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둘러싼 상반된 상징 다뤄
공포·죽음에서 공정·패션으로


검은색을 볼 때 우리는 무엇을 떠올리는가. 밤, 공포, 죽음, 파멸, 흉조, 슬픔, 상실…. 최근엔 '블랙리스트'라는 단어처럼 '요주의'란 이미지도 떠오른다. 이처럼 검은색은 대체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강하게 준다.

하지만 꼭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건 아니다. 법관의 법복처럼 공정무사함도 있고, 덴마크의 왕립도서관과 같은 검은 건축물이나 최신 전자기기를 감싸고 있는 검은색처럼 긍정적인 이미지를 주기도 한다.

또 있다. 15세기 프랑스 부르고뉴궁정의 검은색은 왕권을 상징했다. 20세기 패션회사 샤넬의 '리틀블랙드레스'에 사용된 검은색은 세련미의 극치로 해석된다. 이처럼 정반대의 확고한 극단을 동시에 상징하는 색이 또 있을까.

<이토록 황홀한 블랙>은 상반된 상징을 갖는 매혹의 색, '블랙'의 탄생과 변주를 집대성한 책이다. 책은 패션, 종교, 인류학, 예술 등 다양한 맥락 속에서 변주되는 블랙의 모습을 추적해 나간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종신석학교수이자 이 책의 저자인 존 하비는 1981년 '19세기 문화사에 끼치는 검은색의 영향'을 강의한 이후 검은색 연구에 천착해 온 최고의 권위자다.

어둠의 공포에서 시작된 '검은색'은 한동안 인간의 힘을 압도하는 존재를 상징하는 색이었다. 이를테면 성서 '창세기'에서 '신이 빛이 있으라' 하기 전에는 깊은 심해 위에는 어둠만 존재했다. 어둠은 검은색으로 연결됐고, 이는 두려움·공포·신성을 상징했다. 힌두교를 비롯한 다른 고대 종교에서도 검은색은 죽음과 파괴를 뜻하는 동시에 초월적인 신성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다.

검은색은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인간은 인체나 마음 속에 존재하는 검은 영역을 탐험하기도 했다.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검은색을 향한 관심은 그리스어로 '검은(melan) 담즙(choly)', 즉 멜랑콜리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히포크라테스를 비롯해 지난 2000년 동안 많은 의사, 과학자 들은 인체에 흑담즙이 흐른다고 생각했다. 이 단어는 슬픔과 광기의 기질로 여겨졌다. 현재까지도 우울, 우울증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죽음, 공포, 부정을 의미하던 검은색은 점점 신념, 예술, 사회적 삶의 구조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요컨대 검은색은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했다. 미술, 영화, 건축 등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다양한 작품 속에서 다시 태어나기도 했다. 하비는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 앙리 마티스의 <베고니아를 담은 바구니>, 톨킨의 <반지의 제왕>, 워쇼스키 자매의 <매트릭스> 등 우리에게도 익숙한 문학 작품 속에 나오는 검은색의 역할을 해설한다.

1961년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 헵번은 검은색이 갖는 부정적 이미지를 단숨에 깨 버렸다. 그는 어깨가 드러나는 블랙드레스에 검은색 긴 장갑을 낀 채 등장해 전 세계를 사로잡으며 '블랙 패션'의 상징이 됐다. 이처럼 검은색은 시대와 문화의 맥락 속에서 다양한 도구이자 상징으로 활용됐다.

21세기 들어 검은색에서는 죄악 등 부정적 느낌은 많이 사라졌다. 대신 엄격함과 세련미의 이미지가 더 크게 다가온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검은색의 역사는 인간의 공포를 조금씩 점령해 나간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비는 "검은색의 역사를 훑어보는 것은 그 자체로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꿰뚫어 보는 힘이 된다"고 말한다. 인류사를 관통하는 가장 우아하고 지적인 코드였던 블랙. 하비의 통찰을 통해 독자들은 역사상 가장 매혹적인 문화사를 만날지 모른다. 김해뉴스

부산일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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