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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석탑 싣고 가야 온 허황옥 “풍랑 막아준 해신께 해은사 바칩니다”(10) 해은사(海恩寺)
  • 수정 2017.05.10 09:20
  • 게재 2017.05.10 09:17
  • 호수 322
  • 12면
  • 심재훈 기자(cyclo@gimhaenews.co.kr)
   
▲ 해은사 대왕전에 있는 수로왕과 허왕후 영정. 조선 후기 민화풍 작품으로 당시 백성 사이에서 허왕후 이야기가 널리 퍼졌음을 보여준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절 건립 배경 설명
“허왕후, 분성산 정상서 바다 보며 향수 달래”

대웅전 대신 지은 대왕전에 수로왕 부부 모셔
투박·서민적 영정 풍모, 당시 백성 인기 설명

각종 자료에 오래 전부터 절 존재 남아 있어
고 배석현 선생 건립 ‘적멸보궁’ 특이형태 자랑



해발 330m 분성산 정상 타고봉 해은사(海恩寺)에는 세운 지 30년 된 특이한 모양의 석탑이 있다. '파사석탑 적멸보궁'이라 불리는 인도 스투파(불탑) 형식의 탑이다. 엄격히 말하면 이 탑은 적멸보궁이 아니다. 원래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법당을 적멸보궁이라 부르는데, 이곳에는 탑만 있기 때문이다. 탑 속에 중국을 거쳐 인도로부터 전해진 부처 진신사리 3과가 안치돼 있어 그렇게 부를 뿐이다. 따라서 정확히 하자면 '적멸보탑'이라고 불러야 한다.
 
파사석탑 적멸보궁은 김해불교신도회 회장을 지낸 고 배석현 선생이 한일그룹 김한수 회장 생전에 후원을 받아 일으킨 불사다. 배 선생의 아들 배상법 씨는 "해은사는 허왕후가 무사히 가야로 온 것에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지은 절이다. 우리나라 최고 명당인 오대산 적멸보궁과 산세가 유사하다. 부친은 김해의 안녕과 번창을 기원하기 위해 파사석탑 적멸보궁을 지어 부처 진신사리를 모셨다"고 말했다.
 
파사석탑 적멸보궁에 안치된 진신사리는 본래 해남 백화사에 있었다. 배 선생이 백화사에 석가탑을 재현한 새 탑을 지어주고 진신사리 일부를 얻어 왔다. 진신사리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갔다가 청나라 때 문장가인 옹방강(1733~1818)이 추사 김정희(1786~1856)에게 "조선 불교를 다시 꽃피웠으면 좋겠다"면서 전달했던 것이라고 한다.
 

   
▲ 가야불교의 내력을 고이 간직한 해은사 입구.

파사석탑 적멸보궁이 국내의 다른 탑들과 모양이 다른 것은 인도에서 석공을 초빙해 제작했기 때문이다. 파사석탑이 인도에서 전해진 만큼 이를 재현하겠다는 뜻이었다. 1980년대 당시에는 정상까지 길이 제대로 없어 탑을 운반하느라 헬리콥터를 동원했다.
 
배상법 씨는 "굉장히 힘든 공사였다. 당시 많은 비용과 노력을 들여 파사석탑을 재현하려 했지만, 사실 2000년 전 고대 스투파 형식을 제대로 고증하지 못했다. 중세 이후 힌두양식의 조각이 탑 몸체에 양각된 점은 다소 아쉬운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사연을 간직한 적멸보궁을 품은 해은사는 암자라고 불러도 될 만큼 작은 사찰이다. 사찰에는 조선시대 이전의 흔적은 그다지 남아 있지 않다. 18세기에 목불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영산전의 아미타불, 대왕전에 안치된 조선말 민화풍의 수로왕·허왕후 영정을 제외하면 사찰은 1980~1090년대에 새로 지은 건물들로 채워져 있다. 본전인 영산전이 1982년 증축됐고, 대왕전·파사석탑 적멸보궁·산신각 등도 새로 개축됐다.
 
그러나 해은사의 내력은 짧은 건축물들의 이력에 비해 훨씬 깊고 아련하다. 이 절의 창건설화는 2000년 전 가락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락국 건국 이후 이역만리 인도 아유타국에서 허황옥(허왕후)과 그의 오빠 장유화상이 배에 불경과 파사석탑을 싣고 긴 항해에 나섰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파사석탑조의 기록에 따르면, 허황옥 일행은 인도양과 남중국해를 거쳐 태평양의 서쪽 끝단인 가락국에 도착했다. 긴 항해를 무사히 마친 허황옥 일행은 풍랑을 막아 준 바다와 해신의 은혜에 감사하는 뜻으로 해은사를 세웠다.
 

