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림사 채소밭과 운무가 드리워진 신어산을 배경으로 한 절 전경(왼쪽 사진·이하 시계방향).
지난 호의 소제목을 '신어산 사찰순례'라 해 놓고, 은하사 그러니까 서림사와 쌍벽을 이루는 동림사(東林寺)를 다루지 못했던 것은 필자의 무계획성과 요령 없는 글쓰기 때문이었다. 허왕후를 따라 온 장유화상이 서역을 위해 서림사를 세우고, 동쪽의 가야국을 위해 동림사를 세웠다는 창건설화처럼, 신어산의 사찰을 돌아보면서 은하사 등과 함께 다루어야 할 또 하나의 절이었는데, 일주일이 지난 오늘에야 찾게 되니 실로 대단한 지각이 아닐 수 없다. 모두 장황하기만 한 필자의 수다 때문이겠지만, 막상 이렇게 되고 보니, 신어산 사찰 중흥의 지각생이었던 동림사에 오히려 걸맞게 된 건 아닐까 하는 핑계가 떠올랐다. 동림사를 지각생이라 한 것은 절의 유래는 은하사와 함께 할 정도로 오래되었으면서도, 정작 지금처럼 찾아가 예불할 만한 절집으로 되살아나기까지는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은하사 역시 지금 같은 모습은 아니지만, 임진왜란 때 함께 불타 없어진 이래, 늦어도 350년 전에는 다시 모양을 갖추게 되었던 데 반해, 동림사는 그러지 못했던 모양이다. 영구암 주지를 거친 화엄선사 한산스님이 1979년에 영구암 조실로서 지금의 동림사 자리에서 여러 석탑의 부재와 주춧돌, 수많은 기와와 도기·자기 파편들, 그리고 작은 소조불상 1점을 발견하면서 중창불사가 시작되었다. 1984년에 시작된 복원불사는 1985년에 법당 대원보전(大願寶殿)의 낙성을 보았고, 1989년까지 범종루·염화실·무문관·한산당 등의 건축을 거쳐, 1990년에 천왕문 앞 지장보살상이 세워지고, 2000년 절 마당 한 가운데에 거대한 지장보살상이 세워져 지금 같은 절집이 되었다. 오랜 잠에서 이제 막 깨어난, 아니 사전 발굴조사 없이 진행되었던 불사인 만큼, 거의 새롭게 만들어진 절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 천왕문과 108계단/ 동림사 지장보살상과 대원보전/ 칠설탱과 산신도·득성도 등이 있는 산신각.
은하사를 나서 150m쯤 내려가면 등산객들이 주차도 하고 화장실도 가는 작은 광장을 만나는데, 여기서 왼쪽으로 돌아서면 동림사 일주문이다. 기다란 원통형 주춧돌 위에 짧은 기둥을 올린 모양이 본사 범어사의 일주문인 조계문과 어딘가 닮았다. 조계문의 세 칸보다 좁은 정면 한 칸이기에 오히려 본래의 단아한 멋에 늘씬한 맛이 더해진 느낌이다. 양쪽 기둥 앞에는 오른손으로 육환장을 짚고, 왼손에 여의보주(장상명주(掌上明珠))를 든 두 분의 지장보살이 마중 나와 계신다. 여섯 개 고리의 육환장으로 지옥의 철문을 깨고, 밝은 여의보주로 어둠을 비추면서, 지옥에 떨어져 벌 받게 될 영혼 모두를 구제하겠다던 지장보살의 가르침을 중히 여기는 절이다. 일주문에서 시작된 지장보살과의 만남은 천왕문 앞에서, 절 마당에서, 법당 안에서 각각 섰거나 앉은 모습으로 계속된다. 저세상의 지옥에서 구원을 맹세했던 지장보살(地藏菩薩)은 현실의 죄나 고통을 없애주는 관음보살(觀音菩薩)과 함께 우리 민중과 가장 친했던 부처였다. 신라왕자 김교각(金喬覺·697~794)은 중국 안휘성 구화산에서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섬겨져, 지금도 많은 중국인의 추앙받고 있기로 유명하다.
 
