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유의 시민문화단체인 대청천문화회(회장 조래욱)는 시민들과 함께 '옛길탐방'을 매달 넷째주 토요일에 총 다섯 차례 실시한다. 1994년 장유에 불기 시작한 택지개발 때문에 아파트 숲에 묻혀 버린 논과 밭, 마을, 산의 길을 찾아 걷는 행사다. 오랜 옛날 장유를 지켰던 선조들이 일상처럼 걸어다녔던 길을 따라 걷는다. <김해뉴스>는 대청천문화회와 함께 걸은 장유의 옛길을 소개한다.


 

 

 

가야설화 얽힌 장유사 지나 산행길 시작
절 입구엔 노 전 대통령 공부하던 토굴

상남장 가던 보부상 넘던 상점령 지나
고개 지키는  당산나무 앞에서 복 빌어

윗상점마을 등산길에 구들 만들던 채석장
무거운 돌 짊어진 늙은 가장의 삶 느껴져




 

▲ 대청천문화회 회원들이 용지봉 제단 앞에서 복을 기원하고 있다.

첫 옛길탐방은 지난 22일 장유사에서 시작했다. 불교 신도들이 장유사~창원 성주사를 오갔던 길을 따라 용지봉을 넘어 상점령까지 내려가는 구간이다. 장유사는 과거 성주사의 말사였다. 그래서 장유사 뒷길로 해서 상점령을 지나 성주사로 갔다. 다른 길은 없었다. 답사 거리는 약 5㎞. 대청천문화회 옛길탐방대 대장은 김해문화원 김우락 향토사 연구위원이 맡았다.
 
옷부터 신발까지 등산 채비를 갖춘 대청천문화회 회원들과 시민 10여 명이 장유사 경내에 모였다. 장유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시원한 풍경에 눈길을 빼앗긴 회원들을 김 대장이 부른다. "여기 좀 보세요. 장유사 입구에 저 나무 보이십니까? 서어나무입니다." 장유사 입구에 서 있는 서어나무를 중심으로 도로가 두 개로 갈라져 있다. 서어나무는 '서쪽에 있는 나무'라는는 뜻이라고 한다.
 
다음달 3일 석가탄신일을 앞두고 장유사에는 다양한 색의 연등이 바람에 두둥실 춤을 추고 있었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제2'에 따르면 가야 제8대 질지왕(?~492)은 452년 허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로왕과 허왕후가 결혼한 곳에 왕후사를 창건하고, 그로부터 500년 뒤에 장유사를 세웠다. 대웅전 오른쪽 60m 아래에는 토굴이 하나 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법고시를 치기 위해 공부를 했던 곳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김 대장이 우거진 녹음에 가려진 토굴을 가리켰다.
 
대웅전 오른쪽 뒷길 쪽에는 오랫동안 장유사를 지켜온 장유화상사리탑이 자리 잡고 있다. 경남도문화재 제31호다. 임진왜란, 한국전쟁 기간 중 장유사가 소실됐을 때도 장유화상사리탑은 살아 남았다. 갖은 풍파를 겪은 장유사의 과거를 장유화상사리탑은 묵묵히 지켜보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유화상 탱화가 있는 칠성각을 지나 본격적인 탐방을 시작했다. 운동화 끈을 단단히 조이고 용지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김 대장은 "용지봉까지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우리가 가는 길은 과거 장유사에서 창원 성주사까지 불교 신도들이 오가던 길이다. 다소 경사가 있어 힘들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10분도 채 되지 않아 숨이 차올랐다. 상수리나무, 떡갈나무를 손으로 꼭 잡으며 가파른 경사길을 올랐다. 가파른 길을 지나자 커다란 바위하나가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 용바위다. 장유 주민들 사이에서는 모양이 사자 같다고 해서 '사자바위'로도 불린다.
 

▲ 용지봉으로 향하는 길에서 바라본 풍경. 장유사가 한 눈에 보인다.