   
▲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파사석탑 적멸보궁'.

이런 까닭에 해은사에는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왕을 모시는 전각인 대왕전이 있다. 대개 사찰에는 대웅전, 극락전, 무량전 등으로 가람(승가람마·승려가 살면서 불도를 닦는 곳)을 배치한다. 대왕전은 해은사에서만 찾을 수 있는 독특한 전각이다. 대왕전의 '대왕'은 바로 수로왕을 뜻하기 때문에 그와 허왕후의 영정을 안치하고 예를 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왕전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곳에 나란히 모셔져 있는 수로왕과 허왕후 영정의 투박함과 서민적 풍모 때문이다. 수로왕은 왕관이나 면류관, 옥대 같은 복식을 갖추지 않았다. 조선시대 관리의 행색에 가깝다. 언뜻 보면 다른 민화에 자주 등장하는 신선이나 저승사자처럼 비쳐지기도 한다. 옆의 허왕후 영정은 왕족이기보다 조선시대 일반 여염집 아낙네 같은 옷차림과 쪽머리를 하고 있다. 영정이 제작될 당시 고증 없이 대충 그려진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수로왕과 허왕후의 이야기가 당시 힘없고 배우지 못한 대부분의 백성들 사이에서 대중적으로 유행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해은사 주지 유정스님은 "조선시대 이름 모를 화가가 그린 민화를 낮게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아직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 현재 해은사에 있는 영정은 복사본이다. 2000년 원본을 도난당했다. 1년 뒤 도굴범이 일본으로 영정을 밀반출하려다 문화재청에 잡혔다. 원본은 범어사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해은사의 내력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는 분성산이 먼 옛날 마을과 성곽이었다는 사실이다. 해은사가 자리한 분성산은 가야 이전 청동기시대의 마을 흔적이 발견될 정도로 오랫 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던 곳이다. 고고학적 조사에서도 삼국시대 성벽 흔적이 발견됐다.
 
1872년 제작된 '분성산성지도'에는 현재 해은사 자리에 3채 규모의 '은해사'가 표시돼 있다. 19세기 <김해읍지>에도 '지휘자인 별장, 승려로 편성되는 승군을 뒀다'는 기록이 나온다. 김해시 문화재과 송원영 팀장은 "단지 군사를 주둔시켰다면 승군이라고 기록하지 않는다. 당시 분산성 안의 승려들이 군사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만큼 분성산성지도 제작 이전에도 은해사가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1960년대 분산이 분성산으로 명칭이 바뀌었듯 비슷한 시기에 은해사를 부르기 쉽도록 해은사로 바꾼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 해은사에서 바라본 김해평야. 허왕후는 2000년 전에는 바다였던 평야를 바라보면서 고향을 그리워했다.

성 안에 남아 있는 비문과 고려 말 정몽주의 <기문>에는 '1377년 고려 우왕 때 김해부사 박위가 왜군에 침입에 대비해 폐허가 된 산성을 정비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려시대 이전부터 성곽이 존재했다면 불교가 성행했던 통일신라 때도 사찰이 존재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이렇게 오랜 과거부터 이곳에 불교가 들어왔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만 과연 가야시대에 해은사가 있었는지는 여전히 논란이 되는 상황이다. 송원영 팀장은 "고고학계나 역사학계에선 산 중턱이나 정상 부근에 사찰이나 암자가 들어선 시기를 통일신라 시대 이후로 본다"고 말했다. 
 
반면 유정 스님은 "해은사는 분성산 안에 위치한 탓에 전란으로 몇 차례 소실됐다가 수 차례 복원됐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절터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분성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바다다. 이곳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예전엔 바다였을 김해평야와 저 멀리 남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허왕후, 장유화상 일행이 남쪽 바다를 보며 자신들의 목숨을 지켜 준 것에 감사하고 고향을 그리워했다는 설화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해은사처럼 김해뿐만 아니라 경남 곳곳에는 허왕후와 장유화상, 허왕후의 일곱 왕자 등을 다룬 수많은 연기설화들이 이어져 오지만, 아직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급격한 개발이 이어진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2000년 전 가야불교의 직접적인 흔적을 찾기는 더욱 어려워질지 모른다. 30년 전 고증이 덜 돼 실제와 다소 거리가 있는 파사석탑 적멸보궁을 세운 배 선생의 행동은 다른 이들에게는 마치 '돈키호테'처럼 비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모자이크를 끼워 나가는 작업을 계속한다면 가야불교는 언젠가는 그 진면목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김해뉴스 /심재훈 기자 cyclo@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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