일주문 초석에 앉아 쉬는 등산객들과 인사를 나누고, 구부러진 비탈길을 내려갔다 올라가 청동지장보살상과 천왕문이 있는 주차장 같은 공간에 이른다. 천왕문이라지만 아직 4천왕은 모시지 못했나 보다. 법당 앞까지 이르는 108개의 돌계단이 여기서 시작된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며 세상에 절었던 마음의 찌꺼기를 거친 숨으로 토하고, 땀도 흘리면서 108번뇌를 털고 오라는 뜻이리라. 올바른 순례라면 계단 오른 쪽에 세워진 화엄선사의 부도탑과 사적비를 둘러보는 것이 좋다. 현 주지 월야스님, 조칠보심 보살 등과 함께 지금의 동림사를 일으킨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화엄선사(華嚴禪師)는 한산(寒山)스님이 입적한 후에 올려진 시호다. 1923년 경남 고성 출생으로 1945년에 오사카(大阪)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48년에 범어사에서 수계한 후, 통도사·해인사·화엄사 등에서 수도했다. 1973년 범어사, 1974년 영구암 주지를 거쳐, 1979년에 동림사 터를 발견하고, 1984년부터 동림사 중창불사에 진력했다. 2001년 11월 동림사 조실로 입적함에 2003년 9월 부도탑과 행적비가 세워졌다. 스님은 글씨와 그림으로도 유명해, 선서(禪書)·선화(禪畵)·달마도의 전시회를 개최해 불사기금의 조성도 도왔단다. 절의 모든 현판 글씨와 대원보전의 신중탱화와 관음탱화, 산신각의 칠성도·산신도·득성도 등의 불화가 예사롭지 않은 것은 스님의 존재에서 비롯된 듯하다. 스님은 윤회의 길을 떠나면서, "칠십 칠년 꿈속의 나그네 / 꼭두각시 몸을 벗고 어느 곳에 가는고 / 만일 누가 물어도 말할 게 없나니 / 신어산 영봉엔 단풍잎이 날으도다"라는 열반게를 읊고, "아이고 추워라. 감 장사야! 감도 하나 못 팔고 불알만 꽁꽁 얼겠네"라는 말씀을 남겼다 한다.
 
▲ 동림사의 지상보살도와 대원보전관음탱화.
돌계단을 올라 답사객들이 절 안에 심어진 고추와 상추를 신기해 하는 채소밭을 지나, 범종루 옆 계단을 오르면 신어산을 병풍처럼 두른 법당 앞마당이다. 높이가 6m 이상은 족히 돼 보이는 화강암의 지장보살상이 희게 빛나고, 오른 손의 청동육환장은 지장보살님 키보다 더 높이 올라갔다. 뒤편으로 보이는 대원보전·염화실·문무관의 기와지붕과 신어산의 병풍바위가 잘 어울리는 스카이라인이 조화롭다. 법당서 스님 독경에 맞춰 기도하는 신도들을 곁눈질해 가며 뒤쪽 산신각에 오른다. 고건축 부재를 사용했는지 연륜을 느끼게 하는 산신각은 지난해 인제대 가야문화연구소의 조사에서도 확인되었듯이, 한산스님 발견 당시의 몰딩초석들이 다시 사용되었다. 산신각 앞에 널려 있는 도기편과 문무관 앞 출입구 쪽에 아무렇게나 모아둔 석탑의 옥개석 등에서는 고려시대의 특징이 확인되고 있다. 최근에 새로 지어지긴 했지만, 고려시대까지 올라 갈 수 있는 증거들은 가지고 있는 셈이다. 사진 몇 장을 찍고 돌아서려는데, 갑자기 양동이로 물 들어붓듯 한 폭우가 몰아쳤다. 비 그치기 기다릴 겸 다시 산신각에 들어가 왼쪽부터의 칠설탱, 산신도, 득성도를 찬찬히 살폈다. 불화를 그린 금어(金魚)는 알 수 없었으나,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어딘가 현대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게 좋았고, 세련된 구도와 색채는 경박함으로 흐르지 않고 있다.
 
