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망대에서 바라본 다랭이마을의 전경. 층층이 자리 잡은 계단식 논과 민가가 바다를 마주 보고 서 있다.



지형상 어업 못해 궁여지책 다랭이 조성
뜻밖에 ‘국가 명승지’ 지정 인기 관광지

마을 중턱에 선 암수바위 ‘동네 수호신’
바다 낀 좁은 골목 걷다 비경에 감탄

곳곳에 심은 유채꽃은 노란 파도 물결
이정표로 쉽게 찾는 민박·식당 인심 푸근




한가로이 의자에 앉아 상상 속 마을을 그려봤다.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가파른 산비탈, 그 아래 통통배마저 댈 수 없는 깎아지른 해안절벽, 농업과 어업을 할 수 없는 척박한 환경에 사람을 그려 넣는다면 너무 이기적인 것일까. 입에 풀칠도 하지 못할 것 같은 곳에서 살아 남으라며 무책임하게 등을 떠민 것은 아닐까.
 
경남 남해의 최남단에 위치한 남면 가천 다랭이마을은 상상 속 그림과 딱 들어 맞으면서 앞의 의문을 속 시원히 풀어준다. 김해에서 150㎞ 떨어진 작은 마을이지만 찾아가는 길은 예쁜 그림책을 읽는 것과도 같아서 황홀하기만 하다. 더 버텨도 되련만 우수수 떨어지는 벚꽃의 헛헛함은 초록빛으로 물들어가는 자연풍경이 채워준다.
 

▲ 다랭이마을로 들어서는 가파른 산책길 입구.

다랭이마을은 남해사람들의 억척스러운 삶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옛 선조들은 산비탈을 깎아 평평한 땅을 만들었고, 돌을 쌓아 흙을 채운 후 논을 조성했다. 위치상 바다를 끼고 있지만 거센 바닷바람에 배를 묶지 못해 어업을 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손바닥만한 땅이라도 작물을 심을 수 있다면 층층으로 계단식 논을 만들었다. 면적이 좁은 논은 농부의 삿갓으로도 감춰질 정도다. 자투리 땅도 소홀히 다루지 않는 근면함과 세심함을 엿볼 수 있다. 
 
다랭이는 '다랑이'의 사투리 표현이다. 비탈진 곳에 있는 계단식 논을 뜻한다. 드넓은 바다와 680여 개의 계단식 논이 어우러진 다랭이마을은 2005년 문화재청으로부터 국가 명승지로 지정돼 경남에서 손꼽히는 관광지가 됐다. 마을에는 관광안내소가 설치돼 문화해설사가 상주하고 있을 정도다. 주말에는 40여 대의 대형버스가 관광객을 실어나르는 덕에 마을은 발 디딜 틈 없이 북새통을 이룬다.
 
마을 위 주차장에서 도로를 따라 5분간 내려가다 보면 다랭이마을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나온다. 사진을 찍으면 가장 잘 나올 위치까지 발판으로 표시해 놓았다. 설흘산과 응봉산의 품 안에 쏙 안겨있는 듯한 마을의 형태는 마치 요새 같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민가와 층층이 형성된 계단식 논은 모두 바다를 향해 마주보고 서 있다. 눈으로 보이는 멋진 풍광을 사진 프레임 안에 담고 싶어 욕심이 생긴다. 수십 장을 찍고 나서도 경치 구경에 한참을 서성였다.
 
본격적인 마을 구경은 관광안내소 앞 산책길 입구에서 시작하면 된다. 마을은 45도 비탈진 경사에 자리 잡았기 때문에 하산하는 것 마냥 발가락에 힘을 줘 종종걸음으로 내려갔다. 길을 걷다 보면 계단식 논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대부분 마늘과 시금치를 재배하고 있다. 마을 어귀에 앉아 미나리를 다듬고 있던 한 할머니는 노지에서 직접 기른 작물이라며 포대자루에 시금치를 한가득 담아 내민다. 해풍을 맞고 자라 맛이 진하고 달콤하다는 설명도 잊지 않았다. 가격은 겨우 2000원. 넉넉한 인심에 지갑이 절로 열린다. '가천 남자’에게 시집와 다랭이마을에서 70년을 살았다는 할머니는 "도시로 떠난 자식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어 할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명승지로 지정된 이후 빈촌에서 아주 잘 사는 마을로 변했다"고 자랑했다.  
 