용바위가 있는 불모산은 창원 성산구 성주동과 장유 대청동에 걸친 산이다. 해발 801m여서 김해 서부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허왕후의 일곱 왕자가 모두 성불(成佛)해 허왕후를 '불모(佛母)'로 모셨기 때문에 불모산으로 부른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불교 신도들이 걸었다는 옛길을 30분 정도 걷자 푸른 하늘과 맞닿은 용지봉이 보였다. 용지봉은 장유와 진례면, 창원의 경계 지점이다. 용제봉으로 불리기도 한다. 용지봉은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형상을 하고 있다. 관직을 얻을 수 있는 명당자리라고 한다.
 
<김해지리지>, <김해읍지> 등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이곳에는 가뭄이 계속될 때 하늘에 비를 빌어 풍년이 들도록 기원하던 기우단이 있었다. 김 대장은 "김해에는 분성산, 용지봉과 옛 김해군 녹산면(현 부산 강서구 녹산동) 등 3곳에 기우단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지금은 주춧돌조차 찾아볼 수 없다. 용지봉의 기우단 흔적을 꼭 찾고 싶다"며 아쉬워했다. 일행은 용지봉 표지석 옆에 들고 온 과일, 막걸리 등을 올려놓고 제를 올려 기우단을 찾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다. 
 

▲ 장유옛길탐방 지도 : 장유사 ~ 용지봉 ~ 불모산

용지봉에서 상점령으로 걸어가는 길에는 진달래꽃이 다소곳이 봉오리를 오므리고 있었다. 김 대장은 막 피어난 진달래꽃을 따 오물오물 씹었다. 그는 "어릴 적에는 먹을 것이 없어 산에 핀 진달래꽃을 간식 삼아 먹었다"고 말했다.
 
말과 나룻배, 튼튼한 다리만이 이동수단이었던 조선시대에 부산에서 조만강을 따라 물자를 싣고 온 배는 신문동 범동포구에 닿았다. 범동포구에는 물자를 사고 파는 보부상들이 북적댔다. 보부상들은 짐을 가득 싣고 대청계곡을 따라 창원 상남장으로 향했다. 그 때 꼭 넘어야 하는 곳이 상점령이었다. 상점(上店)은 '높은 고개 위에 있는 장소'라는 뜻이다.
 
'물건 잘 팔리게 해 주시고, 돈 많이 벌게 해 주십시오.' 상점령을 지키고 있는 당산나무 앞에서 보부상은 복을 빌었을 것이다. 김 대장은 "지금은 상점마을이 윗상점과 아래상점으로 나뉘어졌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상점마을에는 보부상의 주린 배를 채워줬던 주막도 있었다고 문헌에 기록돼 있다"고 설명했다.
 
대청계곡을 따라 윗상점마을로 발걸음을 옮겼다. 숲이 우거졌던 마을에는 전원생활을 꿈꾸는 사람들이 지은 주택과 음식점 등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새소리 대신 사람들의 수다만 시끄럽게 들렸다.
 

▲ 대청천문화회 옛길탐방대 김우락 대장이 장유화상사리탑과 전나무를 설명하고 있다.

윗상점마을에서 숲을 헤치고 등산길로 접어들자 끝이 보이지 않는 돌무더기가 펼쳐졌다. 성인 남자도 들기 힘든 큰 돌들이었다. 등산객들이 오가며 쌓은 돌탑도 곳곳에 눈에 띄었다. 김 대장은 "조선시대부터 근대까지 집에 온돌을 만들 때 쓰던 구들을 캐던 채석장이다. 돌을 보면 도장을 찍어낸 것처럼 일정한 모양으로 채석한 흔적이 보인다"고 말했다.
 
가스·기름 보일러가 온돌을 대신하면서 채석장에는 사람의 발길이 끊겼다. 이제 이곳을 찾는 사람은 등산객들뿐이다. 채석장을 바라보며 과거를 상상해 본다. 안전장비라고는 없던 시절, 흰 무명옷을 입고 짚신을 신은 남자들이 지게에 큰 돌을 얹는다. 자신의 덩치보다 더 무거운 돌을 지고 힘들게 일어난다. 돌의 무게는 늙은 가장이 짊어진 삶의 무게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한참동안 채석장에서 과거로 날아가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다시 상점마을로 나왔다. 불모산에는 연두빛 봄이 뭉게뭉게 피어나고 있었다. 첫 옛길탐방은 여기서 마무리됐다.

김해뉴스 /김예린 기자  beaurin@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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