동림사 일주문을 나서니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가 왼쪽 길가에 방치되고 있다. 장방형 원석에 검은 글씨로 '백의관음보살상'이라 쓴 것을 보니, 동양 최대의 관음상을 조성하려 했다는 그것인가 보다. 조성 후 소유관리권을 둘러싸고 돌 구입한 분과 대지를 제공하는 절 사이에 마찰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이게 그건가 보다. 현실의 죄나 고통을 없애주는 관음보살의 서림사(은하사)와 사후 지옥으로 떨어지려는 영혼을 구해주겠다는 지장보살의 동림사는 한 세트일 수밖에 없다. 필자가 운동하는 인제대 테니스장의 스탠드에서는 신어산이 동그랗게 양팔을 벌려 두 절을 품어 안은 형상이 제대로 보인다. 동쪽의 왼팔에 안긴 것이 동림사이고, 서쪽의 오른 팔에 안긴 것이 서림사(은하사)다. 서림사가 서역을 기념하고, 동림사가 가야를 축도하기 위해 세워졌다는 억지춘향의 창건설화 보다는 영구불변한 신어산에서의 위치관계와 관음도량과 지장도량의 대응관계에서 양자의 인연을 설명하는 게 더 합리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림사의 지장보살상은 이미 우뚝 솟았는데, 이제는 은하사의 관음보살상이 갖추어질 차례다. 이번엔 은하사가 많이 늦지 않길 바랄 뿐이다.
 
▲ 호국영령과 독립열사 영혼을 모신 충혼탑.
도로 왼쪽의 신어산삼림욕장 표지석을 지나 조금 내려가다 보니 오른 쪽 가야연수원에서 철거인지, 리모델링인지 공사가 한창이다. 진영의 청소년수련관과 삼계의 김해수련장이 생기기 전까지는 단체가 투숙할 수 있는 유일한 시설이었다. 1985년 2월 김해시와 가야개발주식회사가 계획 착공했던 신어산종합개발사업의 일부로, 가야컨트리클럽·가야랜드와 함께 지어졌던 연수원이었다. 골프의 대중화로 코스를 늘린 컨트리클럽은 호황인 모양이지만, 오래된 가야랜드는 많이 왜소해졌고, 가야연수원은 리모델링 공사에 내몰리는 모양이다. 연수원을 지나 비탈길을 조금 내려가면 왼쪽으로 호국영령의 위패를 모시는 충혼탑이 있다. 원래 동상동 포교당에 안치해오던 위패들을 1966년 6월 봉황동 옛 공설운동장 서쪽 언덕에 세운 충혼탑에 옮겼다는데, 아파트와 체육관이 들어서면서 시끌벅적해져 1989년 6월 현충일에 이곳으로 옮겼단다. 하늘의 둥근 향로를 받치는 세 다리는 육·해·공의 삼군을 상징한다는데, 2장의 벽화 중에는 일제와 싸우는 모습도 있어, 6·25동란의 호국영령 외에 독립열사도 모셔져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육군중령 최태수 외 천 분이라지만, 벽화 뒤의 봉안각이 언제나 잠겨 있는 만큼, 모셔진 이들의 이름과 공적을 새겨진 동판이라도 부쳤으면 좋을 것 같다. 설계 김도순, 제작 박상규, 시공 대저토건 박순규.
 