▲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암수바위.

마을 중턱에는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서 있다. 바로 암수바위다. 숫바위는 남성의 성기모양을 하고 있고 암바위는 여성이 비스듬히 누운 형태다. 농사지을 일손이 부족했던 마을 여자들은 이곳에서 아들을 임신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때로는 배를 타고 나간 남편이 무사히 돌아 올 수 있도록 빌기도 했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암수바위를 미륵바위라고도 부른다.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암수바위는 바다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바래길을 따라 걸으면 옛 조상들이 지게를 지고 땔감과 곡식을 나르던 다랭이 지게길을 만나게 된다. 바다를 낀 좁은 길을 따라 걸으면 마을의 비경이 드러난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부드러운 흙길을 걷다가도 철썩이는 파도소리에 마음을 빼앗긴다. 바다 멀리 보이는 지평선은 아득하기만 하다. 쉴 틈 없는 고갯짓으로 세상의 모든 초록과 파랑을 두 눈에 담아본다.
 
빈 땅 곳곳에 심어진 유채꽃은 노란 물결을 만들어 낸다. 지게길을 따라 고즈넉한 정자가 있어 걸터앉아 풍경을 감상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밭에 심은 알싸한 마늘의 향과 큼큼한 유채꽃의 향이 걸음마다 따라와 코끝에 맴돈다.
 

▲ 해안산책로에 설치된 구름다리.

바래길에서 벗어나 구름다리가 있는 해안 산책로로 향한다. 다랭이마을은 관광객을 위해 두 개의 갯바위 사이에 철제 다리를 놓았다. 이 또한 하나의 모험 시설이 됐다. 밑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아찔한 광경에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의 시선은 정면이나 하늘을 향한다. "꺅~꺅~" 하는 비명소리도 종종 들려온다. 바다는 건너온 이들에게 수고했다는 듯 에메랄드빛 풍광을 선사한다. 층층이 포개어진 갯바위에 서면 시원한 바다를 온전히 느낄 수 있다. 갯가에서는 설흘산에서 내려온 등산객 무리가 바위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안주는 갯바위에서 뜯은 미역, 다시마가 전부였지만 눈가에는 노곤함과 행복함이 동시에 묻어났다.
 

▲ 마을 안에 자리한 밥무덤.

발길을 돌려 민박집과 식당이 몰려 있는 마을 중심부로 향한다. 좁은 골목 사이에는 특이하게 생긴 돌탑이 보인다. 바로 밥무덤이다. 벼 수확을 앞두고 육지에서는 큰 느티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지내지만 어촌에서는 밥무덤에서 풍년제를 지낸다. 주민들은 음력 10월 18일 오후 8시 이곳에 모여 동제를 지낸다고 한다. 준비 또한 철저하다. 마을 뒷산에서 채취한 황토에 밥을 깔고 한지에 싸서 돌을 얹어놓는다. 제주는 한 달 전에 마을에서 가장 정갈한 사람으로 정한다. 집에 임신한 사람이 있어선 안되고, 집 대문에도 금줄을 쳐 부정한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정성을 다한다.
 
마을 골목길에는 민박집과 식당을 찾기 쉽도록 이정표가 설치돼 있다. 생막걸리와 파전, 톳비빔밥, 멸치쌈밥 등을 파는 맛집과 민박집이 즐비하다. 평범한 집으로 보이는 곳 모두 민박을 치고 있었다. 방문객이 찾기 쉽도록 대문에는 '종운이네 집', '달뜨는 집', '친절한 집' 등 작은 간판이 걸려 있다. 1박당 4인 기준 5만 원으로 저렴한 가격에 푸근한 시골인심을 느낄 수 있다.
 
다랭이마을은 쟁기질 체험과 손그물 낚시, 뗏목타기 등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는 체험도 개발하고 있다. 영농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로컬푸드를 배송하는 '한마음 나누기' 사업도 활발히 진행한다. 길을 걷다 만난 주민들 모두 땀을 닦으며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보물과도 같은 마을을 보존하기 위해 각자 본연의 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김해뉴스 /남해=배미진 기자 bmj@gimhaenews.co.kr


▶다랭이마을 /남해군 남면 남면로679번길 21.
가는 방법 : 김해여객터미널에서 남해행 버스를 타고 남해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하차, 남해-가천 농어촌 버스 탑승 후 가천정류장에서 내려 도보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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