. 2015년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금관가야의 주요 세력이었던 양동리고분군 집단의 생활유적으로 밝혀졌다.
 
마을 앞 유하천을 따라 경전선 철길이 놓여 있고, 밭에는 도시인들이 귀농해 친환경 농업을 꾸려가고 있는 작은 비닐하우스들이 오목조목 몰려 있다. 마을 주변 내삼공단에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 30명이 먹고 자는 기숙사도 마을 한가운데에 있다. 그 옆엔 전자제품 자재공장이 있어 하루종일 화물트럭들이 '우당탕' 소음을 내며 마을을 오간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마을이지만 특이하게도 오래된 나무가 없다. 김 이장은 "후포마을로 가는 길목에 큰 포구나무가 있었던 것 같다. 아주 희미한 기억이다. 수 년 전 마을 입구에 있는 입석 옆에 마을 입구 방향을 가리키는 형상을 한 큰 소나무가 있었다. 트럭이 들이받아 죽어버렸다"며 안타까워했다.
 
김 이장은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기자에게 조용한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을 방안을 설명했다. "유적지 때문에 고층 건물을 못 지어 그나마 옛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문화재를 연구하는 학생들이 가끔 마을을 찾아오죠. 마을 입구에서 유하패총까지 500m 거리를 벽화로 단장하면 소풍 오는 학생들이 많아질 것 같은데 어때요?"
 
김해뉴스 /배미진 기자 bmj@gimhaenews.co.kr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배미진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비밀글로 설정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