▲ 김해시하키장.
충혼탑에서 몇 걸음 되지 않아 동부스포츠센터의 입구를 알리는 표지판이 서있는데, 여기부터 줄지어 있는 수영장, 체육관, 김해하키경기장, 동부테니스장 등은 동김해 주민을 위한 스포츠콤플렉스다. 2006년 4월 27일 개관의 김해동부스포츠센터는 2004년 12월부터 76억 원을 들여 만들었는데, 지하 1층에 10레인의 실내수영장, 지상 1층에 농구·배구·배드민턴을 위한 실내체육관과 요가·에어로빅을 하는 그룹연습실(GX), 지상 2층에 헬스장과 건강처방실이 있다. 개관 이래 인제대 사회체육과에서 위탁운영해 오다 지난 7월 김해대가 새 위탁운영자로 선정되었다. 센터 옆 주차장을 건너면 한국하키의 메카인 김해시하키경기장이 있다. 시원한 인공잔디와 알록달록한 스탠드와 천막 모양의 흰색지붕, 그리고 경기장 위 산 사면에 하키하는 모습을 회양목으로 나타낸 상징물의 조화가 아름답다. 1997년 9월 하키전용경기장 2면과 5천의 관람석으로 오픈한 이래, 전국체전·대통령기·KBS배 하키대회 같은 전국대회를 연달아 치르고 있으며, 따뜻한 날씨와 어울려 동계훈련지로서 각광받고 있다고 한다. 마침 오후 3시 조금 넘은 시간에 기온은 35도, 아니 그라운드는 40도 이상도 될 것 같은데, 4~5개 팀이 소리소리 질러가며 연습에 열중하고 있다. 서 있는데도 줄줄 땀이 흐른다. 성적이 좀 안 좋더라도 절대 비난하지 말아야지를 다짐하며 돌아선다. 하키경기장 아래쪽에 있는 7면의 동부테니스장은 보기 드물게 전망이 참 좋은 테니스장이다. 내려다 보이는 김해평야와 서낙동강, 그리고 남해바다가 오늘따라 유달리 희고 풍성한 뭉게구름과 함께 시원스럽다. 장유의 능동테니스센터와 함께 전국대회도 개최해 동호인들의 경기력 향상은 물론, 지역경제의 활성화에도 기여하고 있다 한다. 원래 계획은 김해대~영운중~삼방고까지 돌고, 그 아래에 있는 커피 볶는 집 루바토에서 쉴 작정이었지만, 더워서 안 되겠다. 커피보단 팥빙수 먹으러 가야겠다.


Tip. 향기로웠던 세분의 고향 '삼방동:三芳洞'
산어천을 사이에 두고 동서 양쪽으로 동네가 나뉘어 있습니다. 동쪽이 삼방동, 서쪽이 어방동입니다. 삼방은 삼강(三綱)으로도 불렸는데, 최초의 행정구역명은 구한말의 활천면 삼방리였고, 1947년부터 삼방동이 되었습니다. 석 삼(三), 향기로울 방(芳)이라 본받을 만큼 향기로운 인물 세 분이 계셨던 데서 비롯된 이름입니다. 임진왜란 때의 일입니다. 김해성을 지키다 순절했던 사충신 중 한 분인 이대형(李大亨)은 충신, 그의 장남 우사(友社)는 왜적이 점령한 김해성에서 부친의 시신을 거두려다 살해당한 효자, 그의 질녀 이 씨(周益昌의 처)는 형 대윤(大胤)의 딸로 김해성 함락 이듬해 7월에 왜적을 만나자 깊은 못에 몸을 던져 자결해 나라에서 홍살문 같은 정려(旌閭)를 내려주었습니다. 내를 바라본다는 뜻의 관천(觀川)거사를 칭했던 충신 이대형은 삼방공원에서 서쪽 신어천 가의 관천재(觀川齋·삼안로 297번길 30-18)에서 재령 이 씨 후손들의 제사를 받고 있습니다. 관천재의 북쪽과 남쪽 신어천을 건너는 다리 2개의 이름이 삼강교와 충절교입니다. 멋없는 시멘트다리지만 이런 역사적 유래를 기억해 붙인 성의가 갸륵합니다. 페인트는 벗겨지고 광고 붙였던 자국이 덕지덕지 더럽지만 지나시거든 한번 눈여겨보시지요.






이영식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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